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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Dec 15. 2022

어느 무대 뒤 구경꾼의 고백

: 늦었지만 배역을 구합니다

 1) 너무도 개인적이지만 너무도 세계적인 모든 것들


 나는 보편 섭리와 내통하는 직관을 단 한 순간도 완전히 놓고 세상에 편입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이해와 납득만큼은 편각에 이루어진다. 우주가 운행되는 방식의 정당성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음이 때로는 무료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한 연유에서 매사 도리를 따지기보다는 세상 구석구석에 깃든 개성의 디테일적 요소에 즉각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암암리의 사각지대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는 쪽에 훨씬 깊이 매료되었던 것이리라. 위대한 선각자들의 숱한 말씀으로부터 암요 그렇고 말고요 달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빠르게 수긍한 후 멋대로 맥이 풀리는 심리는 매번 동일하다. 열쇠를 찾았다는 유레카의 기쁨도 잠시, 손에 쥔 열쇠만으로 미로가 정복되는 것은 아니니까. 실은 어린 시절부터 늘 서랍에 보관해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인 지침서를 다시 꺼내 뇌리에 펼쳐놓은 순간 소환되는 기억과 일순에 휘몰아치는 지당함은 빠르게 나를 장악하고 깨달음은 이내 덧없이 스러져간다. 알지만 모른다는 기묘한 박탈감만이 새로운 부하로 지워져 혼란이 가중된 채. 물론 모든 선각자들의 반복되는 가이드는 토라진 채 눈을 흘긴 나의 시선 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치며 주의를 일단 재차 섭리로 돌려주기에 나는 오만함의 수렁으로부터 최소한도만큼 구제받을 수 있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열쇠를 열고 들어갔다면, 마주하는 미로 속 모든 혼란의 길목에서 내 사랑의 이정표를 부여하는 공식의 체현만이 나를 우주의 운행에 구경꾼이 아닌 일꾼으로서 동참시켜줄 것이다. 무대 뒤에서 커튼콜이나 준비하는 척하며 드리워진 장막을 움직이는 끈을 붙든 채 환한 조명 아래 상연되는 모든 것을 구경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항상 대상에 초밀착하여 내 유희를 제조할 여러 정수를 채취하는 것을 최대의 낙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정작 나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들여서 함께 동일한 그림을 완성활 조화로운 피스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서 극도로 거부해왔던 결벽성이 서로 합일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왔다. 종국에 나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고립무원에 유배되었다는 자각과 동시에 묵직한 혼란이 찾아왔다. 무대 뒤가 더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고작 먼지 뭉텅이와 투닥거리는 쥐들과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해묵은 잔해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버린 듯싶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야 어디 남은 배역 없소 하고 기웃거리지만 그동안 쌓아온 음침한 자기애의 공식은 밝음 아래서 내 손과 발을 묶어 부자유하게 만든다. 내게 행사해왔던 이기심의 완력이 맡은 일에 끼치는 폐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거쳐 무효화하여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자유를 쟁취하는 길은 멀고도 멀다.


2)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무효화하는 것이다


 내게 위험 요소가 되는 자기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무효화'가 되도록 움직일 요량이라면 기존 공식대로 본능화 된 몰입을 밀어낼 새로운 몰입이 필요하다. 무엇이 상연되는 장면 속에서 나의 성실한 배역을 관할하는 구심점으로 작용을 하는지 알고, 그 필연적 에너지에 힘입어 믿음의 본능을 일깨운다. 여기서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위해 맺어진 상대방으로부터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한수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개방하고 들인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집중하는 법을 아는 것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자의 기본자세이다.


  단념 없는 몰입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상을 지정된 입방체에 가두리 짓지 않는 공감의 힘으로부터. 왜냐하면 사랑의 순환에는 처음과 끝의 지점이 없으니까.


  상대방이 지닌 선량함을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내게 전달되는 좋은 영향력을 이기심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섭리를 받들어 충실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각각의 개성이 가지는 데코보코(凸凹)는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요철의 기능이며 내 욕심대로 데코데코하거나 보코보코 해서만은 꼭 들어맞는 조각들의 조화로운 일부가 될 수 없음을 안다. 상대방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여 공감하는 것, 그의 랜드와 나의 랜드를 박정하게 구분 짓고 내 계명의 명철함으로 감히 판단하며 정황을 규정지으려고 하지 않는 것,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에 순종하고 내게 허락된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음을 깨닫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물, 환경과 사건을 모두 포함하여 그 모든 상호적 인력을 매개로 하여 역사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나라는 자각의 기쁨을 허락하신 후 나 이외의 다른 영혼들이 지닌 개성을 최대치로 존중하고 강하게 믿으며 상호적인 조화를 이루라고 주신 그 모든 것들, 하나님의 도구로써 함께 일하라고 동료를 지정해주셨고, 예비된 뜻이 실현토록 관계들을 맺어주셨으며, 나의 개성이 투영되고 자아가 반영되어 비로소 실존이 증명될 수 있도록 물리적 만사를 제공해주셨다. 그런데도 내가 이들을 오직 나의 유불리만을 위하여 자로 재고 계산하고 염려하고 판단하는 데 몰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모든 심혼에 깃든 선한 영향력과 무한한 가능성만을 바라보며 그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이 생에서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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