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을 삽니다
오랜만에 호텔에서 식사를 한다. 나는 레스토랑을 갈 때면 유독 호텔 레스토랑만을 고집한다. 물론 일반 레스토랑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호텔을 고집한다. 호텔은 늘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높은 천장고와 거대한 샹들리에, 차분해지는 라운지의 음악소리, 호텔 전체를 메운 객실의 침구 냄새는 감정을 들뜨게 하기 충분하다.
기왕 가는 거, 창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남들보다 다만 일주일 정도만 더 빨리 예약을 한다면 백이면 백 창가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다. 한 끼의 식사라도 진심을 다하는 나로서는, 호텔에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은 즉흥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여 가는 연례행사인 것이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한 분기 동안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한 번 큰 용기를 낸다. 그리고 2주 정도 참회와 긴축재정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곳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느낄 행복과, 시간이 지난 후 꺼내어 볼 수 있는 추억이 밥값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기억과 추억으로서 인생에 흔적을 남긴다. 기왕에 남기는 흔적이라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은 흔적을 남기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하지만 이번 식사에서는 오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테이블 고객의 과격한 컴플레인이다. 물론 비싼 값을 지불한 식사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주 당연히. 하지만 모든 것은 방법의 문제이듯이, 과연 서버에게 저렇게까지 과격한 컴플레인이 필요할까는 의문이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리고 기특하게 삶을 살아내는 어린 저 청년의 일터에서 훼방을 놓다니. 내 테이블 위로 범람하는 과격한 언사에 기분이 나쁘려 하는 순간 눈에 들어온 서버의 모습은 끝까지 다함없는 친절로 응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선한 사람들의 존재에 또 한 번 감사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계속 그 청년의 얼굴에 만연했던 미소와 한껏 숙인 허리가 생각났다. 청년이 퇴근하면서 얼마나 헛헛할까, 얼마나 고될까 싶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잖아"
"너의 동정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오늘 청년의 모습은 아주 어른스러운 모습이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뭐라고 감히 상대의 감정까지 주제넘게 생각하며 섣부르게 동정하는 굉장한 실례를 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린 연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아주 가증스러운 오만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남의 슬픔이 나의 행복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린 어려서부터 참 많이 비교당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밥을 굶고 있으니 우린 행복한 거란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행복을 강요당했다. 비교하여 얻는 행복이라는 이 폭력적인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똑같진 않다. 그렇지만 나와 당신의 하루의 가치가 다르진 아니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분량은 모든 이가 다 다른 내용으로 채울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다름의 평등이다. 우린 모두 다르기에, 똑같지 않기에 평등할 수 있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공자-
비교하지 않는 것은 지혜요, 나는 영원히 상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그저 상대가 살아내고 있는 멋있는 하루에 감탄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존중이라 생각한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연민할 수 있는 오만함의 권리를 사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한 끼의 작은 행복을 샀을 뿐이다. 그 누구와 비교할 필요 없는 오롯이 나를 위한 행복.
나의 무지를 깨트려준 오늘의 귀한 식사가 썩 만족스럽다.
Cheek To Cheek -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