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여름
25. 유수연
머리라도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다시 세복이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세복이와 박영민의 사이가 이토록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떠나는 게 답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답답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내게 웃어보이는 세복이가 딱하고 애처로웠다.
"내가, 어떻게든 영민이 다시 설득해 볼게."
"그럴 필요 없어. 나한테는."
세복이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싱긋 웃었다.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되니까."
이렇게 애절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 상대가 나라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 내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본 순간부터.
하지만 박영민으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네 나비 데리고 알아서 잘 살아봐.
박영민은 세복이에게 홧김에 그렇게 말했을 뿐,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게 화가 나 있을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친구이자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아간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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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면, 너희들 화해할 거니?"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왜 내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때는 새벽 1시,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웨이크 업의 밤이었다. 박영민과 나는 담치 삼촌이 카운터 안쪽 해먹에 올라가 곤히 잠든 바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램프 등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네가 그 녀석을 떠날 수는 있고?"
그렇게 말하는 박영민의 얼굴이 미소짓고 있었다. 뭇 여자들을 설레게 할 만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내가 큰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그래야 한다면, 그럴 거야. 걱정하지 마. 세복이한테는 네가 필요해."
"그럴 필요 없어. 당분간은."
박영민이 요 근래 자주 여기서 술을 마시는 이유는 역시 세복이 때문이었다. 쓰린 속을 술로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그 녀석 많이 위험해. 다행히 그 말도 안 되는 매제니 어쩌니 하는 소문 덕인지는 몰라도, 삼일에서 널 납치할 생각은 접은 것 같으니까, 이제 세복이랑 살아도 돼.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것도 굳이 지금 그만둘 필요는 없고."
"다행이다."
"어차피 너희들, 언제 경찰에게 들킬지 모르니까. 그때까지는 같이 있게 해달라고 세복이가 부탁하더라."
"......."
"우리가 집안끼리 정해진 사이였다는 거, 넌 몰랐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단순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박영민이 함세복을 이토록 헌신적으로 보살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한 여자를 향한 한 남자의 짝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였을 줄이야.
"세복이 녀석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 줘."
"알았어.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세복이가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세복이가 떨어져 있게 한 거. 꼭 네 신변 때문만은 아니야. 세복이가 제아무리 불세출의 투사라고 해도, 삼일 녀석들이 떼거지로 달려들면 끌려갈 수 밖에 없어. 지금 녀석을 노리는 게 삼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녀석도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거야."
"그런 줄은 몰랐어."
"차라리 네가 세복이 옆에 가 있는 게, 오히려 그 녀석한테 안전할 수도 있겠다. 일단은 돌아가더라도 조심해. 세복이 잘 지키고."
역시, 박영민은 함세복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