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위한 YOLO인가?
질문 :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온 관습, 문화와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오랫동안 YOLO의 개념을 그릇된 방식으로 남용하면서 살아왔다. YOLO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만끽해왔기 때문인지 문득 정신을 차린 이후에는 YOLO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다. 세상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곧잘 YOLO족을 폄하한다. 우리가 사회에서 그럴듯한 외적자존을 수립하고 성공이라 부르는 자리에 안착하기 위해서 미덕으로 여기는 여러 보편적 관습 및 문화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센 충돌에도 불구하고 YOLO의 뜻을 잘 이행하기 위해서는 나름 강한 소신이 필요하다. 주변에서 내일은 없는 것처럼 사는 저 답도 없고 수완도 없고 눈치도 없고 장래도 없고 당장 자기 좋은 것 밖에 모르는 철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주눅 들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며 실존적 삶이란 이런 것이오, 깨나 당당할 수 있으려면 어린 시절에나 가졌던 반항심 이상의 교묘한 정신적 트릭이 필요한 법이다.
문득 YOLO의 본 뜻에는 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대부분의 경우에서 사람들이 자기애를 드높이기 위해서 YOLO라는 이상을 마구잡이로 빌려오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세상 속 많은 오류들의 개념이 그러하듯 애당초 카테고리 분류가 영 잘못되었다. 미래를 치밀하게 설계하고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염려의 노예가 되어 강박적으로 노력하는 타입의 사람이나, 어차피 단 한 번뿐인 인생 이런저런 고민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지금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을 즐기자는 타입의 사람이나, 그 목적이 개인의 자기만족을 충족하고 자기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이기심에 의한 것이라면 겉보기에는 정 반대의 양상이 무색할 정도로 동일한 냄새를 풍긴다.
YOLO의 뜻을 소명 의식에 맞추면 이는 곧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위한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몰입하라'가 될 것이다. 오늘이 하나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는 마지막 날인 양 도통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행동을 아껴두지 않으며, 망설이지 말고 직면하는 자가 된다. 내일 지구 멸망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사과나무를 심으라 명하셨다고 믿는다면 정성으로 심고 애정으로 가꾼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겨를이 없다. 시간의 유한성에 맡겨진 동안 발견한 내 소명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에너지가 모자랄 지경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성 안에만 놓여 있다면 처음과 끝이라는 지점의 구분은 무색해진다. 그저 허락된 모든 순간과 과정을 온 마음으로 즐기고 잠든 사랑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 몰입의 행복과 구원을 향한 미래 기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는 자는 어떤 순간에도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휴식한다. 그것이 'You Only Live Once'의 참된 뜻이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상기의 질문에 새로운 YOLO의 정의를 대입해 본다. 고작 내 자기애가 애호하는 YOLO를 지키기 위해서도 기존 사회적 관습과 문화로부터의 편견을 상대로 나름의 투쟁을 벌였는데 하나님의 뜻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에서라면 더욱이 노력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대신 교묘하게 짜인 트릭과 합리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설령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되더라도 간구하는 마음을 놓지 않으면 분명 올바르게 이끌어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