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밟는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오며 가며 눈이 마주칠 때면 장난스레 웃는 모습에 괜시리 짜증이 난다.
그런데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움직일 때마다 마치 과일가게 사과박스 안에 뜬금없는 수박 하나 들어있는 것 마냥, 수많은 사람들 중 그리 크지도 않은 저 사람 하나만 유독 눈에 띈다.
저 사람이 혼자서 뭐라도 할 성싶으면 옴싹 거리는 발끝을 부여잡느라 혼난다.
눈에 밟힌다. 아니 자꾸만 내가 눈으로 밟는다.
고등학생 때 적은 글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풋풋하고 멍청한 짝사랑이 있다니. 짝사랑은 멍청해서 더 아름다울지 모르겠다.
그때 당시에는 그저 어색한 몽글거림에 불과했다. 가슴팍은 잘 모를 어딘가가 간질거렸고, 신기하게 그 아이는 보지 않아도 보였다. 말이 이상하다. 하지만 진짜다. 흰자위에 눈동자가 달린 것처럼 그 아이는 계속 내 시선에 걸려있었다.
흔히들 눈에 밟힌다고 말한다. 애틋함, 아쉬움, 그리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자꾸만 미련을 두고 대상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말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다르다. 내가 의지를 갖고 보는지,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이는지. 눈에 밟힌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
나는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해 짝사랑은 내가 보는 사랑이다.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야가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나의 시선에 끝은 그 아이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표현하지도 못하고, 주변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옴싹 거리는 발끝을 바보같이 땅에 눌러 붙였다. 그나마의 관계도 잃어버릴까 봐 딱 한 번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바보 같은 모습은 짜증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조금도 멋있지 않은 모습을 어리다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미련과 소심함을 가지고 눈으로 밟고 있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고백이라도 해볼터, 미련한 남학생은 그렇게 쓸데없는 아련한 추억만 하나 더 만들었다.
시선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예술에서 시선은 중요한 요소다. 화가가 보는 시점 혹은 그림의 대상이 보는 시점, 어떤 모양이든지. 시선의 끝이 닿는 곳은 화가의 목적이 된다. 나의 시선의 끝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는 우리의 목적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고 또한 보려고 한다. 보이는 모습을 위해 나를 꾸미고, 행동을 연기하고, 태도를 설정한다. 의지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위해, 미운 사람의 미운점만을, 좋은 사람의 좋은 모습만을 보기 위해 불편한 콩깍지를 굳이 눈에 덧씌운다.
우리는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보다 보이는 모습이 더 많은 존재들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흠결이 있기에 인간은 인간이길 멈추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꾸미는 게 아닌, 솔직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질 내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아버지는 표현이 서투르셨다고 한다. 무뚝뚝한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 할아버지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술이나 한잔 자시고 오면 오 남매를 쪼르르 앉혀놓고 푸념과 듣기 싫은 교훈만 잔뜩 늘어놓으셨다.
그러나 엄마도 어느 저리 오십 년을 훌쩍 넘어 돌아보니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하신단다.
자기보다 훨씬 어렸을 나이부터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 파마를 말고 몸뻬를 가슴팍까지 치켜올려서 어여쁠 시간도 없었던 어머니. 위풍당당하던 널은 등판에 자신을 척척 들쳐 업었지만 이제는 얇디얇은 다리와 쪼그라든 기세에 자신과 눈높이가 엇비슷해진 아버지.
엄마는 아마 이제서야 당신의 부모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논밭에 나갈 때면 국민학교 다니는 딸들에게 갓난 아들을 맡겨놓고 나가는 미안함에 자식들이 눈에 밟혔을 당신의 부모들처럼.
저 오래전 어른들은 한 번도 사랑을 말한 적 없었지만, 말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 손톱 밑 흙과 함께 잔뜩 묻어있었다.
그 사람이 보이는 것.
그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것.
그 내면이 보이는 것.
내가 들인 것이 아닌
어느 날 그대가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
그대가 내 마음에 민들레 홑씨마냥 날아들어와
제 멋대로 꽃을 피워버린 것.
그것이 내 마음에 찾아온 눈에 밟힌다의 진짜 의미다.
나의 눈에 그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지 않았음에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대가 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이승윤 - 언덕나무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