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팩더블 3 헤리티지 5)

란의 폭주

by Kalsavina

5. 함세복



"아이 예뻐. 귀여워."

한가로운 오후였다.

수연이 심심하다며 사들이기 시작한 인형을 만지며 흐뭇해하는 동안, 나는 그 옆에 누워 졸고 있었다. 어째서 인형이 무료함을 달래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수연은 즐거워 보였다.

새가 지저귀듯 속삭이고,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옅은 핑크색 면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틀림없는 나의 나비, 수연이었다.

"귀여워?"

"응."

수연이 멋모르고 아키에게 속아 따라갔다가 돌아온 후, 나는 수연이 나만의 나비로 머물러 있는 현실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아키 녀석이 만약 딴 마음을 먹고 수연을 해치거나 돌려보내지 않았을 경우를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어느 때보다 돌아온 수연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렇게 배를 깔고 누워 엎드려 있는 수연은 오래 전 내 아지트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배를 깔고 누워 다리를 가볍게 구부린 채 잡지를 보던 바로 그녀였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저려오던 바로 그 여자였다.

동생 진기를 떠나보내고 깡소주를 몇 병이나 마신 후 병원에 실려갔던 수연이 퇴원하던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퇴원하던 날, 그녀는 샤워를 해야 한다며 나와 영민이 녀석을 병실 밖으로 내쫓았다. 영민이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내게 물었었다.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건 당연한 건데, 대체 너보고는 왜 나가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런 모습은 미리 보는 게 아니다. 갑자기 보고 놀라는 게 맞다. 촉촉하게 젖은 길고 검은 머리.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오늘 입은 티셔츠가 바로 그때 입었던 티셔츠였다.

그 폐성당에서의 키스. 그애가 불과 영점 오 초 빨랐을 뿐이다.

아지트에 들어가 문을 잠그기가 무섭게 그 티셔츠를 벗기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지난날을 떠올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수연을 본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어졌지만,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내가 배를 깔고 엎드린 수연에게 키스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게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형만 예뻐하지 말고, 저도 좀 예뻐해 주시면 안될까요. 아가씨?"

수연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 방긋 웃고는, 인형을 내려놓고 키스하기 위해 내 머리 위로 다가왔다.

이때다 싶어 나는 얼른 그녀를 안고 한 바퀴 굴렀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내 몸 아래로 깔렸다.

역시, 키스는 내가 위에서 하는 게 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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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을 보낸 그 작고 정겨운 빌라에 머무른 시간은 고작 3개월 반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이사를 해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내 앞에 닥친 신변의 위협 때문이었다.

수연이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걸 보며 나 또한 마음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강태석을 죽이고 내 곁으로 되찾아온 수연과 보냈던 그 여름이야말로 내 인생 전체와 맞바꾸어도 좋을 만큼 찬란했던 시간이었다.

영민이 녀석과 나를 화해시키기 위해 나를 떠난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비를 맞으며 허망하게 집으로 돌아온 날, 나를 따라 비를 맞으며 걸어와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던 수연을 잊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수연이 몇 번이나 내 가슴을 헤집어 놓았는지, 그 후로도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역시 강태석의 일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발 아래의 지뢰로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을까.

매번 사랑을 나눌 때면 수연은 내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 또한 필사적이었다. 강태석 일을 경찰에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수연을 또 잃어버릴 것만 같은 미칠 듯한 불안감 때문에, 매번 수연을 기절 직전까지 몰고 갈 만큼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가을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기 며칠 전, 수연은 그 작은 집의 구석구석을 돌며 벽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집이, 우리의 신혼집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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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한 곳은 수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나 아주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S사 본사가 있는 영통 부근의 고급 오피스텔이었는데, 빌트인 구조라 우리가 들고 들어간 이삿짐이 거의 무용지물일 만큼 모든 가전제품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 집을 구해 준 건 다름아닌 영민이었다.

수연의 말에 따르면 보안 때문에 일부러 그 곳을 택한 거라고 한다. 그 일대를 중해방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안전했고, 워낙 인파가 많은 곳이라 완전범죄로 나를 해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 집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녀석의 당부가 있었다.

어차피 녀석과 내가 집안끼리 정해진 사이였음을 안 이상 한 번은 만나야 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아직도 녀석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이제는, 그 녀석이 두려웠다.

더 이상 내 친구였던 시절의 순하고 착한 박영민이 아니었다.

항상 그렇다.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이 그 사람을 바꾸게 마련이다. 녀석은 이제 놀기 좋아하는 선량한 한량 청년이 아닌, 거대 조직폭력 집단의 우두머리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녀석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에 없이 기민하고 예리하게 빛나는 눈, 그러나 어딘가 알 수 없이 탁한 느낌이 감도는.

녀석의 선량하고 맑은 예전의 눈빛이 그리웠다.

녀석을 찾아가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이든 좋으니, 수연과 떨어져야 한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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