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마이애미에서 쉼표

2026년 2월 1일(일) 마이애미

by 오스칼

주일이었기에 늦잠은 허락되지 않았다. 몸은 아직 여행의 피로를 품고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로서의 하루는 미사로 시작해야 했다. 부엌 불을 먼저 켜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아이도 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기억해 냈다. 달걀프라이를 하나씩 정성껏 부쳤다. 소시지를 데우고, 전날 마트에서 사 두었던 남미식 팥밥을 꺼냈다. 쿠바와 카리브 지역에서 먹는 흰쌀과 검은콩을 함께 지은 밥으로, 이 땅의 역사와 이주민의 삶이 스며 있는 음식이었다. 소박하지만 든든한 아침이었다.


리틀 아바나의 아침
얼어죽은 도마뱀


밖으로 나서자 햇살은 눈부셨다. 하지만 바람이 매서워 체감 온도는 낮았다. 이곳 기준으로도 추운 날씨였는지, 길가에는 얼어 죽은 도마뱀들이 여럿 보였다. 열대에 가까운 이 도시의 생명들에게도 쉽지 않은 날임을 실감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성당까지 걸어갔다. 미사에 참례한 곳은 성 요한 보스코 성당(St. John Bosco Catholic Church)이었다. 이 성당은 마이애미의 히스패닉 공동체를 대표하는 성당 가운데 하나로서 건물 외관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부로 들어서자 정교회 성당의 느낌이 나는 공간은 낯섦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본토 미국인보다는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이 거의 전부였고, 동양인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성 요한 보스코 성당
미사 참례
성당 내부


미사는 오로지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 이곳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문화의 결이 분명했다. 강론의 주제는 '목적이 있는 삶'이었다. 스페인어 강론이었기에 모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번역 어플을 통해 단어와 문장을 더듬으며 의미를 따라갔다. 삶은 우연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방향을 가진 여정이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았다. 언어는 달랐지만, 신앙의 핵심은 같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성당 내부의 성상들
주임 신부님과 함께


미사가 끝난 뒤 아이가 문 밖에 서계신 주임 신부에게 다가갔다. 한국에서 왔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신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빌어 주었다. 우리가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를 갈 예정이라고 하자, 더욱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곳 공동체의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성당 한쪽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준비한 작은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다. 음식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주일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마을 바자회
마트에서 숙소가는 길에 본 자동차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장을 보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오늘 요리에 쓸 마늘과 페퍼론치노 가루, 맥주, 소고기 부채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곳에서도 오로지 스페인어만 들려와서 이틀간 우리가 들었던 언어는 스페인어가 대부분이었다.


맛 좋은 제과점


점심은 쿠바노 샌드위치로 정했다. 리틀 아바나에 있는 작은 제과점에 들어갔지만, 일요일에는 고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대신 햄과 치즈, 달걀, 양파를 넣은 쿠바노 스타일 샌드위치를 권했다. 오히려 그 단순함이 마음에 들었다. 쿠바노 샌드위치(Cubano Sandwich)는 쿠바 이민자들이 플로리다에 정착하며 발전시킨 음식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바삭하게 구운 쿠바식 빵 안에 햄, 로스트 포크, 스위스 치즈, 피클, 머스터드를 넣어 만들었다. 프레스 기계로 눌러 구워내는 것이 특징으로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 등장하며 본고장인 이곳에 왔을 때 생각이 많이 났다. 마이애미와 탬파 지역에서 특히 사랑받는 이 샌드위치는 쿠바 이민자들의 노동과 일상이 응축된 음식이었다. 지역과 가게에 따라 재료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빵과 치즈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언제나 중심을 이뤘다.


현지식 점심


숙소로 돌아와 몰타 음료와 맥주를 곁들여 샌드위치를 먹었다. 치즈가 길게 늘어났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화려하지 않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렇게 먹는 점심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애미 다운타운


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마이애미 비치로 향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애미 다운타운은 오래전 미국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과 겹쳐졌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꽤 막혔다. 마이애미 비치(Miami Beach)는 플로리다를 대표하는 해변이었다. 대서양을 따라 길게 뻗은 해변과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들이 특징으로 1930~40년대에 지어진 파스텔톤 건물들은 이곳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마이애미 비치


마이애미 비치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음악과 패션, 예술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자유롭고 개방적인 도시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해변에 도착하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햇살은 강했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계속 걷기에는 다소 힘이 들었다. 러머스 공원(Lummus Park)에 있는 야외 짐에서 아이와 함께 운동기구를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몸을 움직이니 오히려 더워졌다. 이 따뜻했더라면 아마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을 것 같았다.


러머스 공원


근처 주택가를 지나서 카페에 가는 길에 홀 푸드 마켓이 보여 가봤다. 홀 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은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식료품 체인으로 유기농, 자연식, 지속가능한 식품을 핵심 가치로 삼는 마트로 유명했다. 트레이더 조스의 확장판 같았다. 1980년 텍사스 오스틴에서 시작되었으며, 몸에 좋고, 환경에 덜 해로운 음식을 표방하며 성장했다. 신선식품, 비건, 글루텐프리 제품, 로컬 생산품 비중이 높고, 매장 내 델리와 즉석식품 코너도 잘 갖춰져 있다. 2017년 아마존에 인수된 이후 가격 접근성이 다소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마트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견일 수 있겠지만 손님 대부분이 백인들이었다. 우리가 두 번이나 갔던 리틀 아바나의 마트들과는 분위기와 사람들이 완전히 달랐다.


홀 푸드 마켓
카페에서 쉼표


찮은 카페를 찾아서 안으로 들어가니 커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미국에서 요즘 말차 라테가 유행이라는 말을 듣고 주문해 보았다. 생각보다 진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녹차의 쌉싸름함과 우유의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졌다. 맞은편에 앉은 마이애미 부녀가 있었는데, 아이는 만 5개월이었고 마이애미에서 가장 추운 날씨를 경험한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다고 하니 여행 왔냐고 물어봤다. 스몰토크를 하며 한 템포 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굿바이 마이애미
전반전 마지막 미션


저녁 식사를 앞두고 빨래방에 들러 미뤄 두었던 빨래를 해결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 여행의 후반전이 멕시코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짐 속 옷들이 하나씩 정리되며 마음도 차분해졌다. 마이애미의 마지막 밤은 다시 리틀 아바나에서 마무리했다. 거리에는 음악이 흐르고, 스페인어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 도시는 미국과 중남미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반전을 마무리하고 후반전을 시작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대기실이었다.


굿바이 리틀 아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