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28. 박영민
긴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붉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세복이의 아지트가 자리잡은 폐공장 안쪽은 세복이의 보금자리가 있는 경비실 복도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폐쇄된 상태였다. 그러나 본관 옆으로 딸린 제법 널찍한 자재창고 하나만은 예외였다. 꽤 아늑해서, 가끔 친구들을 불러 술파티를 할 때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러나 같이 술파티를 하던 친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후로는 그 창고를 거의 쓸 일이 없어서 문을 걸어잠근 채 방치한 상태였다.
그 곳에 서서, 세복이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애를 설득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수연이 어디 있어?”
“안전한 곳에 있어. 걱정하지 마.”
세복은 피식 웃었다. 여느 때와 다른 웃음이었다. 녀석은 더 이상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
“강태석이 수연이를 쫓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그건 나중에 따질 문제고, 나한테 왜 말 안했어?”
“미안해.”
“닥쳐.”
세복의 핏발 선 눈에서 암울한 분노가 떠올랐다. 회백색의 분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누구도 누그러뜨릴 수 없는.
“수연이, 어디 있는지 말해.”
“알아서 뭐하게.”
“갈 거야. 내가 가서, 내가 숨길 거야. 더 안전한 곳으로.”
“정신 차려! 그애가 왜 그렇게 널 떠났는지 아직도 몰라? 널 보호하려고 한 거야!
그애와 같이 있으면 네가 위험하니까!“
내가 바보였다. 그런 말이 세복이에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 천치였다. 세복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이죽거렸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안 위험하고? 웃기시네.”
세복이의 ‘웃기시네’를 들은 그 순간부터 나의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그애가 담을 수 있는 모든 경멸을 한껏 담은 그 ‘웃기시네’가 내 귀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긴 얘기 할 거 없고. 빨리 말해. 시간 없어. 걔 죽어가고 있다며. 용태가 말한 그 애가 수연이지? 가서 용태를 족치기 전에 빨리 말해.”
“정신 차리라고 했다.”
“너야말로 정신 차려. 애시당초 네가 그 작자를 여기로 끌어들인 거잖아? 네가 그 작자를 몰랐으면 아무 일도 없었잖아?”
어이가 없었다.
“그 작자를 내가 몰랐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야 이 계집애야! 말 똑바로 해! 그 자를 내가 먼저 알았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막고 있는 거야. 몰라? 그 자를 몰랐으면 그 자가 걔를 못 찾아냈을 거라고?”
그제서야 세복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눈빛이 내게 최면을 걸었다. 너의 남은 이성을, 마비되어 쓸모없는 이성을 모두 버리라고. 내가 원하는 걸 네 마음대로 하라고.
더 이상 머리로 뭔가를 생각할 여지가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마지막 남은 선 하나가 끊어졌다. 이성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하나의 선이었다. 세복이에게 다가간 나는 난폭하게 녀석의 어깨를 잡고 밀어붙여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녀석은 나를 노려보며 힘겹게 일어나려 했으나,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녀석을 올라타고 녀석의 멱살을 쥐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걔를 찾는데? 걔가 너한테 뭘 해줬는데?”
“너, 미쳤구나. 박영민.”
“그래 미쳤어. 미쳤으니까. 이제 속시원히 묻자. 유수연이 너한테 해 준 게 뭐야? 걔가 너한테 무슨 꿀처럼 달콤한 걸 줬길래 이 난리야? ”
세복의 눈에서 언뜻 의혹이 스쳐갔다. 잠시 의혹은 씁쓸한 무언의 탄식으로 변했다.
“역시, 그날 문이 열려 있던 거, 네가 왔다 간 거구나.”
“그래. 내가 갔었어. ”
“뭘 알고 싶은데?”
“유수연이 너한테 뭐야? 그냥 친구야?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아. 말 안해.”
“해! 최소한 유수연이 너한테 뭘 해줬는지 그것만이라도 말해. 내가, 내가 진짜로 더 좋은 걸 줄 테니까. 백만배 천만배 더 좋은 거, 내가 줄 수 있다고!”
함세복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목쉰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여자의 웃음이었다.
어쩌면 그 웃음이 나를 남자로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난폭하게 함세복의 옷을 벗겼고, 저항하는 녀석의 귀에 대고 내가 했어야 했던 말을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저항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모든 것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