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 질문 : 내면 깊숙한 근원의 우물로부터 허공에 부딪치는 메아리와 같이 울어대는 결핍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의 행복은 과연 '정상'인가? 삶의 근간이 왜 수심과 우수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이유를 또렷하게 댈 수 없는 자는 과연 정녕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육체와 정신을 모두 아울러 과연 나만큼 침착하고 고요하며 평온하고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 어떤 것에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백전노장으로 단련되어 무디고 강건하며 굳세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건 혹은 관계에서 '불행'이라 일컬어지는 여러 현상으로부터 내 의지로 즐길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휘둘린 물리적 경험이 실질적으로 희박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 여유의 첫 절반은 환경적 운과 본래 좀처럼 쉽게 요동하지 않는 내 특질적 성격을 통해 완성되었고, 나이가 든 이후 나머지 절반은 그 한결같은 평화를 유지하고픈 집착과 욕심에 세상과 철저히 선을 긋고 입장을 극히 사리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스스로 이성적 통제력이 꽤 뛰어난 주체이자 사회 통념에 얽매이지 않은 관념적 자유인이라고 믿으며 그렇지 못한 치들을 볼 때마다 냉소를 던지곤 했다. 나의 자유가 회피와 외면으로 만들어져 손 끝으로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하우스 오브 카드인 줄 모른 채. 본질적인 것에는 무엇에도 진심을 기울이지 않는 삶, 쾌적함에 대한 만족감과 개인적 유희를 제하고 나면 단조롭기 그지없는 삶, 주도와 투쟁의 에너지가 동결된 삶, 누구에게도 사랑을 위한 영감을 줄 수 없는 이기적인 삶, 어느 모로 봐도 드라마틱한 요소라고는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병들고 불완전해졌다. 결핍된 것 하나 없는 존재인 척 놀이를 하던 내가 나의 불완전성으로부터 통증을 느낄 줄 알게 된 순간 멈춰 있던 삶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서 비로소 나는 '정상'으로 거듭났다. 어떤 경우에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이 편협한 도량이라면 적어도 '인간성'을 되찾았다. 몰락의 성질이 파멸이라는 결괏값에 부쳐진 '사건성'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 대부분의 몰락은 고약한 성질머리에서 비롯된 '습관성'이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영속성의 물리적 법칙에 충실했던 탁류가 점진적 몰락을 준비했지만,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자조적 심리에 계류된 차원의 시공간을 전부 통틀어서 찰나라고 아울러도 무방할 만큼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잠깐 사이에 지나온 모든 생이 일시에 주마등처럼 상영된다고들 구전하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배신감은 갑자기 터진 시한폭탄처럼 단 한 방의 일격에 넉다운되었다는 착각 때문에 미처 오랜 습관 문제로 귀결 짓기 어려운 것도 동일한 이치의 선상이다. 시간에 집착하는 이성과 시간 개념이 부재한 본능 사이에서 생을 감득하는 우리의 감각 구조가 '찰나이자 영겁이며 영겁이자 찰나'인 괴리의 메커니즘에 늘 속아 왔기 때문이다.
꽤 보기 그럴듯했던, 정밀하게 세운 카드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물론 통각을 깨운 덕에 내 시선 끝은 더 이상 카드에만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형평성으로 두루 열린 시야를 얻었다. 이제 나는 동일한 자극 선상에서, 쾌적함이 제일의 기호품인 자기애가 주관하는 생각들이 나의 주된 관심사 아니 열정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되려 마치 언제든지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부양을 뽐내는 기화된 존재처럼 감각의 신비감에 사로잡힐지언정 실상은 차분하게 딛고 있을 단단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본질과의 교감을 읽는 것에 열중한다. '현재'는 물리적으로 늘 단 한순간뿐이지만 바로 지금 내 영혼의 개성을 관통하여 무언가를 내밀하게 전달받았거나 전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 유의미한 의지(意志, 依支)가 서로 뜻을 합치하기로 도모했음을 밝히는 연유로부터 노력의 지속성은 탄력을 받는다. 내게 의식된 어떤 자극이 위험한 것이지는 않을까 강박적으로 신경 쓰인다고? 그러나 나는 아직은 그래도 순수했던 과거에 그와 유사한 자극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 염려를 소거한다면 무엇이 남게 될지 충분히 상기할 수 있다. 바퀴가 거의 빠져버린 고장 난 수레가 애처롭게 덜컹거리며 굴러가거나, 나사가 다 풀어지고 유격이 어긋나 정밀함이 떨어지는 톱니바퀴가 마지못해 겨우 돌아가는 것처럼 너덜거리는 상태의 불편함을 자각하는 의식의 주도면밀함을 퍽 거대한 낭만으로 여기던 시절의 색인이 분명히 저장되어 있기에.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제기할 수 없는 쾌적함 속에서는 언박싱도 마다한 채 방치되는 무관심한 선물처럼 영혼이 해묵어간다는 것을 어린 나도 본능으로 알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무렴, 내가 나인데'라는 자존적 느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당연한 자산이다. 누구도 예외 없이 '나를 믿는 법'을 '믿지 못하는 법'보다 먼저 학습한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섭리를 믿는다는 것이고,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에 처음부터 믿음의 가능성이 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믿지 않음'을 믿어버리며 스스로 상실해버리기 전까지는 유효했던 강력한 믿음과 그로 인한 자유로운 의지가 태초에 상존했다. 그러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더 나아가 소망을 강하게 품은 자는 곧 미래 기대를 위해서 투쟁하는 자, 진정한 독립성을 위해 반항하는 자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가는 이 비전이 표면적 현상을 넘어 본질적 섭리의 일부를 대리하고 완성하는 지고지순한 일이라는 확신과 용기에 가득 찬 사람들은 절로 사랑꾼이 되어간다.
◼︎ 재차 질문 : 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답 : 인간다운 삶은 본질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하는 삶. 물리적 세계의 현상을 입어 여러 못된 습관과 오류로 물든 나를 극복하고 회심하는 자의 과정 속에서 내 비루함을 알고 한계를 느끼고 이기심의 방해 공작에 몸서리치는 통증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이토록 약하고 아프며 불완전한 모든 이에게는 해악한 두려움조차 본질적 영혼이 지닌 순수함을 되찾아가기 위한 기회라는 강력한 믿음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단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