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새벽잠에서 깼지만 억지로 잠을 청해 아침 알람벨 소리에 일어날 수 있었다. 아이는 제일 먼저 일어나서 뒹굴거렸다. 어제보단 늦게 호텔 밖으로 나와서 일요일 아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찾아놓은 식당은 호텔 근처여서 금방 도착했다. 9시 오픈이라 몇 분 기다렸는데 아이가 "Can I come in?"이라 물어보며 말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자리를 안내받고 주문하는데 먹는 걸 아끼지 않는 우리의 특성상 카푸치노, 주키니호박과 오이 샐러드, 에그 베네딕트, 아보카도 토스트, 팬 케이크와 어제 아이가 인터넷으로 찾아놓은 크레이프 케이크 등을 주문해 먹는 여유를 즐겼다. 아이는 팬 케이크와 케이크까지 느끼하고 다디단 요리를 시켜서 먹다가 느끼하다고 포기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우리의 첫 목적지인 카사 바트요를 향해 갔다.
안토니 가우디, 우리가 흔히 '가우디'라고 칭하는 이 건축가는 카탈루냐가 낳은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로 아마 한국인이 아는 건축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천재 건축가로 유명하며 가우디 특유의 아르누보 양식을 정립했다. 스페인 현대 미술에 피카소가 있다면 건축에는 가우디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우디의 건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건축은 곡선, 신화, 자연이 바탕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라는 가우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당시 주류였던 직선과 단순의 미학인 모더니즘과는 큰 거리가 있다. 그래서 가우디 작품 스타일은 그를 제외하곤 전승되어 거론되는 이가 극히 드물 정도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독특한 세계를 여는데 발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우디 작품에서는 신화 나아가서 가톨릭 신앙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모습이 많이 보인다. 생활 자체도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연이 보여주는 각종 열매, 식물, 곤충, 동물의 모습을 건축에 반영했다. 가우디는 1926년 73세로 생을 다하는데 그게 노면 전차에 치여 노숙자로 오인받아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거의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무덤은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밑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작품은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첫 완성작인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1879)을 비롯해 카사 비센스(1878~1888), 구엘 별장(1884~1887), 구엘 저택(1886~1889), 카사 칼베트(1898~1900), 구엘 공원(1900~1914),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5~1910) 그리고 지금까지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1883~) 등이 있다. 오늘 방문하게 되는 가우디의 작품은 카사 3종 세트로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카사 비센스가 되겠다. 카사(Casa)는 집을 의미하는 뜻으로 카사 바트요하면 바트요의 집이 된다.
그라시아 거리에서 본 카사 바트요
바르셀로나의 샹젤리제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그라시아 명품거리를 걷다가 보이는 첫 작품이 카사 바트요였다. 이미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도 앞에서 가우디의 작품의 첫 관람을 자축하며 사진으로 남겼다. 그동안 런던, 파리, 로마, 뉴욕 등에 있는 유수한 박물관이나 전시관의 해설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가우디의 작품은 제대로 듣고 싶어서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관람을 했다. 카사 바트요는 1904년에 직물업자 바트요의 요청으로 짓게 되었는데 이 거리에서 가장 멋지고 호화로운 건물을 지어달라는 의뢰로 시작되었다. 평범한 건물들이 줄지어선 거리에서 카사 바트요 옆 건물이 리모델링되면서 이목을 끌자 그보다 더한 작품을 요구한 것이다. 그에 맞게 1906년에 완성된 건물은 색유리와 타일로 꾸며 가우디 작품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데 주저함이 없다. 곡선과 자연, 신화가 절묘하게 섞인 이 건축은 지도 위의 예술품이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서양에서는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 조르디(게오르기우스) 신화를 차용해 사악한 용, 그를 무찌르는 기사와 창, 해골의 모습이 나타나있다. 1969년에 스페인 역사 유산, 2005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카사 바트요 앞에서 점프샷
카사 바트요 관람을 마치고 다음 타자인 카사 밀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고 카사 바트요와는 다른 거대하면서 절제미가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카사 밀라는 당시 가톨릭에 심취해 있던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짓는 동안에 만든 고급 아파트 건물로 1905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다. 카사 바트요와 비교해도 코너에 위치한 카사 밀라는 훨씬 큰 규모를 자랑했다. 당시 건축을 의뢰한 바르셀로나의 부유한 사업가 밀라 부부는 화려한 모습을 요구했지만, 밋밋한 색감의 외관으로 인해 많은 실망을 했고 결국 가우디와 소송까지 불사했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가우디는 곡선과 기하학적인 건축 스타일 때문에 직접 맞춤 인테리어까지 하면서 실내 장식, 가구들까지 제작하며 열의를 보였던 작품이다. 파도치는 모습의 외관 때문에 채석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했다.
카사 바트요와는 다른 묵직함을 보여주는 카사 밀라
날씨가 흐릿해지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소나기 정도로 예보되었기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점심 식사를 위해 그라시아 광장으로 갔다.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라서 그런지 가는 길에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스페인 식당을 갔는데 예약 자리로 꽉 찼다고 해서 그다음으로 봐둔 시리아 식당으로 갔다. 아늑한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친절한 사장의 응대에 따라 훔무스, 샤와르마와 카프타 플레이트, 샤와르마 랩, 피타, 아이란 등을 주문했다. 아이가 아이란을 잘 마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주스를 추가 주문했다. 식사는 하는 중에 밖에서는 가는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양이 꽤 되던 훔무스와 아이란까지 해치우고 나서 거리로 나섰다. 광장에 봐둔 젤라토 가게가 있어서 아이의 작은 소원인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그리고 카사 비센스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건물 주변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인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카사 비센스는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설계한 초기 작품으로 바르셀로나 건축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때 시공하면서 직접 현장 감독을 했는데, 이는 가우디의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을 보여주면서 그의 건축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타일 제조 업자인 마누엘 비센스의 집이어서 그랬는지 당시부터 고급 재료 타일을 다양하게 사용해 그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이슬람 양식의 느낌도 나타났다. 지하와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1888년에 완공되었다. 날이 흐려서 사진이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구경을 끝내고 다시 그라시아 거리 쪽으로 나와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스페인에 왔으니 이곳의 대표적인 의류브랜드 ZARA매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즐비한 각종 명품 매장들을 지나쳐가니 이윽고 사거리 대로변에 있는 ZARA매장이 눈에 보였다. 이곳은 H&M과 유니클로와 맞닿아서 SPA브랜드 각축장을 방불케 했다. 먼저 여성과 아동의류 코너를 둘러봤는데 옷이 우리나라보다 1~2만 원 정도 저렴해 보였다. 아이 옷을 대량사고 싶었지만 당장 필요한 건 아니어서 옷걸이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다음 남성의류 코너는 옆 건물이어서 이동해 구경했다. 아내와 아이는 벤치에 앉아서 쉬고 나는 이리저리 보면서 바지와 맨투맨 티를 골랐다. 여행 오면서 바지를 2개만 챙겼는데 하나는 두꺼운 거라서 하나 입기 위해 샀고, 맨투맨 티는 없다는 핑계로 골랐다. 아이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고는 스페인어로 "계산서 주세요.(La cuenta, por favor.)"를 말했다. 아침 식사 때 갔던 레스토랑에서도 그러더니 매번 가게에서 잘 쓰는 말이 되었다. 매장에서 나온 다음 근처에 레고 매장이 있어서 함께 들어가 눈이 즐거운 구경을 했다. 가우디의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레고가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생각보다 종류가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아내는 지쳐가서 아이만 한 바퀴 더 돌면서 구경을 했다.
바르셀로나 레고 매장의 한 작품
아직 뱃속에 훔무스가 남아 있었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아내가 찾아놓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아이는 식당에 들아가자마자 자리가 있냐고 종업원에게 물어봐서 우릴 당황케 했다. 인기가 좋은지 이미 자리가 만석이라 잠깐 대기한 다음에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상그리아 500ml, 오렌지 주스, 물과 함께 타파스로 감바스, 맛조개, 버섯구이, 꿀 대구 요리를 시켰다. 타파스는 꿀 대구를 제외하곤 내 입맛에 맞았다. 아내도 다 좋은데 꿀 대구만 조금 느끼해서 입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몰랐는데 이 레스토랑이 한국 방송에 나왔는지 한국인들이 여럿 보여서 신기했다. 알고 보니까 우리가 제일 별로라고 생각했던 꿀 대구가 한국 방송에 나오면서 유명해졌다고 했다. 상그리아는 와인 함량이 높았던지 작은 잔으로 4잔을 마신 나는 결국 취하고 말았다. 아이까지 서로 여행에서 좋은 것, 맛있던 것 등을 이야기하며 저녁을 즐겼다. 예전과는 다르게 함께 여행하는 동료가 돼 가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바르셀로나 거리는 이미 어둑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다. 호텔로 가는 길에 카사 바트요가 있어서 레이저 쇼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다들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슈퍼 마켓에서 하몬맛 프링글스를 찾아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소 비틀거리며 도착한 숙소에서 여행의 세 번째 밤이 저물어갔다.
레이저 쇼 중인 카사 바트요
드디어 하몬 프링글스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