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말보로 리스트 12

# 12 어렵사리 빼돌린 말보로 리스트의 한 페이지

by Kalsavina

# 12 어렵사리 빼돌린 말보로 리스트의 한 페이지




본래 말보로 리스트는 그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주소만을 적는 것이 기본이었소. 그러나 리스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담배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선행 내지는 악행에 대해 많은 말을 해 왔소. 그 많은 말들이 향하는 소실점은 대부분 인생으로 압축되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부분에 관해 길게 늘어놓았다가는 쓸데없는 지면 낭비만 될 것 같아 그만두겠소. 단지,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그들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밝혀두리다. 더구나 그들은, 내가 어느 순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놀랄 만큼 우리에게 협조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보였소. 즉 그들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인 거요. 흔히 유식하게 오픈 마인드라고 하던가? 좌우지간 그렇게 되자 말보로 리스트 작성은 퍽 수월했기 때문에 나는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최대한 축약해서 적어넣은 거요.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말보로 리스트의 한 페이지를 들고 있소. 내가 빼돌린 유일한 내 피땀 흘린 작업의 흔적이지. 이 전화가 화상 전화도 아닌 이상 당신에게 이 종이를 보여 주는 건 무리일지 모르지. 그러나 당신에게 읊어 줄 수는 있소.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어야 해. 당신은 지금까지도 긴 시간을 참아가며 죽 내 말을 듣고 있었잖아? 이깟 종이 한 장 읊는 것쯤 못 참을 이유가 없지.

B시, 암안동 홍선분 씨(64). 생선 장수.

―끊으라면 끊지예. 하지만 담배까지 없으면 참말로 무슨 낙으로 살런가? 깝깝하네예.

J시. 두암동 배성익 씨(37). 직업은 무직.

―요 이 삼 년간간 끼니를 거른 적은 많아도 담배를 거른 적은 없는데.

K지방. 관성군 박동학. 씨(53) 농사.

―앞으로는 담배도 있는 놈들만 피우것구먼. 뭐시여?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그 필립쓰 아녀? 아따, 내 평생 외제 담배를 피워보는 날이 다 오는구먼. 젊은이, 고마워!

L시. 도원동 정황구 씨. (42) 일용직 노동자

―담배 그거 머할라고 피우노? 건강에도 해롭구만. 아니, 그렇다고 그걸 그냥 갖고 가나? 다시 주이소! 마 요새 경기도 안 좋고 일거리도 없어갖꼬 미치겠는데 그거라도 태와야지(태워야지). 머, 건강에 나쁘다 캐놓고 왜 피우냐꼬? 내 맘인기라!

Y시. 남양동 최근준 씨(28). 대학생

―아이디어가 기발해요.......제일 세금 많이 거둘 수 있는 아이템을 드디어 찾아낸 거예요. 누구 발상인지는 몰라도 아이디어 하나에 평생 먹고 살 길을 뚫은 거예요. 그 세금 나한테로 왔으면 좋겠다.

다시 B시. 광신동 이문주 씨(33). 슈퍼마켓 운영

―이제 담배도 못 팔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가격이야 오르거나 말거나 사 가는 사람들은 계속 사가는데요? 국민건강요? 아유 세금 때문에 그러는 걸 가지고 무슨 건강을 빙자해.......우리가 뭐 힘이 있어요. 올리거나 말거나 보고만 있는 거지.

다시 L시. 봉남동 심주현 양(24). 대학생

―그래도 담배 피우는 애들은 다 피워요. 여자들이요? 말도 마세요. 알고 싶으시면 저희 학교 화장실에 와 보세요. 칸칸이 다 굴뚝인데요 뭐. 다들 담배가격 올린다고 화 많이 내죠.

O지방. 합성면 최용동 씨(58). 농사.

―당최 이렇게 살아서 뭘 하것다는 것이여. 건강? 그려. 담배 끊고 건강해질 것이여. 그런데 건강해지면 누가 날 먹여 살린다덩가? 아니잖여? 나가 속에 울화통이 나서 더는 못 살것구먼. 살고 싶지가 않구먼. 기냥 요 담배나 원없이 피우고 죽어뿔 것이구먼. 두 갑 더 주소. 접때 한 번 피워봤는디 요것이 맛이 참말로 기차 불었구먼!

D시. 매천동 김미진 씨(25). 대학원생.

―가증스럽기는......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 피우는 사람을 무슨 벌레 보듯이 해요. 뭐가 그렇게 더럽다는 건지.......

S시. 충무로 성충현 씨(36). 잡지사 직원.

―난 몰라. 아니 나라에서 담배값을 올린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빨리 끊어야지. 아껴야 잘 살잖아.

K시. 홍임동 김춘수 씨(44). 공무원

―그게 바로 오버하는 거예요. 아니 그 돈 아끼면 잘 산다고 누가 그럽디까? 내가 그런 친구를 하나 알아. 담배 술 다 끊고 눈에 실핏줄이 하루에 두 번씩 터지게 일해서 1억을 모았어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과로사했어요. 그 돈 써보지도 못하고. 인간적으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폐암의 종말요? 그럼 담배 끊으면 폐암의 종말을 늦출 수 있답니까?

N지방. 오월면 정경미 양(17). 고등학생.

―알아요.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거, 그리고 전에 TV에 나와서 금연 프로그램 진행하신 그 분도 알고요. 그런데요. 저희 할머니가 마흔 살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셔서 지금 여든이 넘도록 담배를 피우고 계신데요. 아직 괜찮으시거든요........

역시 N지방, 오월면 윤혜지 양(18). 고등학생.

―그거 왜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해요. 담배값 인상요? 몰라요. 저하고는 상관없어요. 올려서 금연할 수 있으면 좋죠. 남한테 금연을 강요할 수 있냐고요? 있다고 생각해요. 내 건강과 직결되는 일이라면. 그냥 길 가는 사람한테도 강요할 수 있냐고요? 있다고 생각해요. 다 함께 사는 세상이잖아요. 남의 건강이라도 챙겨야죠.

역시 N지방 관은면 오영석 군(19) 고등학생.

―가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을 보거든요. 그런 사람들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 피우면 안 피우는 거지, 욕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근심걱정 없이 되게 편하게 사는 사람들인가 보다고 생각하죠. 제가 처음 담배를 배운 이유가 그거예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울 때 연기가 페를 타고 넘어가니까 가슴이 뻐근하더라구요. 그런데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니까 뭐랄까, 마음이 아프던 게 진정되었다고나 할까요? 고통으로 고통을 치유한 거죠. 이해하시겠어요?

대충 여기까지만 읽으리다. 아무래도, 이 작업의 특성이 그러하다 보니 말보로 리스트에 씌어진 사람들의 말은 흡연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아오. 그러나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려고 노력한 게 사실이오. 개중에는 담배와 전혀 무관한 하소연이나 설교로 나와 악 그리고 우리의 부하들을 진절머리나게 한 위인들도 몇몇이 있었다오. 그 중에서도, 비록 여기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담배 피우면 지옥간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떠들던 어느 독실한 교회 신자의 고함이 기억에 남소.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의 신념을 존중하오. 그러나 타인을 향한 그의 강요는 존중하지 않는다오. 이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품고 있는 신념을 바꾸려는 생각 따위는 아예 버려야 하오. 신념이란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그로 인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바뀔 수 있는 것이라오.

좌우지간 이 많은 사람들의 말은 그런대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었소. 그 중에서도 이 페이지의 가장 마지막에 적혀 있던 그 고등학생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소. 최소한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담배에 부여한 거요. 도대체 담배가 뭐지? 담배란 무엇인가? 신이 내려주신 재료를 가지고 인간이 만든 하잘것없는 피조물 아닌가?(이 말을 듣고 내가 종교인일 거라는 오해는 꿈에서라도 하질 말아 주오.)그런데 왜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스스로 없애지 못하고 이것에 지배당하는 것이오? 그가 내게 했던 고백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고통이 고통을 치유한다고? 당신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소?

작가의 이전글[중편] 말보로 리스트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