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객관적' 이라는 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객관적인 견해가 가능하다는 상대와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객관적이다'라는 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견해라고 한다. 하지만, 다수가 동의하는 견해라는 것을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을 근거로 이야기할 뿐 아닌가.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 입장에서 판단할 뿐 자신의 테두리(가치관)를 뛰어넘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주관적이라말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내가 좋은 것, 편한 것, 옳다고 믿는 것을 표현하면 그게 주관이니까.
나는 하얀 장미를 보면서백색은 객관적이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색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상태. 색의 값이 제로 0인 상태로 규정된다. 객관적으로 백색은 아무 색이 들어 있지 않다고 정의 내리기때문이다. 그런데, 백색 장미는 다르다. 예를 들면, 새하얀 에이포 용지와 백색 장미를 비교해 보자. 둘 다 같은 말, 같은 표현 '백색'을 사용하지만 서로 차원이 다른 색깔임을 직관적으로 판단한다. 꽃의 색깔 중에서도 백색 꽃들은 특히나눈부시다. 종이가 가진 백색과는 다른 차원이다. 투명하게 비치는 백색. 투명함과 백색은 공존할 수 없으나 백색 장미 잎을 떼어 가만히 살펴보면알게 된다. 투명한 백색. 백색 장미는 꽃말처럼 순결하고 결백한 모습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남들보다 더 힘들었느냐고 하면 겸손해질 따름이다. 이십 대 때 읽은 어느 책에서 ‘불리한 패를 쥐고서도 두 배의 내기를 걸 수 있겠니’라는 질문을 받고 수십 번 되뇐 적이 있다. 이 말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로 들어가 제우스 신 앞에 선 인간처럼 두 배의 내기를 걸면 수십 배, 수백 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듯 희한한 기대감을 주었다. 네 생명을 내놓으면 세상을 주겠다는 식의 거래가 가능한 것처럼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 이후로는 정확히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그런 류의 환상은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 배워 나갔고 주어진 책무에 빠져 들었다. 싱글이었지만 대학 때 받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 나갔고, 일은 늘 바빴으며 집에는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일이 많을 때에는 야근을 하거나 새벽 출근도 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섭게 하거나 짜증을 내면서 성과를 올리려고 찡그린 얼굴로 살아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객관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오늘 일을 해야 하니까. 이번 달 카드값을 갚아야 하니까.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 나와 비슷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무엇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이제와 후회되는 것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던지, 직장이니까 성실히 일을 해야 한다던지, 가족이니까 서로를 돌봐야 한다던지, 그런 말들은 참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만강요되어서는 안 되었었다.
한국 사람들은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하게 움직인다. 물론, 누구나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에 무딜 수만은 없다. 하지만, 나 어때 보여라는 말보다는 내가 스스로 편안한가에 집중하고 싶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내 친구의 어머니가 나의 과체중을 걱정하셨다. 얘를 살을 빼야 하는데, 언제 시집간다니 라며 진심으로 염려하셨다. 그렇다면 그 걱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내가 시집을 가지 못할까 봐, 다른 사람의 눈에 뚱뚱해 보여서? 타인의 눈총을 받을까 봐? 아니면, 단순히 나의 몸집이 둔탁해 보였던 것일까. 나는 일관되게 운동을 하는 과체중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객관적이라는 말이 주관적이라는 말의 반대말로 진실된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고 기대하지만 나는 그 말이 가진 강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논리적으로 극단까지 몰고 가 세상의 이치를 객관성으로 해독하기 시작하면 삶은 참,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 된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말보다는 대중적이라거나 보편적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
백색을 예로 들어 보자. 백색의 반대 입장에는 검은색이 있을 수 있다. 하얀 것과 검은 것은 극과 극을 담당한다. 하지만, 백색의 정의가 색이 없음이라고 한다면 반대말은 색이 있음이다. 그러니까, 백색 장미와 병렬로 나열할 수 있는 빨간 장미, 노란 장미, 보라색 장미 등이 등장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객관의 저 건너편에 주관이 있는 게 아니고 객관의 다양한 형태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
이럴 때 나는 비로소 편안해진다. 백색과 흑색으로 구분된 세상에 있는 것보다는 무지갯빛 찬란한 세상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