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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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어떠한 종류의 방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우울감에 대하여 논해야할 때가 있다.
보통의 우울감은 소일거리를 하거나 잠시 상황을 잊고 다른 일을 하면 해소될 때가 많으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 있다. 이를 테면, 오랫동안 참아온 일이 결국 폭발했다거나.
그런 해소되지 않는 우울감이 생기는 날이면 결국은 돌고돌아서 글을 쓰러 오게 된다.
사주팔자 때문인지, 말하지 않고는,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일을 버티는 것에서는 쉽게 마음의 부채가 생기게 된다.
나는 듣고, 넣고, 받기보다는 쓰고, 말하고, 주기에 적합한 사람인데 그렇지 못한 시간을 5년 넘게 보내고 있다. 그나마 쓸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이렇게라도 분출을 맡긴다.
종종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뿜어야 하는 사람이 내뿜지 못하면 병이 나고, 수렴해야 하는 사람이 내뿜기만 하면 자신을 잃는다.
적절하게 내뿜고 적절하게 수렴하는 삶의 균형을 갖지 못하면 사람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런 류의 우울은 해소하기가 매우 어렵곤 한다.
결국 쓴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얽힌 문자들을 발화의 문을 통해서 발설한다는 쾌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
얽힌 문자들을 얽힌 상태로 놓아두면 매듭이 점점 더 꼬이기만 한다. 그렇다고 매듭을 풀기에는 이미 심사는 너무 뒤틀려 있다.
결국 그러한 매듭은 얽힌 채로 밖으로 내보여야 한다. 그러면 누군가 지나가다가 매듭을 줄어주거나 매듭을 끊던가, 매듭을 고민해 보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어느 한 가지는 매듭을 얽힌 채로 전시하는 것이다. 누군가 봐주겠지 기대하는 것만이 할 수 있다. 무책임할수록 홀가분해진다.
그럼에도 왜 우울하게 된 것인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해도 이 우울을 설명하기에는 사람이 지닌 단어의 개수가 모자르다.
단어의 개수가 모자란 우울감은 우울증과는 다를 것이다.
우울하다, 울적하다, 상심했다, 적적하다, 슬프다, 따분하다, 지루하다, 지겹다, 지긋지긋하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참담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어의 개수가 모자르다.
이 기분은 울적하면서도 지루하고, 지긋지긋하면서도 참담하다. 문장과 문장이 만나는 담화의 단위가 되어야 이 감정은 설명해 봄 직하다. 그래서 이 우울감은 단어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필요 이상의 가설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필요 이상의 단어들을 상상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우울하다'는 그 단어 자체로 끝내야 한다. 그 이상으로 단어를 세우면 '우울'은 다른 감정으로 전염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감정에는 침묵해야 더 이상 문제가 늘어나지 않는다.
친구한테 연락을 했다. 우울하다고, 그 이상의 단어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우울은 거기에서 끝나고, 복잡해지지 않는다.
더위가 시작됐다.
올해도 이겨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