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영위하기
1)
소모적으로 염려하지 않는 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아직 염려의 발로에 시동을 거는 자극이 근본적으로 축소되어 정제된 단계의 지평을 밟지는 못했다. 내가 이성에서 확신하는 만큼 내면에까지 그 확신이 충분히 들어찬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긍정 각인을 반복하고 변화된 인지 습관의 물길을 탄탄대로로 틀 수 있도록 내적 촉구의 시스템은 한참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다만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염려라는 현상의 겉모습 이면으로부터 이전에는 침침하여 잘 보이지 않았던 힌트를 찾아내 필연적 동시성을 읽어낸다. 나라는 페르소나에게 주어진 본래의 모습을 알며, 그 개성에 특화된 효용성을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자 할수록 염려는 사라진 다기보다는 빠르게 영위된다는 것을 순시로 체감하고 있다.
2)
불편을 환영하는 법. 말했듯이, 한 가지 불편 안에서는 반드시 상기의 두 가지 요소가 동시성이라는 이치로 함께 결합되어 있다. 어느 쪽도 자극되지 않는 무미건조함 보다는 염려 혹은 염려를 포섭한 영위 어느 쪽의 가능성으로라도 구현될 수 있도록 의식이 건드려지는 편이 분명 풍요로운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것보다는 불편을 마주한 쪽으로부터 생의 기쁨이 남는다는 것,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항상 그렇게 판명되곤 한다. 노력의 과정 속에서 단 한 번도 결코 예외는 없었다. 끈질긴 의심의 꼬리를 길게 남기고야 마는 것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지난밤 영화 속에서 그토록 평화로운 인터라켄의 정경을 지극히 쾌적하고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보다 어딘가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 자각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왔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뭔가 이로부터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덜 편했지만 더 재미있었고, 아낄 것이 없기에 충만함을 얻었다. 깨어 있는 자는 생명력 있는 주체의 개성을 증명해주는 모든 범사에 감사한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하나님께 드리고자 빚어내는 믿음, 소망, 사랑의 생성을 제외하고 세상에 얽힌 허점 투성이로서 내게 발생하는 모든 '인간적인 마음'들에 일방적으로 좋기만 하거나, 일방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성과 무개념, 양심과 자격지심, 공감과 죄책감, 독립성과 고립성, 반항심과 방종함, 투쟁과 애정결핍 등과 같이 전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공평하게 동시성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나의 내적 불신을 유발한 일선의 주범인 '합리화'라는 악습의 뒷모습으로부터 지금 거론 중인 필연적 동시성의 섭리를 탐지하고 발굴하는 쓰임새를 보게 될 줄이야 미처 알았겠는가? 이미 발생한 현상을 내 자기애에 유리한 형질로 끼워 맞추려는 목적으로 내게 타고난 '낙관주의'를 부스팅 할 때는 나를 그토록 게으르고 오만하게 만들었던 한심한 기능이었다. 이를 항시 본질을 바라보고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며 그 의를 받들어 범사에 감사하고자 노력하는 데 쓰임새를 찾으니 그 재능이 겨우 본디의 자리를 찾아간 듯하다.
4)
가령 내 발전에 하등 쓸모없을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것에서까지 넉살 맞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발견할 때 이를 염려하고 부끄럽게 여겨 매장하려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위해서일까? 내 자아상에게 스스로 부여한 헛된 이상주의에 의한 자격지심 때문이 아닌가? 사실 내가 무릇 지독한 연구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선택의 여지없이 몰입되어버리는 기질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내면의 독립적 사유에 치중해 고립되어 무연한 세상에 관심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견제하는 심리는 양 측 사이에서 알선의 역할을 자처하는 이의 성정이다. 옆 집의 흥나는 경망함과 내 집의 따분한 책무라는 모순적인 딜레마에 빠져들어 괴롭다면 이는 일방성을 견제하기 위한 줄다리기에 충실한 개성의 작용일 뿐이니 타당한 조치는 금욕인지 자유인지 정답을 찾으려고 헤매는 나를 붙들어맨다, 동시성의 법칙 안에서 본능대로 이끌리고 작용하며 뜻대로 구현되고자.
5)
변화를 만드는 반대 증거가 알차게 쌓여간다. 반대 증거는 비교 참조 자료로써 그 실효성이 강력하지만 아직은 덩치가 큰 자기애가 만드는 의심과 한참 더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의심의 힘이 세 질 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집과 엄살이라는 동료를 끌어온다. 더군다나 나는 강한 자의식(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개성)과 강한 자기애(자기 영광을 드높일 이기심)가 서로 꽤 친밀한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모호한 경계에서 때로는 이 둘의 사이가 서로 나쁘지만은 않기에 반목되지 못하고 은근슬쩍 합의되고 조정되는 지점에 대한 유혹에 나는 유달리 취약하다. 혹은 그 명백한 경계선을 읽어내는 데 게으르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을 정제하여 분리해내고 추출된 핵심에 몰입하여 실행하는 연습을 위해서라도 양심이 촉구하는 염려라는 채찍질은 내게 아직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