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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닌그라드 Nov 23. 2022


기다려왔던 혁명

중동은 히잡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덥다.


 월드컵이 시작됐다. 단일 종목으로 열리는 가장 큰 경기인만큼 가히 전 세계인들의 축제라 할 것이다.


 그런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 속에서 신기한 장면 하나를 발견했다. 이란 국가대표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국가가 연주될 때 침묵했다. 최근 이란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이뤄지고 있다. 그간 억압되어 왔던 이란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세계의 흐름과 발맞춰 움트기 시작했다. 이에 응해 국가를 대표하여 세계인들 앞에선 선수들도 무언의 동참을 한 것 이렸다.


 그렇게 또 하나의 거대한 성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흔히 소수자라는 말을 쓴다. 종교, 국가, 인종, 신념, 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보편적이다 말할 수 없는 가치에 속한 이들이다. 역사를 보면 소수자들은 언제나 생명을 담보로 삶을 살아왔다. 기독교인들은 콜로세움에서, 콩고인들은 만국박람회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고대에는 그래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


 소수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는 어쩔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교육의 부재로 인한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 속에서 소수를 내버려 둔다면 시민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시민들이 나서서 소수자들을 탄압하거나, 아니면 시민의식이 성숙해져 불합리한 왕정을 폐하거나. 결국 힘이 통치의 언어였던 시절, 소수자들은 권력을 위한 본보기가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수는 소수일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할 때 인간은 가장 강해진다. 인간이 그저 인간이고 싶을 때 말이다.

 수많은 소수자들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인간으로서의 일상을 쟁취해왔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난 백 년간 인류의 발전이, 이전 350만 년 인류의 발전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절대로 변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우리의 인식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소수라는 이름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발 들일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인류가 지난 백 년간 너무 급하게 변화했기 때문에 생겨난 부작용인지 아니면 진정 선함을 추구하며 생겨난 새로운 가치 기준 일 지는 알 수 없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100년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결"일 것이다. 불과 옆동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며칠이 걸려서야만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침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볼 수 있다. 라디오와 신문은 흑인들에게 인권을 심어주었고, 인터넷과 티비는 동성애자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쪽문이 되었다.



 불과 백 년 만에 찾아온 인식의 균열은 마치 절대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빙하의 탈락과 같았다. 이제는 그들이 소수로만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혁명과 소통의 급진적인 확장으로 인해 각자의 사회에서 소수일 뿐이었던 사람들이 커넥팅 되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이만큼의 다수가 변화를 요구한 적은 없다.

 각자의 사회에서 하나의 점일 뿐이었던 사람들은 연결되어 하나의 2차원적 평면을 완성했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줄 만한 사람들의 동조를 통하여 3차원적 도형을 세워간다.






 소통은 규범을 무너뜨린다.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의견이 공유된다면 그것은 필히 그리고 운명적으로 혼란을 초래할 것이고, 결국 한 시대의 멸망을 불러올 것이다. 카다피의 멸망은 하수구 속이 아닌, 트위터에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급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확고한 선을 향한 자신의 기준과 들을 줄 아는 귀 일 것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한 자신의 소신을 가지되, 충분히 합리적이고 마땅히 바꿀만한 의견이라면 받아들일 줄 아는, 들을 줄 아는 귀가 필요하다.


 혁명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선하지 않고, 관습이라 하여 모두 다 악하지 않다. 자신만의 올바른 기준과 선에 대한 가치가 없다면 옳지 못한 혁명에 동참하는 무지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또한 바꿔야 할 폐단 앞에서 침묵할지도 모른다.


 합당한 혁명을 향한 우리의 마땅한 동조는 세상을 올바른 진보로 이끌 것이고, 불합리한 혁명에 우리의 소신이 제동을 걸 때 혁명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나의 선의 기준을 따라 지구 반대편을 향해 작게 외쳐본다.

 Women, Life, Freedom!










The Paper Kites - On The Train Ride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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