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13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13



강인의 집에서 이러한 분란이 일어났던 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사위가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강인은 라이터와 담뱃갑을 포함한 모든 소지품과 더불어 주사위가 유경의 방 화장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에게는 주사위 따위보다 백 배는 골치아픈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민효였고, 정확히 말하면 민효의 낙태였다.

민효의 고백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그는 일종의 죄책감과 유사한 종류의 슬픔을 느꼈지만 그러한 마음은 별로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효의 예상대로 그가 그녀를 뻔뻔스럽다고 생각하거나 경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는 마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는 민효가 그 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지 않을까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아이스크림이라도 갖다주는 게 훨씬 낫다. 민효가 만약 해 달라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목걸이나 반지라도 샀을 테지만, 민효는 아이스크림 이외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강인은 약간 의아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군소리 없이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날랐다.

확실히 아이스크림은 두 사람의 관계 회복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대신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의 실체는 오히려 더욱 확실해졌다. 이 벽에 대해서는 민효가 오래 전에 그가 믿고 따르는 강인의 아버지 강태규 박사에게 한 말을 그대로 옮길 때 그 실체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희는 서로를 잘 몰라요. 그 때문에 서로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요. 우리는 제각기 자기 자신들만을 지나치게 존중하기 때문에,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자존심을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민효의 생각에 따르면, 강인은 병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민효 역시 그렇다. 따라서 서로 보호막을 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게다가 유리 같아서 투명하지만 어느 쪽이든 손으로 그걸 깨야 하는데 깨는 쪽은 손에 피를 흘리게 된다. 게다가 파편을 청소해야 할 책임도 어느 쪽이든 한 쪽이 다른 쪽에게 떠넘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결국 싸워야 한다.

그러나 강인에게는 할말이 없겠는가? 그애(민효)는 내게, 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라고 말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나(강인)는 마음을 가진 존재에게 절대적인 애정을 기울일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돌보다도 불확실한 것이다. 그애는 강윤이 그렇듯 내가 그애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목표를 성취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나는 오로지 이기적인 욕망과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여 왔다. 민효는 그걸 잘 안다. 슬프게도 그녀는 낙태로 인해 나를 미워하게 된 것 같다. 있었다가 없어진 아기의 존재가 나를 얼마만큼 깊이 괴롭히는지 그애는 모르는 것 같다. 아기를 뱃속에 넣고 있던 그애는 자기가 정말 아기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애가 낙태를 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애가 나를 미워하든 경계하든, 아니면 그애가 강윤에게 말한 대로 ‘나를 적으로 삼든’ 간에, 그 모든 행동들은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그걸 아는 나는 마음놓고 그녀에게 냉혹한 짓을 할 수 있다. 냉혹한 행동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는 필요한 행동이다. 나는 뼛속까지 냉혹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리 복잡한 인간도 아니다. 나는 복잡한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노력해서 획득해야 했던 모든 특질들을 강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인 양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때때로 그 녀석이 나와 같은 시간에 한 뱃속에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물론 태어나기 전 몇 분은 제외해야겠지만). 나는 모든 에너지를 한 점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강윤의 무심함을 부러워한다. 이 모든 변명들을 매순간 나 자신에게 되풀이하면서 나는 태양처럼 웃고 어깨를 움츠린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웃음을 보지만 내 어깨를 보지는 않는다. 언젠가 내 품에 안긴 민효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네 이름을 사랑해. 나는 그녀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내 이름을 잘못 지으셨다. 나는 강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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