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팩 더블 26)

Original

by Kalsavina

26. 박영민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

유수연이 세복이로부터 잠적한 후 일어난 일들은, 정말이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땅을 몇 번이나 쳤는지 모를 그런 일들.

그러나 당연히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수연이 홀연히 사라진 후, 세복이는 말 그대로 살짝 ‘미쳐’ 버렸다.

수연이 며칠씩 전화를 꺼 놓고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자, 격분한 세복이는 휴대폰을 집어던져 박살을 내 버렸다. 그리고는 새 휴대폰을 만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세복이의 곁에 바싹 붙어 있어야 했다. 내가 붙어 있지 못할 때에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붙였다.

상덕 아재와 더불어 나의 충실한 심복인 용태는 담치 형의 막내동생이었다. 머리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심성은 착해서 내가 준 임무, 아니 부탁을 성실히 수행했다. 녀석이 수연을 잘 감시해 준 덕에 나는 안심하고 세복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녀석은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친구인 야마하 드렉스타 바이크 오복이를 타고 핏발이 선 눈으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혼자서. 때로는 멀찍이서 자신을 따라붙는 나를 보고도 본체만체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발로 차기 일쑤였고, 길을 가다가도 수연을 닮은 여자가 눈에 띄기만 하면 무작정 달려가 잡아서 확인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여자의 애인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끌려갈 뻔하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매번 내가 쉴드를 쳤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면서.

“여친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거든요. 다른 놈하고 눈맞아 달아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렇게 귀띔해주면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용을 베풀었다. 실연의 힘이 위대한 것인지 사랑의 힘이 위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치정 문제에는 관대함을 베푼다는 사실을 나는 그런 일들로 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보낸 후에는, 정말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녀석은 멍해져 버렸다. 조금씩 체념해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속을 들여다볼 길이 없었다.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망가뜨린 휴대폰을 복구했는데, 알고 봤더니 수연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녀석이 술을 마시다 말고 꾸벅꾸벅 졸다 잠든 틈에 나는 살며시 녀석의 문자메세지를 확인해 보았다.

[미안해. 나 떠나야 해. 그 사람이 나 찾아낸 것 같아. 함께해서 즐거웠어. 안녕]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수연은 생각보다 현명했다. 사랑한다느니 나를 잊지 말라느니 하는 바보같은 멘트는 남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다시는 세복이를 만나지 않을 작정인가 싶어 약간은 허망하기도 했다. 얼굴만 봐서는 그렇게 매몰찬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를 일이다.

세복이 녀석은 전보다 자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담배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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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의 계모는 거의 집값의 80프로에 달하는 돈을 담보대출로 빼냈다. 사실상 집을 통째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돈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에 넘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집에 차압 딱지가 붙던 날 유수연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유수연에게 사람을 붙여뒀던 터라 그녀의 거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신갈에서 용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어떤 한적한 동네에 숨어 있었다. 다름아닌 그녀와 세복이가 처음 만난 장소 근처였다.

동네 자체는 숨기에 적당했지만, 내가 이렇게 금방 찾아낼 정도라면 강태석이 그녀를 찾는 것도 시간 문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해졌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USB를 찾아야 했다. 함칠성 어른의 유언장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증거가 될 USB,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의 합법적인 상속재산을 물려받을 유일한 수단인 그 USB를.

다른 사업들은 운이 따라준 덕인지 수월하고 무탈하게 굴러갔다. 돌아가신 삼촌의 조언대로, 나는 아랫사람들을 최대한 너그럽게 대했다. 금전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 상덕 아재는 아직 어린 내가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면 그들에게 얕잡아 보일 것을 우려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래도 항간에는, 중해방의 애송이 보스가 생각보다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니까요.

상덕 아재에게 우리 조직원이 웃으며 그렇게 뇌까리는 걸 듣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세복이었다. 날로 여위어갔고, 성격은 까칠해졌다. 녀석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녀석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가슴이 납덩이로 변한 것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결국 수연이 사라진 지 보름여 정도 지난 어느 날, 기어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 또한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그날, 저녁 무렵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다고 기억한다. 강태석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를 찾아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비싼 술들을 축내곤 했다. 그 징그러운 작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중해방 애송이 보스님이 인심은 참 후하시다카이. 내가 전에 모시던 큰형님도 이런 술은 나한테 안 권했는데. 아 그 가시나만 찾으면 내 바랄 게 없을 낀데. 우리 보스님이 찾아주면 얼마나 좋은교. 우리 보스님 찾는 물건도 돌려드리고. 누이좋고 매부 좋고 님보고 뽕따고.”

‘뽕따고’에서 그는 유독 말에 힘을 주어 강하게 발음하며 끼득기득 턱에 찬 웃음을 목으로 넘겼다.

그런 식으로, 그날도 그 작자는 나를 찾아왔길래 으레껏 그러려니 했으나 그날은, 얘기가 좀 달랐다. 그의 태도 또한 달랐다. 그는 전에 없이 분개한 상태였다.

“그 썩을 년이 나한테 가명을 댔네? 유영? 나는 그게 그년 본명인 줄 알고 온 동네를 그 이름으로 싹 후벼팠는데 그 이름이 아니었네? 이런 X년. 이름을 그런 식으로 속이면 못 찾을 줄 알았나. 내가 그렇게 오래 허탕친 게 이유가 있었네.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엉터리로 들고 다녔으니 못 찾아낸 게 당연하지.”

상덕 아재의 사투리와 달리 그의 사투리는 정확하게 어디 출신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만큼 엉성하고 두루뭉술했다. 고향은 경북 어디쯤이라고 짐작이 갈 뿐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유추해 낼 수 없었다.

상덕 아재의 말로는, 본래 강태석은 몸에 문제가 있어 정상적인 섹스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발달된 의학의 도움을 빌었는지 어쨌는지 그게 가능해졌다는 거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들은 안 되냐는 질문에는 무조건 유수연이 아니면 다른 여자는 싫다고 패악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참 욕을 씨부렁대던 그는 슬슬 일어나 내 사무실로 쓰고 있는 담치 형의 창고를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나섰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세복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눈빛이 한순간 맞물렸고, 세복이는 그 자를 짜증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식으로 자꾸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었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여길 다 오고.”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세복이를 의자에 앉혔다. 문간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던 강태석이 께느른한 말투로 구시렁댔다.

“우리 보스님도 남자는 남자네. 조런 이쁜 처자를 곁에 두고.”

할 수만 있다면 발로 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전에, 다시 한번 등골이 오싹했다. 거의 남장에 가까운 복장을 한 세복이를 처음 보고 여자임을 바로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열 명 중 하나 꼴이다. 강태석이 그 중 하나라니. 새삼 그 자가 몸서리쳐지게 징그러웠다. 새삼 유수연의 신세도 참 불쌍하다 싶었다.

“저 사람이 강태석이야?”

세복이는 마뜩찮은 눈으로 그가 나간 문 쪽을 째려보았다.

“심히 마음에 안 들어.”

“어쩐 일이야. 일하러 간 거 아니었어?”

“이모부한테 돈 받았어. 당분간 일은 쉴 거야.”

그 말은, 더 이상 세복이가 그 폐공장에서 기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이모부와의 계약기간이 끝났고 세복이는 어찌됐건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는 다른 거처를 찾을 때였다.

“축하한다. 이사할 데는 정했어?”

"그건 천천히 알아봐도 돼. 그보다, 부탁할 게 있어."

무슨 부탁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수연이 찾아내라고?”

“잘 아네.”

“내가 무슨 수로?”

“중해방 보스잖아.”

“관두라고 할 땐 언제고?”

“생각이 바뀌었어. 친구가 조폭 두목이면, 나로 봐서는 든든하지 뭐.”

젠장, 이 녀석한테는 여전히 내가 그냥 친구일 뿐이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뭐든 다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그래, 난 널 거부하지 못한다. 거부하는 법을 모른다. 적어도 유수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의 그 어떤 요구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알아볼게.”

“고마워.”

“온 김에 담치 형네 가서 술이나 마시자. 잠깐만 기다려.”

쟈켓과 지갑을 대충 챙겨 들고 일어서려는데 다급히 문이 열리며 용태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세복이를 보더니, 다급히 내게 손짓을 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뜻으로.

나는 그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간 후,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용태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래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누나요. ”

“심각해?”

“심각해요. 일단 약국에 얘기해서 수면유도제는 하루에 딱 한 알, 아니 반 알씩만 주라고 얘기는 해 뒀어요. 혹시 모으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거의 이틀에 한번 밖에 나와서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하고 컵라면, 뭐 그런 것만 사가더라고요. 가끔 소주하고 여자들 쓰는 물건 같은 거. 그게 다예요. 그래서 그런지 몰골이 아주 해골같아요. 그냥 살기 싫은 사람처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그 얘길 하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여기까지 숨었었나. 나는 용태와 함께 다시 1층으로 올라왔다. 밖으로 나가는 동안 용태 녀석은 눈치없이 한숨을 내쉬며 뇌까렸다.

“강태석이 그 누나 본명을 알아냈어요. 유영이 본명이 아니라면서요. 그 누나 본명이 유수연이라는 거 그 자식이 여태 모르고 있었나 봐요.”

그 순간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나를 홱 밀치며 나를 비껴갔다. 다음 순간, 나는 나를 치고 지나간 세복이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뒷목이 빳빳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세복이는 단 한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오복이를 탄 후 시동을 걸었다.

녀석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늦게, 녀석은 내게 휴대폰으로 한 통의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저녁에, 내 아지트 안쪽 창고로 와. 안 오면 죽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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