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여자를 제게도 주소서

by Kalsavina

신의 여자를 제게도 주소서


1

내 나이가 어때애서어어~ 내 나이가 어때애서어어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에에에~



사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는 아니다.

79년생이니까, 올해로 만 서른여덟,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우길 수 있는 거지만, 이제 곧 속절없이 서른아홉이 되고 마흔은 금방이다. 불혹이라 불리는 나이. 왜 그 나이가 불혹이라 불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더 어렸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 흔하디흔한 광고용 멘트가 모든 의구심을 덮어 주었으니까.

물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 숫자에 불과한 나이가 불혹이라 불리는 나이에 가까워져 오는 동안, 거의 여자를 사귀지 못했다. 제대한 직후, 스물 두 살 때 정말 잠깐 사귀었던 여자는 그 잠깐의 기간 동안 내내 잠자리에서 콘돔을 쓸 것을 강요했다. 스물 일곱, 한창 욕정에 불타던 나이에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는 부모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지극히 하찮지만 나로서는 철저하게 불가항력의 영역에 속하는 이유로 파혼을 하고 떠나갔다. 그때 그 몇 번의 기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온전하게 행복한 섹스의 기억이다. 그리고 서른 세 살, 몇 번 직장을 옮겨다니며 오다가다 만난 열 살 연상의 누나는, 의욕은 충만했지만 아무래도 속궁합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넘치는 의욕만큼 풍만하지 못했고 나는 그녀의 몸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미련없이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 후로 여자를 안지 못하고 이 나이가 된 거다.

사랑하기 좋은 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여자에 대한 열정이 식은 건 아니다. 맹세코, 그건 나뿐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죽을 때까지 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가 불혹이라 불려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허심탄회하게 고백하자면, 건강이 문제였다. 술과 담배를 신처럼 추앙하고 마누라처럼 보듬으며 살다 보니 어느 새 몸이 야금야금 망가지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완연한 정력감퇴가 찾아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웬만한 포르노는 더 이상 내게 자극제가 되지 않았다. 좀 색다른 경험을 해볼까 싶어 좀 변태스러운 것들도 더러 찾아보기는 했지만, 역겹기만 할 뿐 내 비위에는 맞지 않았다.

사실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물론, 사랑하기 좋은 나이가 아닌만큼 연애하기 좋은 나이 또한 아니다.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어느 날, LCD액정에 대문짝만하게 등장한 여자 연예인의 얼굴을 여느 때처럼 무심히 바라보지 않고 찬찬히 들여다보던 그 어느 날. 나는 전에 없이, 견딜 수 없이 연애를 하고 싶어졌다.



2

우선 얼굴이 눈처럼 하얀 여자라야 했다.

딱히 까만 피부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하얀 피부의 여자가 취향이었지만, 정작으로 내가 원하는 하얀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도화지처럼 하얀 피부는 그 어떤 조건에 앞선 최우선의 조건이었다.

코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취향은 없지만, 주먹코나 들창코는 곤란했다. 매부리코는 당연히 절대로 금물이다.

요즘 게임 회사들이 앞다투어 내놓는 여자 캐릭터들을 방불케 하는 아련한 눈매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대체로 여자들의 눈이 못생겨 보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아몬드 라인을 그리는 적당한 크기의 눈이 좋다. 너무 크거나 작은 눈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입술.

다른 부위는 몰라도, 입술만큼은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는 부위였다. 색깔도 딱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그 색상이어야 했고, 입을 반듯하게 다물었을 때 보이는 라인 또한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라인이어야 했으며, 윗입술과 아랫입술 각각의 선과 두께 또한 정확하게 내가 정한 기준에 부합해야 했다. 이 기준만큼은 애매한 취향이 아닌 확실한 규정으로 만들고 싶었다. 결국 나는 크로키북과 연필을 산 후, 내가 원하는 여자의 입술을 그리기 시작했다.

십 년을 하루같이 정성 들여 그렸다. 내 이상형의 여자의 이상적으로 완벽한 입술은 족히 삼천 장의 크로키 북을 찢어날렸다고 생각될 정도의 연습을 반복한 후에야, 완벽하게 나의 취향을 충족하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단 한 장의 크로키로.




3

"신의 여자네."

문혁은 내 얘기를 다 듣자마자 픽 웃으며 괴고 있던 턱의 방향을 비스듬히 바꿨다. 처음에는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 얘기를 속으로 곰곰히 다시 되짚어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역시, 신의 여자야."

"물론, 나도 알아. 그런 여자랑 연애한다는 거,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깝겠지."

"아, 뭐 불가능하지는 않아. 돈만 있다면."

"돈? 그래, S그룹 회장이나 H그룹 회장쯤 되면 어느 여자인들 내 이불 속으로 못 부르겠냐? 그런데,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래, 군대도 안 갔다 온 햇병아리들이나 하는 그런 풋풋하고 싱싱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거잖아."

"그렇게 풋풋하고 싱싱할 필요는 없고."

"좌우지간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말하는 돈이라는 건 말이야......"

말을 잇기에 앞서 문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너하고 잘 맞는 귀여운 여자 하나를 네 입맛대로 성형시켜 줄 돈을 말하는 거야. 그렇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야."

"아아, 성형. 성형........"

"성형수술만 하면, 얼마든지 못생긴 여자도 예쁜 여자로 만들 수 있어. 네가 좋아하는 그 얄상한 라인의 레드립도 얼마든지 성형수술로 만들 수 있다고. 성형외과 의사를 왜 신이라 부르는지 알아? 그 좋은 기술로 뭇 여자들과 뭇 남자들에게 신의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에 신이라고 부르는 거야."

"......."

"주위를 잘 둘러 봐.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비해 얼마나 예쁜 여자들이 많은지."

"그러면 뭐하냐. 내 주머니에 들어와야 내 돈이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야 내 여자고. 신의 은총을 받은 역사가 있어야 신의 권능을 확인하지, 안 그래?"

"신의 응징을 받고 신의 권능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래, 너 말 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자가 생겨도 못하고 죽을 판이다. 신의 응징이 더 처절해지기 전에 소원 좀 이뤘으면 좋겠는데. 더 늦기 전에."

"음. 뭐, 도와주기로 말하자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응?"

문혁은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이윽고 싱긋 웃었다. 내 연배지만 나보다 훨씬 스마트하고 단정해 보이는 그는, 남자의 아름다움은 간결함과 단정함과 단순함에 있다는 어느 여류작가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기라도 하듯 한결같이 단정하고 간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턱을 괴었던 팔을 풀고 정색을 하며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요는, 신이 내려주신 여자랑 사귀고 싶다는 거잖아? 이 단순한 친구야."




4

문혁은 내가 그토록 애써 그린, 완벽한 이상형의 입술이 담긴 크로키북을 통째로 가져갔다. 워낙 해괴한 것을 골고루 수집하는 취향이 있던 사람이니, 그 크로키북도 어쩌면 자신의 컬렉션 목록에 넣으려고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댓가는 철두철미하게 되돌아오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 쪽으로는 분명하게 계산하는 법을 아는 친구였다. 세상만사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얼마 후, 그가 보낸 여자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지위에 있던 문혁은 발이 넓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들 중에는 과연 강남인지 청담동인지 모를 어딘가에 자리잡은, '성형의 신'으로 불리는 불세출의 성형외과 의사가 있었다. 한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반 은둔자인 나로서도 그의 이름을 한두번 쯤은 들어 보았을 정도이고 보면, 그 공신력만큼은 절대 의심할 필요가 없을 성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내게 온 여자들이었다.

물론, 어쨌든 즐기라고 보내 준 여자들이니까, 그냥 돌려보낸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여자들 중에, '너다!'하고 생각될 만큼 나를 설레게 하거나 가슴 뛰게 하거나 욕정으로 그놈을 불끈 솟게 하는 여자는 아쉽게도 없었다. 게다가 얼굴로 말하자면, 그 놈의 입술이 문제였다. 한결같이 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뽀얗고 해맑은 얼굴에 땡그란 눈을 가진 여자들이었지만 아쉽게도 입술, 그 입술만큼은 도무지 나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던 거다.

사실, 입술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내 정신을 잃게 할 여자를, 내 안에 숨어 있던 연애세포를 깨워 일으킬 여자를 찾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완벽한 입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데리고 자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문혁에게 말로 못다할 감사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철없던 이십대 시절 곤경에 빠졌던 문혁을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금전적인 도움도 아니었고 도움이라고 해 봐야 보잘것없는 수준의 도움이기는 했지만, 문혁은 늘 그때 일들을 잊지 않고 내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우리가 이 나이가 된 시점에서 아름다운 얼굴과 풍만한 몸매를 가진 신의 여자들을 잇달아 보내 준 것은 그 나름의 보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늘 그렇지만, 여자들을 올라타고 개처럼 헐떡거리는 동안은 머릿속에 잡다한 사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만 내가 곧 '중년'이 된다는 사실을, 한때 지구정복을 꿈꾸었지만 지금은 한갓 보잘것없는 되다 만 엉터리 예술가 나부랭이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거다. 뭐 어쨌든 중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길 생각은 없다. 정말 전혀 없다. 하지만, 내가 잠깐 걸터앉았다가, 혹은 끌어안았다가, 혹은 내 몸 아래 깔아눕혔다가 곧 내게서 떨어뜨려 놓은 저 여자들이 옷을 입는 걸 보면서도 '응, 그래. 옷을 입는구나. 아쉽다. 두 번은 더 해도 되는데'라는 생각 이상의 생각을 못하는 현실이 참 슬펐다. 신의 여자라면, 완벽한 여자라면 내가 애써 붙잡지 않아도 내 곁에 머무를 거라는 환상은 언제부터 내 머릿속을 점령한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신이 만든 여자는 정말이지 외모만큼은 완벽했다. 그래서, 그 완벽한 외모로 나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줄 거라 생각했던 거다. 그게 아닌 이상 그들은 신에 의해 새로이 제작된 마스크와 바디를 장착한 인형들일 뿐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반증에 불과하다.

그렇게 세 번째 여자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지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혁이 나를 찾아왔다.




5

"그 여자들의 얼굴을 네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내가 알 게 뭐야."

"다 신의 여자들이라고. 넌 지금 신의 여자들을 맛만 보고 돌려보낸 거야. 그거 알아?"

"물론 신의 여자들이겠지."

"뭐야? 그 비아냥대는 말투는?"

"내가 신의 여자를 보내달라고 했지 언제 신의 마네킹을 보내달라고 했냐?"

"마네킹?"

"다 마네킹들이야. 마네킹하고 무슨 사랑을 하란 말이야?"

"동네 최고의 미녀들을 갖다 안겨 줬는데도 쓴소리네 이 개자식이?"

"네 노고는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그 여자들은 신의 여자를 탄생시키기 위한 샘플 표본에 불과했어. 나는 진짜 신의 여자를 원했던 거라고. 신이 만든 여자들이 아니라!"

"하아, 역시."

문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내가 아는 그 이중성이 맞구나. 그 귀신같은 촉은 여전하네."

"뭐야? 그 빌어먹을 의사놈 솜씨로 만든 얼굴들이 아니었단 말이야?"

"맞긴 한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의 여자라고는 하기 힘들지. 사실은 이건 비밀인데."

문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오가는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고는 (우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쪽으로 머리를 굽힌 후 최대한 낮고 은밀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주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이 탄생하면, 제일 먼저 그 개자식이 맛을 보거든. 물론, 비용을 상당 부분 환불해주는 조건으로."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보낸 여자들은."

"그래, 신이 먼저 손대지 않은 여자들이야.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신의 여자들이 아니었던 거지."

"지금 장난해?"

"알았어. 진짜 신의 여자들을 보내 줄게."




6

문혁은 나의 가장 진실한 벗이었다. 가장 진실한 벗의 도리로 그는 약속을 지켰다. 앞서 찾아온 여자들보다는 좀 더 매혹적인 여자들이 둘 더 찾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손 한 번 대지 못한 채 그 여자들을 돌려보냈음을 고백해야겠다. 우선 첫번째 여자. 그녀는 그때까지 본 그 어떤 여자들보다 눈이 컸다. 왕방울만한 눈을 가진 그 여자는 내가 침대에 그녀를 눕히자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이윽고 얼굴이 눈물과 씻겨진 화장품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대체 왜 울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혹시 아무것도 모르고 왔어요?"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다 알고 왔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냥, 아저씨 얼굴을 보니까 좀 무서워서요. 죄송해요. "

"내 얼굴이 왜 무서워요?"

"실은 제가 어제 스릴러 영화를 보고 왔는데요. 그 영화에 나오는 연쇄살인범 역할을 맡은 배우가 아저씨랑 너무 느낌이 비슷해서......."

아하,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진짜 연쇄살인범도 아니고, 연쇄살인범 역의 배우랑 비슷하다고 이렇게까지 겁을 먹다니. 게다가, 그 어떤 말보다도 '아저씨'라는 호칭이 나를 화나게 했다. 진짜로 살의를 느끼기 전에 얼른 그녀를 내 집에서 내보내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두번째 여자.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도도한 느낌으로 문을 열고 성큼성큼 내 방의 거실로 들어왔다. 얼굴은 터무니없이 앳되어 보여서, 그 도도한 태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첫번째 여자와 달리 화장을 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정도로 피부톤이 애매했다. 하지만 그런 대로 원하는 느낌을 충족시켜 주는 여자라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유독 살이 없는 콧등을(아무래도 콧등을 집는 수술을 했나 보다)내 쪽으로 홱 돌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오랄은 안 돼요. 모든 종류의 오랄 절대 금지예요. "

"응?"

"콘돔은 싫으실 테니, 한번만 봐 드리죠. 대신 딥 키스 절대 안 되고, 후배위도 절대 안 돼요. 정상 체위로 삼십 분 안에 끝내 주세요. 이 조건을 지키지 않는 남자와는 절대 사귈 수 없어요."

"아아, 그래?"

"네. "

"미안하지만 오랄도 안 할 거고, 콘돔도 안 쓸 거고, 딥 키스도 안할 거고, 후배위도 물론 안 할 거야. 그렇다고 해서 정상체위로 삼십분 안에 끝낼 거냐고 묻는다면,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왜요?"

"그냥 너랑 안할 거거든. 그러니까, 그냥 그 문 열고 나가면 돼. "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도도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고 나가는 앳된 여자의 앳된 골반이 열린 현관문을 막 빠져나가려는 것을 본 찰나, 그녀에게 깜박 잊고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저기, 잠깐만!"

"뭐죠?"

"너랑 안 사귄다고. 그 말 하는 걸 깜박했네."




7

세번째로 찾아온 문혁의 얼굴은 숫제 우거지상이 되어 있었다.

"내 크로키북 돌려달란 말 안할 테니까. 얼굴 좀 펴."

"네가 이렇게 까탈스러운 인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이해하니까 이만큼 참을성있게 성실하게 여자를 조달한 거잖아 이 미친놈아! 그래, 그 여자들 중에 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가 단 하나도 없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

"무슨 뜻이야?"

"네 말대로, 신의 여자를 내려받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

"정작으로 신의 여자는 건드리지도 못해 놓고 무슨 소리야?"

"그냥 눈으로만 봐도 알아. 내가 원하는 신의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 아니라....."

"아 됐어. 더는 나도 힘드니까."

드디어 이렇게 문혁이 두손 두발 다 들고 내가 내린 미션을 포기하는가 싶었는데, 그는 안경알을 치켜올리며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달래듯 손짓하며 말했다.

"딱 한 여자 더 보내 줄게. 그야말로 진정한 신의 여자야. 네가 말하는 그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신의 여자니까."

"아직도 남아 있는 여자가 있었어?"

"실은 며칠 전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는데, 네 얘길 했더니 엄청 재미있어 하면서 꼭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네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널 보고 싶어하고, 어쨌든 진짜 신의 여자니까 네게 보내 줄게. 그 다음에는 나도 달리 도와줄 길이 없다. 네 소원은 다음 세상에서나 이루길 기약할 수 밖에."





8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여쁜 아가씨들과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새콤달콤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나의 주책맞은 소원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나의 건강과 나이를 의식해서다. 여기에서 더 나이가 들면, 나의 주책맞은 소원은 이루어진다 해도 그리 모양새가 좋지 못할 터였다.

아직은 나 또한 남자주인공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근사한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으로 열연해보고 싶었던 거다.

더 늦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지만, 어째서인지 다음 여자를 맞이하러 현관으로 나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침내 내키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문이 사뿐히 열리며 몹시 평범한 느낌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온 순간, 나는 넋을 잃었다.

지극히 평범한 키, 대략 160이 채 안 되는 정도의 키에, 그리 마르지 않았지만 딱히 토실토실해 보이지도 않는 체구를 가진 그 여자는 기가 막히게 예뻤다. 연예인처럼 화려한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는 뜻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무척 정감 있게 생긴 그 얼굴의 어디에서도 신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눈은 외꺼풀이었지만 그리 작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에 도자기처럼 희지 않지만 그런대로 화사한 피부를 지녔다. 그리고 입술, 내가 원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내가 미처 그려내지 못한 새로운 나의 미학적 기준을 확립해 줄 새로운 입술의 형태가 나를 향해 살포시 미소짓고 있었다. 다리에 적당히 달라붙는 면바지에 카키색 야상과 하얀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그러모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의자를 권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눈이 예쁘게 가늘어졌다. 아, 바로 이 여자다.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제가 누군지 아시죠?"

"네? 네. 아니요. 모릅니다."

"음, 사실은요. 제가 B 성형외과 원장의 와이프예요. 지금까지 그 사람이 성형해 준 여자 다섯 명을 다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고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다 그냥 돌려보낸 건 아닙니다."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그렇다. 문혁이 말한 진정한 신의 여자라는 게 바로 이런 뜻이었다. 신의 부인이니, 더 이상 진정한 신의 여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전처나 후처가 있지 않은 이상은. 그런데 가만 있자. 이 사람이 그 성형외과 원장놈, 온 세상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그 신의 진정한 여자라니. 맙소사.

이 여자랑 무슨 연애를 하란 말인가? 연애는 고사하고 침대에도 못 끌고 들어갈 여자가 왜 여길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나와 맞대면을 하게 된 그 여자를 욕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드디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의 여자를 만났다는 뜻이다. 신의 와이프라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물론, 다섯 명 중에 두 명을 그냥 돌려보내셨다죠. 그 두 명 다 일찌감치 방송 데뷔를 준비중인 신인 여배우인데 그런 여배우들을 다 돌려보내셨어요?"

'그 주제에'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깨달은 나는 웃음을 참으며 반문했다.

"원장님 사모님 치고는 좀 어려 보이는데요."

"피부에 좀 신경을 썼죠. 그리고 제가 그 사람의 조강지처는 아니라서요. 아시다시피 신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니까요. 단지 법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을 뿐이죠. 전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에요."

"그렇습니까?"

"네. 음, 그래서 말인데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뭘요?"

"왜 남의 병원에서 성형수술한 여자들을 다섯 명이나 불렀다가 돌려보냈냐고요."

"그거 물어보시러 온 겁니까?"

"뭐 다른 것도 좀 궁금하지만, 일단은, 그래요. 그게 궁금했어요."

"그냥 돌려보낸 건 아닙니다."

"알아요. 둘은 그냥 돌려보내고 셋은 그냥 하룻밤 즐기고는 돌려보냈죠. 그냥 돌려보낸 둘은 내 남편과 잤던 여자들이고요."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문혁 씨한테 들었거든요. 거기까지만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 못했네요."

"뭘 알고 싶으신데요?"

"왜, 하필, 그 사람이 손댄 여자들만 골라서 데려오라고 한 거예요?"

"그야, 솜씨가 좋으니까요. 기가 막히게 잘 고쳐 놨더군요. 정말 경이로운 솜씨였습니다. 완벽한 제 이상형들이었죠."

"솜씨라는 건, 성형 기술을 말씀하시는 거죠?"

"당연하죠. "

"아아, 이제 알겠네요. 좀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가요?"

"아니 뭐 그만두죠. 어차피 남자들이란, 열 몇 살만 넘어서면 죽을 때까지 그 생각만 하는 족속들이니까. 서른아홉 중년 아저씨라고 뭐가 다르겠어요?"

"이거 보세요, 사모님."

하마터면 아가씨라고 부를 뻔했다.

"연세가 어찌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스물 아홉요."

"네, 스물 아홉 꽃다운 나이의 사모님, 제가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서른 아홉 먹은 노총각은 TV에 나오는 아이돌 같은 스무 살 아가씨랑 연애하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 놨습니까?"

"물론 아니죠. 그런데요."

"그런데요?"

"연애를 하실 거면 좀 진작에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 나이에 연애라뇨? 모양새 빠지게시리."

"그래서 사모님은......"

너는 서른 아홉 되면 연애 안 할 거냐고 되물으려다 그녀가 유부녀임을 상기하고 얼른 말을 삼킨 나는 다시 맞받아칠 말을 떠올렸다.

"제 나이가 연애를 하면 안 되는 나이다 이 말씀이시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좀 어정쩡하죠. 불혹 목전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불혹 목전에."

"기분 나쁘시죠? 기분 나쁘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별로 기분 안 나쁜데요."

"그래요?"

사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신의 여자는 비록 까칠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리따운 장미에 박힌 가시 정도로 고이 참고 넘어가 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좀 찔려서 피가 난다 한들 어떤가. 상처 좀 입었다고 울고불고 떼쓰며 소독약이며 반창고 찾을 나이는 지났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젊은 날 꽃다운 이십대 시절 뭐하다가 이제 와서 연애 타령이냐고요? 완벽한 이상형, 운명의 상대자, 하늘이 점지한 인연 뭐 그런 거 믿고 기다리다 허송세월하며 청춘 다 흘려보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연애 좀 해 보고 싶어서 혁이한테 부탁 좀 했는데, 역시 그 친구는 절 실망시키지 않았죠."

"그러면, 상대를 찾으신 거예요?"

"그런 것 같네요."

"다 돌려보내셨잖아요?"

"지금 제 눈 앞에 있잖습니까?"

순간 신의 여자가 내게 지어 보인 그 표정은, 살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표정이었다.




9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세상의 모든 '달고 나온' 루저들-나를 포함한-의 절실한 욕망에 대해 떠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신의 여자는 참을성있게 내 일장연설을 경청했고, 마지막에 내가 나와 연애할 생각 없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요."

"왜요. 남편이 있어서?"

"물론 그것도 이유지만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은, 남편 말고도 따로 애인이 있거든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애인 하나 더 만드시죠?"

"곤란해요. "

"양다리가 싫으시다면 그냥 애인을 저로 갈아타시는 방법도 있는데요."

신의 여자는 딱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몹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딱 이 년만 더 젊었어도, 이렇게 간절하게 그녀에게 매달리는 나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며 그녀를 매몰차게 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개도 안 물어갈 자존심이나 챙겨가면서.

"사실, 제 애인은 제가 남자랑 자는 걸 너무나 싫어해서."

"네?"

"아, 죄송해요. 사실은 저, 레즈비언이에요. 그러니까, 제 애인이, 여자거든요."

"아아......."

한 달 전쯤에 본 어느 영화에서 분명히 그런 대사를 들었다. '이 세상의 예쁜 여자들은 왜 죄다 레즈비언이냐'고.

"그냥 제가 싫어서 핑계를 대시는 거라면, 굳이 그런 핑계는 안 대셔도 되는데."

"어머, 사실인걸요. 증거도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신의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와 자신의 애인이 함께 찍은 사진을 액정에 띄운 후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휴대폰은 무려 아이폰 X 였다.

"옆으로 넘기시면 더 야한 사진들도 보실 수 있어요."

몇 장을 옆으로 넘기며 '더 야한 사진'을 보다 보니,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으로 보이는 그녀의 그 애인이라는 여자의 입술이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 완벽한 입술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단 무시하기로 하고, 다시 신의 여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애인분 입술이 예쁘네요."

"그렇죠? 저도 저 입술에 반해서 사귀게 된 거예요. 어머, 저랑 감각이 통하시는구나? 어때요? 연애는 못해도 우정은 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나는 서글픈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요? 유감이네요."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연애하는 것까지는 막지 말아 주십시오."

"뭐 그러시든지요."

"또 만나뵐 수 있을까요?"

"힘들 것 같네요."

"그건 왜죠?"

"저 다음 달에 유럽으로 가거든요. 제 애인하고요. 남편 몰래 도망갈 거예요. 물론, 비밀은 지켜 주시리라 믿어요."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만,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같이 자 달라는 부탁이라면......"

순간 그녀가 말을 어물거렸고 그런 그녀를 보는 내 표정이 구태여 거울을 보지 않아도 쓴웃음을 짓고 있을 건 분명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

"전 거절하려던 게 아니었는데요. "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다른 여자들이라면 몰라도 이 여자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골치아파질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또 다시 내 앞에 놓인 잘 차려진 밥상을 뒤엎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이십년 세월을 허비해 놓고, 이제 와서 또 다시.

이건 내 탓이 아니다.

빌어먹을 엿같은 내 팔자가 그런 거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이상형이라도 레즈비언은 싫습니다."

아,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그런 머저리같은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제서야 신의 여자는 굳어 있던 표정을 약간 풀며 웃어 보였다. 내가 입힌 상처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텐데도 그녀는 오히려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

"죄송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안심하시라는 뜻으로 한 말이니까요."

"그래서, 부탁하실 게 뭔가요?"

안도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내가 한 그 빌어먹을 거짓말이 그녀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레즈비언이 아니라 에이즈 환자라 해도 그녀가 나를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는 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나를 지독한 아픔으로 몰아넣었다. 신의 여자의 남편인, 그 세계적인 솜씨를 가진 성형외과 의사는 비록 이 세계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존재이긴 했지만, 그 또한 자신이 정성들여 헤집어 놓은 인간의 표피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터였다. 그가 건드리지 않은 인간의 표피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마취주사 따위가 결코 통하지 않을 이 지독한 아픔을 그가 알 리 없다. 나는 마침내 입을 우물거리며 내가 놓친 기회를 주워담을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완벽하게 날려 먹었다.

"댁의 애인분 입술이, 제가 찾던 이상형의 입술입니다. 실은 제가 입술 수집가라서요. 정확히 말하면, 입술 자체가 아니라 입술의 형태만 수집하는 거지만. "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역시 이렇게 만난 내 이상형의 입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찍은 두 분의 입술 사진 한 장씩만 전송 부탁드립니다. 싫지 않으시다면요."

"어머, 아니에요."

신의 여자는 이를 드러내고 생긋 웃어 보였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입술이죠?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휴대폰 번호 불러보세요. 카톡으로 보낼까요? 아니면 페북 메신저로 보낼까요?"




10

세상은 실로 불공평하다. 하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허물어져야 할 만큼 절망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신의 여자를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낸 후, 나는 내가 겪은 일들, 즉 내가 한눈에 사랑에 빠진 여자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과연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문혁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분명 현실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느낌에는 그게 꿈이었던 것 같다.

그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문혁의 도움으로, 내가 막 사랑을 시작한 순간 나를 떠나간 내 진정한 연인이 찍힌 서너 장의 사진을 손에 넣었다. 다행히도 그 빌어먹을 그녀의 동성 연인은 같이 찍혀 있지 않은, 오롯이 그녀만이 담긴 사진이었다. 화질도 좋았고, 그녀의 얼굴이 크고 선명하게 찍힌 그 사진은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불혹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불혹의 나이가 되면서 나에게 중요한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하나는 병이었다.

결국 몹쓸 간경화라는 놈이 나를 침범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내가 관리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인 모양이지만,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술과 담배를 끊어가면서까지 간경화를 치료할 생각은 없다. 이따금 고향에 계신 모친이 달려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내려가실 때만 잠시 치료를 받는 시늉을 할 뿐이다.

그래도, 그녀를 떠올리면 행복하다.

이 삭막하고 현기증나는 세상에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걸로 충분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난 이후, 나는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더 이상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간절하게 원하는 게 이루어지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생일 수 없다. 꿈은 꿈으로 남겨둬야 하는 거다.

다른 하나는 종교다.

본래 불교도였던 집안과는 별개로 철저하게 무신론자였던 나는, 얼마 전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 착실하게 성당에 다니고 있다. 이제 와서 신을 믿기 시작한 거냐고 묻는다면, 미쳤냐고 되물어주고 싶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그 분이 네 병을 고쳐 줄 거라는 헛소리 또한 믿지 않는다.

그런 것 때문에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 아니다.

물론 떠나간 신의 여자를 떠올리면 행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역시 내 현실과 맞닿아 있는, 내 피부와 맞닿아 있는 존재와 함께 누릴 행복이 필요하다. 때마침,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길 건너편에 새로 생긴 성당에 신의 여자를 닮은 어여쁜 여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몹쓸 병이 그저 나를 괴롭히며 덧없는 목숨을 고통 속에서 질질 늘어지게 할지, 아니면 생각보다 깔끔하게 나를 끝장내 줄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뉴턴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고, 남자란 내일 죽음을 맞이해도 오늘은 여자를 찾아다니는 존재다. 살아 있는 한,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달리 뭘 하며 살아가겠는가.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래서,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병원 대신 성당에 가서, 하얀 레이스 머릿수건을 쓴 그녀들 가운데 나의 운명이 될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슴 설레며 신이 아닌 그 어느 정체모를 존재에게 간절히 기원하기로 한다. 내가 마흔다섯이 될 때까지만.

신의 여자를 제게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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