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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Dec 19. 2022

마르지 않는 샘물

: 나누는 자에게 다시 채워짐이 허락된다

하나님, 주께서 제게 날 때부터 은혜로이 하사하신 자동적인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수월하여 한동안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열린 품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강한 의지를 내어 소망을 쫓고, 사랑으로 행하는 법을 배워야 했거늘 게으른 방치와 외면의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반짝이던 믿음은 빛을 잃고 사멸해갔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믿지 않음을 믿는' 자가 되어버렸을까요? 적당한 때가 되어 변화의 계기점을 위한 통증을 촉구해주시니 믿음을 상실한 자의 염려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염려는 어둠을 배우게 해 주었습니다. 염려는 어둠을 알아야만 그 속에서 내 의지로 빛을 찾고 나아가는 법을 알 수 있게 됨을 속삭였습니다. 염려에 사랑의 의지를 더하면 영위가 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사랑의 필연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됨을 아직은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가엾은 내면의 염려를 통해 깨닫습니다. 

  하나님, 각 개성에 꼭 맞는 일을 부여하시기에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은 상반되어 있는 듯 보이나 결국 하나의 목적에서 묶이는 일체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엮어주시는 소중한 관계성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로부터 감사히 받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허하게 나누며 함께 믿음으로 상생하고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라는 뜻임을 주지합니다. 한데 하나님의 궤도를 벗어난 사이 잠시 로그아웃된 영혼을 잠식한 자기애는 억압된 믿음 대신에 보상받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은가 봅니다. 의지로 만들 수 있는 필연적 가능성에 소망을 품기보다는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우연을 쫓다가 기어이 판명되는 불가능에 실망하고 관계에 원망을 팔았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당연하고 편해질수록 그 범사의 배후에 숨은 이적을 망각해버리기 때문에 헛된 기대치를 높이거나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오류의 굴레에 빠져버린다는 가르침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러한 요구의 기준점은 오로지 개인적 유익의 취득이며, 그 욕심은 역시나 믿음의 상실에 대한 억압을 보상하기 위한 심리에 얽매여 부패한 그 무엇임을 깨닫습니다. 조금이라도 내 유익함에 거슬리는 것이 생기면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이기심으로 단행하고 탐욕으로 낱낱이 재단하여 상대방의 자유를 통제해야 성에 차는 이 못된 성미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제가 글을 통해서 노력할 수 있도록 작은 역량을 허락해 주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그 뜻을 온전히 받들지 못하는 오만하고 부족한 저를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내 우쭐함을 확인하기 위한 글이 아닌 영혼을 바치고 나누기 위한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있나이다. 내 글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겠노라 이성에서는 나불거리나 부어주신 영감에 몰두하기 위한 첨예한 자의식을 유지한 채 자기애를 배제하고 뜻을 담아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덕에 세상에 인색한 편은 아니나, 자존적 공식이 결집된 내면의 영역에서는 행여나 질세라 두 눈을 부릅뜬 못난 인색함으로 가득합니다. 자기애는 목표와, 달성과, 성취의 맛을 아는 자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리하여 남의 영지와 내 영지를 구획하여 비교하고 견제하고 판단하고 시기합니다. 오랜 시간 과거에 얽매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몰입하는 현재의 모든 것이 필연성으로 환원되어 미래 기대를 자아내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나님, 저 혼자서 쓰는 글이 아님을 늘 상기하겠습니다. 제 손 끝에서 나오는 모든 글귀는 동행해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쓰는 글이며, 이는 곧 현재 그리고 미래에 허락해주신 모든 동행자와 함께 나누고, 다시 하나님의 도구로 바쳐 올리기 위해 쓰는 글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뇌리에 이타심을 통한 기쁨과 행복의 기전을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깨우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된 일꾼 됨을 허락하심을 기억하겠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나누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채워지지 않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행하는 자에 한하여 마르지 않는 샘물을 채워주심을 알며 그리 이끌어주실 것을 갈망하고 간구하나이다. 아무리 들이켜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샘물은, 그런 허상과 같은 자기 열심은 끔찍합니다. 모든 범사는 우연일수록 불가능에 값하고 필연일수록 가능에 값하니 주어진 현재에서 항상 이기심을 뚫어버리는 강한 의지와 소망으로 가능을 추대하는 되도록 낮은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염려가 없던 시절에는 하나님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무법자인 양 당당하게 행세했던 제가 사랑을 알고 행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생전 처음 가지고 그럴 수 없을까 봐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시 심어주셨을 사랑의 씨앗이 제 영의 몫을 하기까지 과연 얼마나 자라날 수 있을지 이렇게 의심할 줄 알았다면 의심하는 버릇의 재미를 조금 덜 찾을 것 그랬나 봅니다. 그러나 염려에 의지를 더해서 어떻게 믿음을 되찾고 자유를 영위할 수 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일러주시니, 운행 중인 우주의 궤도가 제게 근접하여 제시한 타이밍에 삑사리 나지 않는 리듬을 타고 동행하는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인지 습관과 행동법을 체득하라는 뜻임을 견지합니다. 불가능은 가능으로 환원되거나 환원되기 이전에 탈락되거나 심지어는 망각하여 소멸하기까지의 유예 기간 중에 언제든 마음껏 놓쳐버려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겠지요. 어떠한 혼란 속에서도 필연적으로 가능한 사랑을 발견하고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어둠을 헤쳐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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