2018년 8월 11일(2일째)-다자이후, 나가사키 시내
학문의 신이자 천재로 일컬어지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어찌 보면 당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통일신라의 최치원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을 모시는 신사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수험생들이나 부모들이 와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매년 많은 참배객이 오기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는 신사였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날도 신사 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지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거북이처럼 기어갔다.
드디어 학문의 신이 있는 다자이후 신사에 도착했는데,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짜 날이 섭씨 40도인지 찌는 듯한 더위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주차장에서 신사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서 물을 사 먹으러 가게에 몇 번을 갔다. 어머니는 양산을 펼쳐 들고 다니셨다. 아이에게는 이때 처음으로 라무네를 사줘서 맛보았다. 구슬이 안에 있어서 나올 듯 말 듯한 라무네의 장난이 재미있었는지 아이는 호기심을 보였다. 도착한 도리이 앞에서 시주를 받고 있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들렸는데 땀이 뚝뚝 떨어지는 날씨 속에서 스님이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신사 안에는 휴일이라 많은 일본인들이 입시 운을 받기 위해 황소 상을 만지고 기도를 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이 황소 상을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본전에도 참배하려는 사람들로 내리쬐는 햇빛이 무색하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신관과 무녀들이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색다른 풍경이었다. 우리는 참배를 하러 온 게 아니니 둘러보기만 했다. 아이는 더워서 얼굴이 벌게져서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내려오는 길에는 빙수를 팔길래 딸기 시럽을 뿌린 빙수를 사서 빨대를 꽂아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차에 타서는 나가사키로 가는 길 내내 아내와 아이는 깊은 낮잠을 잤다.
조선인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험한 삶을 살았던 군함도가 바로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전범 기업 중에 하나인 미츠비시 중공업, 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우리의 시선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군함도는 하시마섬의 별칭으로 조선인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탄광 일을 했던 곳인데 일본은 이곳을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화의 경제 발전이란 내용으로 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였고 결국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나가사키를 오니 군함도 방문도 넣으려고 했지만 일본의 제대로 된 조선인 강제 징용의 설명이 삭제된 군함도 방문은 의미가 없을 듯해서 가지 않기로 했다.
이곳은 역사가 깊은 무역항이기 때문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차이나 타운이 있었다. 일본에서 차이나 타운하면 요코하마와 고베의 차이나 타운이 유명했는데 이곳은 소박하면서 작은 골목길로 금방 돌아볼 수 있었다. 나와서 조금 걸으니 우리가 목적한 데지마가 나왔다. 데지마는 1636년 도쿠가와 막부가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으로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다. 네덜란드만 사용 가능했는데 당시 유럽은 대항해 시대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많은 나라들이 전 세계를 탐험하던 시기로 이후에는 가톨릭 전파나 식민 지배를 위한 무력을 들고 나왔는데 네덜란드는 오로지 무역만을 원해서 네덜란드만 통상이 허락되었다. 그 후 일본이 강제로 개항하기 전까지 200여 년의 시간 동안 일본의 창구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때 들어온 네덜란드 학문은 난학(蘭学)이라고 불리면서 일본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서양 학문이 되었다. 1859년에 폐쇄되었는데 이후에는 잊혔다가 지금은 나가사키에서 복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복원이 되어 입장이 가능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일했을 네덜란드 상인과 관리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또 일본인의 눈으로는 얼마나 이색적으로 보였을까 상상이 되었다.
성당 앞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올라가다 보면 일본 근대화 당시 상인이었던 글로버의 저택이 있었던 구라바엔(グラバー園)으로 갔다. 영국인 글로버는 나가사키가 개항한 이후 무역을 하기 위해 왔는데 정부 고위 인사들과 관계하면서 여러 가지를 팔았는데 특히 무기 판매로 거대한 부를 쌓았다. 그리고 일본인 아내를 맞이하고 1911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 전망이 매우 좋아서 그곳에서 나가사키 항이 한눈에 조망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서양 건물로 1863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글로버가 사망한 이후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가 소유권이 있었던 미츠비시 중공업에서 나가사키 시에 기부하여 공개되었다고 한다. 미츠비시 중공업에서 이 저택을 소유하게 된 계기가 이색적인데 당시 군함을 만들고 있었던 미츠비시 중공업에서 이곳에서 항만이 보이니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계속된 걸음에 지칠 법도 했지만 혼잡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이 산뜻한 이 도시를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밤에 구마모토로 이동해야 했기에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는 나가사키에 왔으니 먹어봐야 하는 나가사키 짬뽕(長崎ちゃんぽん)으로 정했다. 우리에게 짜장면이 있다면 일본에는 나가사키 짬뽕일 정도로 중국 요리 중에서 현지화가 된 요리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맵고 빨간 국물이 아닌 하얗고 담백한 맛이 매력적인 음식이다. 시내의 유명한 중국 식당을 찾아갔는데 평점이 높은 만큼 서비스도 좋고 맛도 좋아서 인상적이었다. 나가사키 짬뽕과 더불어 볶음밥과 중화 냉소바를 주문했다. 볶음밥은 아이와 먹기 위해 주문했고, 냉소바는 일본에서만 파는 중국 요리인데 여름 별미로 나오는 요리라서 주문했다. 나가사키 짬뽕은 담백하면서 시원하기도 하고 묵직했는데 사골 육수와 해산물로 맛을 낸 것이 매우 조화로웠다. 다들 좋아해서 식사를 마치고 주인아저씨에게 계산하면서도 너무 맛있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가게 앞에서 기념하려고 사진을 찍는데 그것을 본 주인아저씨가 나와서는 우리 가족 단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일본에서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 탄생하였다.
이제 렌트카를 주차한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좁은 도로에 전봇대가 늘어서 있고 전깃줄이 이리저리 얽힌 것이 인상적이라 아이와 아내, 어머니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번잡하지 않아서 좋았던 나가사키였다. 짧은 나가사키 여행을 마치고 다시 큐슈 고속도로를 타고 구마모토를 향해서 갔다. 날은 어느새 어둑해져서 야간 운전을 하게 되었다. 중간에 히로카와 휴게소에 들렀는데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해 보였다. 식당도 있고 지역 특산물을 파는 코너도 있었다. 큐슈, 특히 후쿠오카가 명란젓이 유명한 고장이라 그런지 명란젓 상품이 굉장히 많았다. 매운 명란젓이 유명했는데 명란젓 자체도 팔았지만 튜브로 만들어서 짜서 먹을 수 있는 명란젓도 있었다. 명란젓은 알다시피 한국 요리이지만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태어나 살았던 카와하라 토시오가 일본에 소개해서 일본 전국적인 요리가 된 것이다. 워낙 이것도 현지화가 되어서 그런지 한국 요리라고 아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일본에서는 명란젓을 멘타이코(明太子)라고 하는데 이는 명태의 자식, 즉 명태 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름만 봐도 한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워낙 고유명사처럼 쓰이니 그런 듯했다. 휴게소에서 다시 구마모토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마모토 시내는 이미 한밤 중 같았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려서 물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샀다. 저녁 8시가 넘어서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널찍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들어가서 체크 인을 한 다음 조식권을 챙기고 방에 짐을 풀었다. 특이하게 2층 침대가 있는 곳이어서 아이와 사다리 장난을 치면서 야식으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나눠 먹고 잠이 들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