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쯤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바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6시 15분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창문을 보니 중앙역도 아침을 시작한 느낌이었다. 푹 잔 아이를 깨우고 로비에 있는 조식을 여유 있게 즐겼다. 시차 때문인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졸음을 깨고자 커피를 연거푸 4잔이나 들이켰다. 배불리 먹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오전 나들이를 위해 간단히 짐을 챙겨 나와서 호텔 밖으로 나왔다. 옷은 두둑하게, 마음은 가볍게 하고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걸어갔다. 아침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자동차나 사람들이 우리나라처럼 붐비지 않아서 그게 눈에 들어왔다. 걸어서 먼저 들린 곳은 어제 갔던 유로 타워였다.
유로 타워의 상징
유로 타워(Eurotower)는 옛 서독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이름을 딴 과정에 있으며 높이는 148m, 40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EU의 중앙은행 건물로 1977년에 지어졌다. 거대한 유로 화폐 조형물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끼리 인증 사진을 남기고 괴테 생가를 향해 걸어갔다. 걸으면서 낯설었던 것이 평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도로가 한적하니 밀리지 않아서 신기했다. 조금 좁은 길을 더 걸으니 그 시대 중산층이 살았을 법한 괴테 생가가 나왔다. 아이에게 괴테를 잠시 설명하는데 아이가 아직은 아는 책이 없어서 설명하는데 조금 어려웠다.
괴테 생가 앞에서
괴테 생가(Goethe Haus)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살던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괴테는 우리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으로 잘 알려진 문학가로서 1749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1709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저택은 1733년 괴테의 할머니가 구입했으며 1755년 괴테의 아버지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면서 꽤 유복한 생활을 여기서 하게 되었는데 1795년까지 거주한 곳으로 실제 괴테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곳이었다. 괴테는 이곳 3층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를 탄생시켰다. 이곳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이 있어서 현재는 복구된 건물로 알려져 있지만 미리 폭격에 대비해서 가구와 용품들을 옮겨놨었기 때문에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괴테 문학을 좋아하는 여행객이라면 꼭 들러볼 만한 장소였다.
마인강을 배경으로
이곳이 지나 뢰머 광장을 넘어가니 프랑크푸르트를 가로지르는 마인강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인강을 가로지르는 아이젤너 다리가 나왔다. 우리는 옛 다리라는 뜻을 가진 알트 브뤼케(Alte Brücke)를 건너서아이젤너 다리(Eiserner steg)쪽으로 넘어왔다. 아이젤너 다리는 남쪽 박물관 지구와 북쪽 뢰머 광장이 있는 알트슈타트(Altstadt)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뢰머 광장이 다시 나왔다.
멋스러운 뢰머 광장
뢰머 광장(Römerberg)은 프랑크푸르트의 대표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이 도시의 랜드마크라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뢰머는 시청사의 이름이고 그 앞을 뢰머 광장이라고 불렀다. '로마인'을 뜻하는 뢰머가 독일의 한 지명이 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로서 그 문명의 잔해가 오랫동안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이 끝나고 난 다음 축하연을 베풀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황제 즉위 축하연이 열린 장소인 2층 방을 황제의 방(Kaisersaal)이라 칭했으며 1792년까지 성대한 축하 장소로서 쓰였다. 이 건물 벽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중에서 독일 출신이었던 52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옛 시청사는 1405년부터 시청사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정의의 분수와 유스티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맞은편의 목조건물들을 오스트차일레라고 부르는데 15세기 쾰른의 비단상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뢰머 광장을 지나 복원된 옛 거리를 넘어가니 대성당이 웅장한 위용을 뽐냈다.
점프샷 성공
대성당(Kaiserdom)은 말 그대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852년에 완공되었으며 왕실 예배당이면서 주교구 성당으로 사용되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린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했다. 1562년부터 1792년까지 10명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지상 위 가장 높은 관을 썼다.고풍스러운 외관과 대비되게 내부는 새로 단장해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부는 새로 복원되어서 그런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고, 다른 오래된 성당들 보다는 단아한 이미지가 느껴져 우리나라에 있는 성당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어머니의 건강과 안전한 여행, 주변인들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 재래시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대성당 내부
재래시장클라인마크트할레(Kleinmarkthalle)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이곳이 소시지의 나라라는 걸 보여주듯 과일, 치즈, 빵, 꽃 등외에도 다양한 소시지를 팔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줄이 길게 서있는 유명한 할머니 소시지 가게에 가서 추천해 주는 3개 종류를 샀는데 서비스로 하나 더 주어서 여러 맛을 볼 수 있었다. 일일이 물어보고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줘서 좋은 인상을 남겼고 아이를 챙겨주는 모습에서 감동했다. 마음이 들어가서인지 그만큼 맛 좋은 소시지 맛을 느꼈다. 삶아낸 방식으로 담백하면서 부드럽고 톡 터지는 맛이 일품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던 소시지 가게
이것이 독일 소시지
시장에서 나와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짐을 싼 후 체크 아웃하고 중앙역으로 갔다. 8번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는데 최종 목적지가 다른 두 열차를 이어 붙여서 가는 기차였다. 그걸 몰랐던 우리는 타긴 했지만 최종 목적지가 다른 열차를 타서 당황했다. 역무원에게 물어보고서 정확히 어떤 열차인지 알았다. 그래도 경유하는 곳이 똑같은 뉘른베르크가 있어서 어디를 타도 상관은 없었지만, 우리는 자리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이라 불안하긴 했다. 일단 탄 다음 첫 경유지인 하나우(Hanau)역에서 내려 최종 목적지가 빈(Wien)인 열차로 옮겨 탔다. 기차는 비행기와 버스보단 익숙하지 않아서 항상 뭔가 에피소드가 생기는데 첫 열차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 예약한 자리를 타는 거라서 일단 옮겨 타는 게 나아 보여 정차했을 때 부리나케 옮겼는데 우리가 예약한 좌석이 있는 열차 칸은 만석이라서 이미 북적북적거렸다. 다른 사람이 앉고 있어서 예약 말씀을 드리고 마음 편히 자리에 앉았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출발
이렇게 DB의 ICE, 코레일의 KTX라 할 수 있는 고속철을 타고 두 시간 여를 달려 헤센주를 떠나 바이에른주에 도착했다. 우리가 두 번째로 방문한 독일의 도시인 뉘른베르크(Nürnberg)는 바이에른주의 대표 도시 뮌헨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옛 제국도시로서 역사 깊은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제3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전쟁 이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전범 군사 재판이 열린 곳이기도 했다. 현재는 공업 도시로 금속, 기계, 전기 등의 광장이 많이 있고 마인강으로 가는 운하가 연결되어 있다. 중앙역에서 내린 우리는 쾨히니 문(Königstor)을 지나 뉘른베르크에 입성했다. 이 문은 1849년에 지어져 뉘른베르크 요새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였으며 동근 탑과 독일제국의 독수리 문양이 인상적인 곳으로 뉘른베르크를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도시 여행을 시작했다. 먼저 역 근처에 위치한 호텔에서 체크 인을 한 후 객실에 짐을 풀고 나와서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여행 2일 차이지만 어제부터 계속된 이동으로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5km 정도 도심을 질러가니 드디어 히틀러가 사랑했던 도시, 뉘른베르크의 아픈 속살이 드러났다.
뉘른베르크 도착
호텔 객실에서 본 뉘른베르크
이미 오전에 10,000 걸음을 훌쩍 넘겼기에 걷는 대신 버스를 탄 우리는 먼저체펠린 비행장(Zeppelinfeld)을 방문했다. 이곳은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나치당이 연례 당 대회를 개최했던 장소로서 이름은 1909년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이 그곳에서 자신의 비행선 LZ6을 착륙시킨 후 그 이름을 얻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후 당의 야외 집회와 행진을 위한 장소로 지정되었다. 연단은 160,000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연단 뒤에는 50m 높이의 횃불탑이 있었는데 밤에는 붉은 불빛으로 밝혀져 나치당의 상징이 되었다. 나치당의 선전과 선동의 주요 장소로서 집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연설했다. 특히 유대인 차별을 문서화해 홀로코스트의 근거가 된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된 장소로도 유명했다. 집회는 종종 군사 퍼레이드와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열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폐허가 되었지만, 1950년대에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다양한 행사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곳에 서 보니 그 옛날 비틀어진 영광의 흔적이 쓸쓸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광기로 가득 찼을 체펠린 비행장
그다음 바로 근처에 있는 나치 전당 대회장(Kongresshalle)은 뉘른베르크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지금 모습과 달리 독일 현대사에서 뜨거운 시기였던 나치 시대에 히틀러에게 큰 의미가 있던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지였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축물은 그 크기에 비례해서 인류에 끼친 해악을 생각하면 입장료를 받고 들어갈 정도의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는 나치 독일 시절에 가장 큰 행사였으며 1923년 뮌헨에서 1차 대회, 1926년 바이마르에서 2차 대회가 열렸고, 1927년부터 38년까지는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대회가 열렸다. 사실 뉘른베르크 시기가 나치 독일에 있어서 그들의 장밋빛 시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고난의 행군을 하던 독일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며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나치는 히틀러가 1934년 정권을 잡으며 기세등등했다. 선전 홍보에 열심히였던 나치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며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패망을 하게 되었다. 후에 소련은 베를린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승전일 축제를 열었다.
폐허 같은 나치 전당 대회장
트램을 타고 복귀
중앙역으로 돌아올 때는 다른 대중교통인 트램을 타고 왔다. 내렸더니 벌써 주위는 어둑해지고 저녁 식사를 해야 해서 독일 뉘른베르크 전통 요리를 파는 식당을 방문했다. 역 근처에 있는 로컬 식당을 찾아서 뉘른베르크 소시지와 맥주, 샐러드, 치즈요리 등 로컬 요리로 주문했다. 뉘른베르트 소시지는 마트에서 자주 보였는데, 손가락 길이의 내용물이 충실한 소시지였다. 밑에 깔린 양배추 절임,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는 김치에 익숙한 우리에게 매우 어울리는 밑반찬으로 독일 여행하면서 쭉 먹게 될 것 같았다. 본토 맥주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일단 최하 기본이 500ml로 시작하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페일(Pale), 아내는 라들러(Radler)로 주문했다. 라들러는 스페인에서 마셨던 클라라와 비슷했다. 목젖을 강타하는 알싸한 시원함과 짭조름한 요리가 어우러져 만족스러운 만찬이 되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역에 있는 마트에 들러 물과 아이 과자를 샀다. 호텔에 와서 까보니 물 3병 중에 탄산수가 2병이나 되어 유럽에서 우리의 피치 못할 탄산수 사랑은 이번에도 이어지게 되었다. 아이는 러시아에서 탄산을 흔들어 빼 마시던 일, 스위스에서 탄산수로 라면 끓어 먹던 기억을 꺼냈다.다소 일찍 마무리하며 이렇게 2만 보 넘게 걸었던 둘째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