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플 May 09. 2023

인수인계의 맛

시원하고 섭섭한 반전 매력

 퇴사일을 2 주일 남겨 놓았을 때에 사장님께 나의 퇴사일에 대해 확인했다. 처음 말씀드렸던 때에 한 달을 예정하고 퇴사 일을 정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구인 공고를 올리거나 면접을 시행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영업의 특성상, 형식적인 절차보다는 일할 사람이 오는지가 중요하므로 나는 단지, 후임자가 있는지와 내 퇴사일에 변동이 없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사장님은 회사위치가 외지고 일도 많아 사람이 올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리셨고 나는 인수인계를 위해서라도 퇴사일로부터 늦지 않게 후임자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인수인계가 충분히 진행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의 독촉 덕분인지 이야기를 나눈 그 날, 분주히 여러 곳과 전화 통화를 하던 사장님이 점심시간이 지난 후 사뭇 진지하게 ‘올만한 사람이 있는데 인수인계 할 거야?’라는 말로 후임이 정해졌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언제든지 퇴사를 번복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더해졌지만 그 말은 그다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수인계를 하라는 건지, 퇴사를 하지 말라는 건지 불확실한 메시지에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짜증이 났고 올 사람이 있다니 당연히 퇴사로 가는 수순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면접도 보지 않은 사람이 바로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약간의 거부감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과연, 전화 한 통에 다음날 일할 사람이 나타난다는 게 상식적인 상황이고 현실로 가능한지 의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시쯤. 사무실에 또 한 번 겸연쩍어하는 사장님이 ‘이 분에게 인수인계 하면 돼.’라며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여러 살 언니로 보이는 후임님이 서 계셨다. 키가 작고 오동통한 외양에 편안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의 후임 되시는 그분은 사장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사실, 내 상황이 인수인계를 정리할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매일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느라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었기에 머릿속에 어떻게 인수인계 해야지 라는 계획은 없었다. 꼭 전달해야 하는 아이디와 패스 워드, 폴더 이름, 일의 순서에 대한 정보는 이미 인수인계서로 기록해 뒀지만 충분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막막함만 있었다.


 후임님을 만난 나는 우선, 나와 마주 보는 자리(사장님 의자)에 앉으시라 하고 커피를 한잔 권했다. 밝은 미소로, 좋죠, 라며 커피를 받아 든 모습에서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커피 한잔의 여유가 지난 후 컴퓨터 두대가 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월말이어서 각 거래처별로 지난 거래 내역을 이메일 발송해야 하는 상황에 수시로 발생하는 발주 데이터를 공유 폴더에 저장하고 출력하는 중이었는데  후임님의 손이 그 일들을 해 주었다. 덕분에 후임님은 일을 배울 수 있었고 나는 급한 월말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지금 업무를 오래 한 탓에 사실상 업무 인수인계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큰일에 작은 일, 가짓수가 많고 세세한 일들이 줄줄이 사탕이어서 이 일들을 다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뜻밖에 후임님을 만나고서는 내 일을 누군가가 이어서 전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업무 부담이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말한 대로, 후임님은 출근하는 첫날부터 진행되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도우면서 배워나갔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더해지는 업무에 잘 적응했다.


 일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업무는 인수인계란 말이 자세한 설명이나 종이 조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인수인계란 일이 전달되는 것. 그래서, 전임자로부터 떨어져 나가 후임자에게 안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수인계를 하면서 내가 이 사람보다 훨씬 에너지가 없고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퇴사는 일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을 만큼 지친 상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후임님은 출근 첫날 점심시간을 지나자마자, 왜 선임님이 퇴사하려는지 알겠네요,라는 말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나에게 왜 퇴사하시려는 거냐고 물으시길래, 지쳐서 좀 쉬려고요,라고 대답했던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사무실에 오가는 사람이 많고 해야 할 일은 하는 와중에, 중간중간 직원분들 문의하는 것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을 그새 파악 하신 거였다. 이제 곧 나는 이 장면에서 퇴장하게 될 텐데 이 분은 과연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일이란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의 등장으로 메워질 수 있다. 아무리 몇 년을 머물렀던 자리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 후임님의 등장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자리를 빼앗기는 듯한 섭섭함을 느꼈다.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했으면서도 내 업무를 다른 사람이 해 내는 것이 어색했다. 자식을 처음 유치원에 보낼 때 이런 기분일까. 내가 아니면 돌볼 수 없고 울기만 할 줄 알았던 어린아이가 유치원 선생님에게 태연하게 잘 적응하면 배신감이 들지 모르겠다. 일은 그저 일일 뿐인데, 너무 오래 다닌 나머지 일이 내 소유가 되어 버렸나 보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후임님의 일이 되어 버렸으니 잘 되기를, 어려움이 없기를 바랄 일이다.



 퇴사일기는 매주 화요일 발행됩니다.

 퇴사일기가 누군가의 직장생활에

 약간은 공감되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에 대한 주변의 반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