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Siberian Railway
사랑이 죽었을 때 나는 깨어났다.
한겨울 밤의 꿈 ―Trans Siberian Railway
제 의식은 잠들어 있었고, 그 잠에서 저는 매우 서서히 깨어났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흰 그림자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회색 그림자를 건너가듯이, 그리고 늪에 빠졌던 사람이 천천히 늪으로부터 솟아나오듯이 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가로질렀습니다. 저의 의식이 긴 터널을 빠져나온 이후에도 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가진 당신이라면, 아마 닫힌 저의 눈꺼풀 사이로 삐져나온 속눈썹을 포착하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래요. 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그건 저를 두려움으로 떨게 할 만큼 캄캄한 암흑은 아니었습니다. 어딘가에 환한 빛을 숨기고 있는, 물과 같은 그런 어둠이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은 채 제 몸에 와 닿는 감촉에 저의 나른한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제 몸에 닿아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제가 길고 좁은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텅 빈 기차의 객실 안에 있는 길고 좁은 의자였습니다.
눈도 뜨지 않았으면서 제가 빈 기차의 객실 안에 있는 의자에 누워 있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느냐고요. 글쎄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군요. 그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은 거죠. 물론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습니다. 제 귀가 저를 도왔죠. 귀를 닫을 귀꺼풀이 제게는 없었으니까요. 저는 제 발 아래에서 수십 개, 수백개가 넘는 기차의 바퀴들이 일사분란하게 달리며 내는 규칙적인 마찰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차의 동력원을 제공하는 연통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증기가 내는 힘찬 기적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들은 제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들이었는데도 제게는 이상하리만치 아득하게 들려왔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된 증기 기관차를 탄 채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한동안 어쩐지 친근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증기기관차가 만들어내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를 지켜보셨다면, 두껍고 무거운 코트를 입고 촌스러운 모자를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얹은 채 두 사람이 앉게 되어 있는 작고 좁은 의자 위에 누워 있는 저를 당신의 렌즈에 담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는 눈을 떴습니다. 천천히, 힘들여 눈을 떴죠.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져내려 얼굴을 찡그리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요.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 동공 속으로 들어온 빛은 아주 희미했고 제가 차지한 좁은 공간을 희석된 안개처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안개같은 빛이 완전히 눈에 익숙해질 때까지 얼마간 움직이지 않고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제가 일어나는 바람에 모자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오랫동안 눕혀져 있던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흐트러졌을 것이 분명하고, 눈에는 눈곱이 끼었지만,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옷매무새를 제대로 가다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멍하게 주위를 한번 건성으로 둘러보았을 뿐입니다. 저는 제가 처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평온한 상태였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조금은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기적소리에 맞추어 계속해서 귀를 자극하는 바퀴들의 규칙적인 굉음이 죽음을 노래하는 교향곡처럼 들렸던 탓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조용히 일어섰고, 몸을 돌려 두껍고 검은 커튼에 단단히 둘러싸인 창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창문은 너무나도 작았습니다. 옛날 당신이 만든 영화에서 본, 죄수들을 실어나르는 그 기차에 달려 있던 그런 작은 창문이었죠. 두꺼운 널빤지로 만들어진 그 작은 창문을 옆으로 밀어젖히지 않고서는 바깥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작은 창문에 손을 댔지만, 어쩐지 그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사실 환한 빛이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저를 해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아주 조금, 그 작은 창문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조금 열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조그마한 틈새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바깥 세계에 무엇이 펼쳐져 있었을까요. 하아, 제가 무심코 내뱉은 입김은 하얗게 얼어붙은 후 날개를 달고 저를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탁한 백색의 미묘만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거칠고 투박한 백색은 끊임없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를 거부한다는 강한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그러나 오랫동안 눈을 깜박이며 바깥을 지켜본 결과, 저는 제가 광활한 들판을 달리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아, 지금 혹시 당신이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저의 깜박이는 눈을 렌즈에 담아주세요. 설령 눈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부석부석한 저의 뺨을 담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그건 진심으로 감동적인 상황에 직면한 저의 꾸밈없는 표정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경이롭게 제 눈앞에 펼쳐진 유백색의 들판과 협곡을 바라보았습니다. 너무나 빨리 스쳐 지나갔지만, 저는 그렇게 드넓고 광활한 대지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잠들어 있는 듯 보이는 백색(만약 색깔 역시 잠들 수 있다면)의 눈이 그렇게 웅장한 땅을 포옹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가슴을 지녔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청록색의 침엽수림도, 벌거벗은 나무들의 광대한 군락도 하얀 눈의 포옹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절반쯤 마비된 채, 공허하게 지각신경이 전달하는 느낌만을 감지하던 제 머리에 희미한 욕망이 스며들었습니다. 호랑이가 보고 싶다. 왜 그랬을까요. 문득, 호랑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한순간 아찔하게 강한 섬광이 저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며 후려치고는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저를 보셨다면, 당신의 카메라로 그 빛을 잡아냈을지, 혹은 저의 찡그린 표정을 잡아냈을지 심히 궁금합니다. 저는 자꾸만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하염없이 창 밖의 장엄한 세상을 구경했습니다.
하아, 부질없는 입김이 또 한번 하얀 날개를 달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름모를 신이 제 소원을 들어주려고 친히 나서신 걸까요. 저는 호랑이를 보았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호랑이, 시베리아 호랑이답게 한층 옅은 빛깔의 황금빛 털과 그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검은 얼룩무늬가 잠시나마 저를 들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그 호랑이의 눈과 저의 눈이 마주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는 금세 저의 시야를 호랑이로부터 앗아갔습니다. 만약 당신이, 카메라를 가진 당신이 옆에 있었다면 당신에게 부탁했을 겁니다. 내가 호랑이를 목격한 그 짧은 시간, 걸어가는 호랑이의 눈을 보려고 주먹쥔 손에 힘을 주었던 그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해 줘요, 이렇게 말입니다. 그랬다면 필름에 각인된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호랑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또다시 달려가야만 했던 그 순간의 제 표정을, 당신의 카메라가 아닌 당신의 동공으로 각인해 달라고 부탁했을 겁니다.
하아,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보는 카메라 속의 영상은 단지 시간을 속일 수 있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영원은 없었고, 각인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를 간직한다고요. 무엇을 간직한단 말입니까. 세상에 영원한 것, 영원히 각인하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것들이 한 가지라도 있었다면 저는 이처럼 초라하게 외로이 혼자서 도망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슬픈 마음으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날개를 달아준 차가운 입김이 제 슬픔을 가지고 날아갔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내버리고 가는 제 모습이 아름다웠을까요. 저는 제 모습이 아름답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본 모든 것들, 호랑이의 등을 수놓았던 빛나는 검은 줄무늬마저도 모두 거짓말이었기를 바랍니다.
그 후 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설령 안다 해도 당신께 말할 용기는 없군요. 다만 이제 와서 궁금한 것은, 그가 저의 마지막 웃음을 기억해 주었을까 라는 어설프고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오래 전 먼 옛날, 그가 기차에 올라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흐릿하게 미소짓던 그의 동공에 제 모습이 박혀 있었을까요. 그가 울지 않게 하려고, 두 팔을 벌리고 몇 번이나 폴짝폴짝 뛰던 제 모습과, 혀를 내밀며 애써 그를 웃기려고 지어 보였던 우습고도 괴상한 표정들과, 입이 찢어질세라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제 모습을 기억할까요. 그때도 저는 길고 육중하고 촌스러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우스꽝스러웠던 이별의 순간을 우스꽝스러운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할까요. 저는 그가 웃었는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카메라로 제 모습을 담아주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태운 기차가 멀어져 간 후,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던 제 모습을 나중에라도 당신의 카메라로 복원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아직 스스로에게 그 말을 똑똑히 들려줄 용기가 없습니다. ‘네가 울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웃었던 거야.’ 그러나 울었건 웃었건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 이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아 있군요. 언젠가 당신이 읽어준 어느 프랑스 소설 속의 한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죄가 살아났으므로 나는 죽었노라. 저는 지금까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제가 아닌 저의 마음, 보잘것없었던 저의 사랑을 잃어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감정의 소중함을 인정할 수 없어서 저의 사랑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다시금 새로이 눈을 떴습니다. 사랑이 죽었을 때 제가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아, 또 다시 기적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다급하게 질주하는 바퀴들의 노랫소리가 철커덕거리며 들려오지 않습니까. 제 발밑에서 진동하는 그들의 고함소리, 그 힘찬 떨림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것을, 당신은 느끼지 못하십니까. 만약 느껴지신다면, 이 떨림을, 이 생명의 진동을, 이 힘찬 생명의 소리를......
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