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폭주
6. 유수연
우연히 길을 지나쳐가다가 본 웨딩드레스 샵의 쇼윈도에서,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웨딩드레스를 발견했다. 나는 주저없이 내 휴대폰으로 그 사진을 찍었고, 세복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내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집에 먼저 들어온 것은 세복이가 아니라, 나와 같은 클럽에서 일하게 될 정아였다.
정아가 우리 집에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놀러 올 목적에서만은 아니었다. 정아는 지난 여름 내가 그녀에게 들려준 다양한 팝송 레퍼토리에 매료되었고, 그 때문에 나로부터 내가 아는 모든 팝송을 다 배울 요량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라이브 카페에서 오랫동안 노래를 해 온 그녀였지만 팝송을 불러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영을 통해 알게 된 몇 곡의 팝송을 꼭 자신의 레퍼토리로 넣고 싶어했다.
"그런데 언니."
언제 왔는지 세복이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정아는 천진난만하게 내게 질문했다.
"나 언니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원래는, 그러니까 윤락가에 끌려가기 전까지는, 그 노래들을 정말로 다 언니가 불렀었다는 거죠?"
"응. 맞아. 학교 다닐 때 부르던 곡들이야."
"거의 다 팝송이었어요. 가요는 거의 없고. 정말 그렇게 팝송만 들었어요?"
"응."
"보통은 우리 때 다 가요를 들었는데. 특이하네요.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었어요?"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곤란했지만, 나는 차근차근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음.....우선, 가요는 우리 나라 말이니까, 가사가 머리에 곧바로 들어오잖아."
"그렇죠."
"그렇게 가사부터 머리에 들어오면, 가사의 의미에 집중하느라 멜로디에 집중할 수가 없더라고. 나, 머리가 나쁘거든."
저만치서 세복이가 피식 웃는 게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어라는 남의 나라 언어가 꼭 주문처럼 느껴졌거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만을 위한 행복해지는 주문 같은 거. 그래서 그렇게 영어로 된 노래만 찾아 듣고 불렀나 봐."
"우와!!!"
정아가 탄성을 질렀다.
"웨이크 업의 영은 그냥 착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수연 언니는 은근 멋진 사람이네요. 뭔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요. 자기 색깔 확실하고. 생각하는 것도 남다르고. "
"그러니까."
하고 세복이가 갑자기 정아의 등 뒤로 다가들었기 때문에, 정아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커피잔을 엎을 뻔했다.
"넌 수연이하고 내 사이 인정한다는 거지, 응?"
"아이 참. 놀랐잖아요. 전투복 언니 너무해. 매번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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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다시 노래 불러 볼 생각 없어요?"
저녁을 먹은 후 다 같이 과일을 깎아 먹는 동안 정아가 질문했다.
"못 불러. 목에서 노래가 나오질 않아."
"뭐야. 그러면 나 언니한테 노래를 어떻게 배우라는 거예요?"
"곡목하고 가수를 알려줄 테니까. 직접 듣고 따라부르면 안 될까?"
"시시해. 그래도 조금은 같이 불러 줄거라 생각했는데. 뭐야. 인어공주도 아니고. 왕자 만나러 목소리 팔고 다리 얻은 거예요?"
순간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만화책을 뒤적이던 세복이가 돌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인어공주. 그거였구나."
"뭐가요?"
"쟤 말이야. 인어공주야. "
"네?"
"맞잖아. 목소리를 팔아버려서 목소리는 없고, 다리는 얻었고."
"하지만 그 다리,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 게다가."
나는 포크를 들어 어정쩡하게 내 머리에 갖다댔다.
"에리얼처럼 포크로 머리 빗으려고 해도 빗을 머리도 없어. 다 잘라버려서."
어느 쪽이든 웃어 주길 바랬는데,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는지 둘 다 웃지 않았다. 이윽고 정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언니 다리가 그 지경이 됐고, 언니 말대로 포크로 빗을 머리카락도 없어졌으니까, 이제 목소리를 다시 되찾을 차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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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가 적어준 곡목과 가수가 적힌 쪽지를 훑어 내려가다가 아! 하고 소리쳤다.
"이 곡! 맞아요. 영 언니가 나한테 가르쳐 준 곡. 나 이 곡 라이브에서 부르려고 연습했었는데, 그때 언니가 나한테 이거 정말 좋아하는 곡이라고 했었죠?”
머라이어 캐리의 I still believe였다.
"맞아. 내가 처음으로 가사를 다 외운 노래였어."
"같이 불러봐요."
"뭐?"
"할 수 있어요. 노래할 수 있다고요. 내가 시작할 테니까. 따라 불러봐요."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 있던 세복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정아를 말릴 수 없었다. 내가 난처해하는 동안 정아가 노래를 시작했다.
You look in my eyes
And I get emtional inside.....
정아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 내 귀에 익숙했던 그 멜로디, 너무나 들어서 지겨워질 정도로 따라 불렀던 그 멜로디로부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가사들이 떠올랐다.
정아가 그 노래의 2절을 반쯤 불렀을 때, 마침내 믿을 수 없게도 내 입에서 그 곡의 가사가 리듬과 멜로디를 타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If there's one spark of hope
Left in my grasp......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순간, 정아가 슬며시 노래를 멈추었다. 결국 내가 노래를 이어받아 따라 부르게 되고 말았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눈을 감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에 집중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가슴 속에서 울려퍼지는 전율 때문에, 나도 모르게 들어올린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No, no no no no no I need you baby
I still believe that we can be together
If we believe that true love
never has to end
Then we must know that we will love again
그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도대체 어디까지 내 정신이 떠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정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옆으로 길게 누워 있었고 세복이가 내 한쪽 어깨를 어정쩡하게 받쳐 부축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앉아 있던 몸의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 쓰러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급체를 했을 때처럼, 머리가 피가 전혀 돌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끝까지 부른 거야?"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정리하는 내 눈에 정아의 휘둥그래진 눈이 들어왔다.
"언니. 세상에. 그런 목소리로, 그런 노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도대체 어디서 무슨 꼴을 당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정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