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발톱 4/5

by Kalsavina

승부에 관계없이 나는 당연히 마이어에게 사과해야 했지만, 웬일인지 그럴 수가 없었어. 마이어는 내 사과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게다가 어찌된 셈인지 그날 이후 도통 어디서고 마이어를 볼 수가 없었어.

넌 그때의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 마이어를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붙잡고 마이어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지만, 내가 저지른 짓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내 심정 말이야. 너는 내가 내 무덤을 스스로 팠다고 웃겠지.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저런 후회나 자책감보다는 일단 마이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어.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하고픈 마음보다는 그녀에게 고백하고픈 마음이 컸지. 짝사랑에 빠진 어중이떠중이의 어설픈 고백 말고, 내가 그녀를 통해 느낀 모든 것을, 여자에 대한 보호본능만으로 점철된 사랑이 아닌 외경심과 경의에 충만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던 그 선언을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충실하게 지키더군.

나는 그녀를 잊으려고 했어.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마음도 멀어지려니 하고. 몇 년쯤 지나고 나면 조금 가슴아프고 많이 겸연쩍은 삶의 사소한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자위하며 시간을 보냈단 말이야. 그렇지만 그게 잘 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길게 네게 그 일을 설명할 이유가 없겠지. 각설하고, 어쨌든 나는 다시 마이어를 만나게 되었어. 그건 거의 신이 나를 가엾게 여겨 만들어 주신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해. 다름아닌 어글리 덕스 클럽에서였지. 그때쯤 해서는 비웃음을 무릅쓰고라도 데렉이나 수쓰엔에게 마이어의 안부를 물어볼 결심을 하던 참이었어. 그날도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슈퍼볼 경기가 있었는지 야구 경기가 있었는지 클럽이 여느 때보다 조용했어. 클럽 안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분위기였거든. 나 역시 술 때문에 재현에게 전화를 하고는 그를 기다리며 한가하게 당구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당구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녀의 실루엣이 나타난 거야. 꿈에도 잊을 수 없던 그 모습이 말이야. 머리를 여중생처럼 짧게 자르고 청보라색 긴 니트 스웨터를 걸친 차림이었지. 등을 돌린 모습이었지만 간간히 보이는 옆모습은 틀림없는 마이어의 모습이었어. 하필이면 그 옆에 동행으로 보이는 여자가 같이 서 있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가 없었어.

급기야 재현이 도착했고 나는 재현과 마이어 양쪽으로 신경을 분산시킬 수 없어서 재현에게 마이어를 가리켜 보이고 내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했어. 재현은 약간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곧 내게 자신의 우정을 유감없이 과시해 주었어. 즉 마이어에게로 다가가 그녀와 그녀의 동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의 동행과 더불어 잠시 자리를 떠 준 거야. 덕분에 나는 마이어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고도 자연스레 그녀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지.

“오랫만이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어. 심지어는 불편해하는 기색조차 없었지. 그건 이상하리만치 나를 슬프게 했어. 만약 내게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을 한다면 그녀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상상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어설프고도 때늦은 사과를 했어.

“지난 번에, 데렉의 집에서는 미안했어.”

“그만둬.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녀의 무심한 목소리에 화가 날 정도였어. 나는 그만 부지중에 내 속을 드러내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어.

“넌 정말 태평하구나. 내가 그렇게 널.....무시했는데도.”

‘무시했는데도’라는 말은 입 속으로 반쯤 기어들어가 버렸지.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놓치지 않았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어.

“태평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너의 술수에 말려드느니 그 편이 낫지.”

“나의 술수?”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어. 그 순간의 행복이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어느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 마이어는 손에 들고 있던 병맥주를 마셨어. 그녀가 손에 병맥주를 들고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정말 그녀는 몰랐을까. 내가 왜 그랬는지. 머리가 아팠어. 가슴도 아팠지.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나는 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고개를 숙여 낡고 때묻은 내 스니커즈만 쳐다보았어. 여전히 무심하고 태평한 마이어의 목소리가 들렸어.

“그날, 나한테 일부러 져 준 건 아니지?”

무슨 소리! 나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어. 갑자기 그날의 그 시합이 다시 눈 앞에 펼쳐졌어.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마이어의 얼굴이 생각났지. 내 상상일 뿐이었지만, 오르가즘의 절정에 오른 마이어의 얼굴은 아마.....팔씨름을 할 때 있는 힘껏 손목에 힘을 주는 그녀와 표정, 그러니까 내가 본 그 표정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나는 마이어의 질문에 짐짓 동문서답으로 응수했어.

“여자답지 않게 팔씨름을 꽤나 좋아하는군.”

물론 여자라고 해서 팔씨름을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다행히 마이어는 ‘여자라서 뭐가 어째?’ 하고 수쓰엔 스타일의 페미니즘식 딴지를 걸지는 않았어. 그 대신 솔직하게 대답했지.

“좋아해.”

“무슨 이유라도 있어?”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되물었어. 아주 의외의 대답이 날아왔어.

“섹스에서 못 느끼는 걸 팔씨름을 하면서 느끼거든.”

나는 마이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마이어는 내게 옆얼굴을 보인 채 저 편에서 벌어진 아마추어 힙합 그룹의 쇼 다운을 바라보았어. 어쩌면 그녀는 내게 마음놓고 자신의 얼굴을 볼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해 그쪽을 응시한 건지도 몰라. 그녀와 나를 둘러싼 그 미묘한 분위기는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져 버렸어. 그걸 없애기 위해 나는 대담해지기로 했어.

“팔씨름 하자. ”

그녀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나는 잽싸게 덧붙였어.

“게임은 삼세판이야. 한 번은 내가 이기고 한 번은 네가 이겼으니, 이번에 이기는 사람이 진짜로 이기는 거야.”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빛이 나는 것 같았어. 빛나는 지성과 타고난 강인함을 담은 그녀의 미소가 다시 한 번 내 눈을 즐겁게 했어. 나는 그 순간 나를 지배했던 행복을 충분히 만끽하려고 노력하며 그녀를 데리고 탁자로 향했어.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탁자에 앉아 서로의 손을 맞잡았어. 마이어는 왼손을 내밀었고 나도 따라 왼손을 내밀었어. 그 순간, 기억에 남아 있던 지난 두 번의 시합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어. 두 번 다 마이어는 왼손을 내밀었었고 자연스레 나도 왼손을 내밀었었지. 그걸 떠올린 순간 어떤 결론이 뒤따랐는지 너는 알겠지. 그래, 마이어는 왼손잡이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 역시 왼손잡이거든. 그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게 찾아온 묘한 동질감이 나를 들뜨게 했어. 그리고 마이어는 여전히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어. 단언컨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맹목적으로 찬양하거나 우상화할 생각이 전혀 없어. 내가 사랑하는 건 그녀의 꿋꿋하고도 견고한 의지였고, 그건 항상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 깊이 숨어서 좀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나 둘 중 한 사람이 이기고 다른 한 사람이 져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의 의지와 내 의지와 충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쉴 새 없이 떠드는 내 가슴은 그녀와 싸우지 말라고 쉴새없이 내게 외쳐댔지. 나는 흥분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부여안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어. 나는 이겨야 했어. 왜 이겨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겨야만 했어. ‘여자를 상대로 시합을 하다니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라는 비난을 명백히 드러낸 몇몇 친구들의 아니꼬운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겨야만 했어. 만약 그녀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러니까 물리력이 아닌 정신력이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내가 깨닫는다면, 나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개 꼴이 되는 거잖아. 땀이 진득하게 밴 손에 점차 강한 압력이 들어오면서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상기되고 점차 내 압력에 대한 반사적인 저항력이 앙다문 입술에 농축되어 갔어. 나는 몇 번이나 외쳤지. 제발 내게 져 줘. 내가 최소한의 희망만이라도 가진 채로 널 사랑할 수 있도록. 더 이상 저항하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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