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14
진호는 언젠가 지나가는 말처럼 지나와 은하에게 ‘강인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 8시 50분. 디아이 셀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직후 클럽을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디아이 셀 멤버들의 사이에서 기어코 그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말은 클럽 맨 뒤에서 그들의 공연을 끝까지 지켜본 그라이아이의 칠득이가 처음 꺼낸 말이었고, 말 꺼내기가 무섭게 용환이가 반박했지만 그도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자리에 강인은 없었다. 디아이 셀 멤버들은 K클럽 2층(옛날 K클럽의 위치)에 자리잡은 나인티나인에 있었고, 강인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관객을 만나느라 여전히 지하에 있는 K클럽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칠득이는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부산스럽게 지껄였는데, 주위를 떠들썩하게 하면서도 결코 주책스러울 정도로 경박해지는 법이 없었다. 그의 장점 아닌 장점이라 할 만했다.
“오늘 니네들 공연 보는데 말이야. 어떤 여자 관객이 그러더라. ‘내가 여길 드나드는 건 순전히 강인 목소리 때문인데, 요즘 느낌이 이상해. 원래 굉장히 애절해서 듣고 있으면 눈에 보이는 사람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 그런데 요즘은 달라. 느낌이 틀려. 요즘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되게 무서워. 노래라는 행위를 통해 막 화풀이를 한다는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더라. 그 여자 관객, 누군지 몰라도 아주 정확하게 짚었어. 내가 하고 싶었던 말 그대로야. 물론 나라면 표현을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나는 말이야. 그 놈 목소리가 좀 병적으로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 같아. 자기가 자기를 통제 못하는 것 같단 말이야.”
“형은 왜 또 트집이야. 나는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맨날 강인하고 ‘목소리와 목청에 관한 강연’주고받으면서 서로 아웅다웅이더니 이젠 자기보다 인기있다 싶으니까 노골적으로질투하는 거야 뭐야.”
“야, 너 지금 인신공격하는 거야 뭐야. 너 내가 강인 목소리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래?”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기묘한 관계가 존재한다. 칠득이와 디아이 셀의 투톱인 용환이와 강인과의 관계 역시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관계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저변에 깔린 감정의 본질은 애정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인 부분만 설명하자면, 칠득이는 이미 이 바닥을 떠난 지 오래인 강윤을 맹목적으로 옹호했고, 반면 용환이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강인을 옹호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칠득이와 용환이 사이에는 일종의 견제 심리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상대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상 서로 지극히 아끼는 관계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공존이라는 표현까지도 서슴없이 쓸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 유대 관계가 탄탄했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칠득이와 강인이 그런대로 친근한 관계인 데 반해,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윤과 용환 사이에는 엷은 적의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진호가 나중에 자신의 애인인 은하에게 했던 말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쨌든 강윤과 용환의 관계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 어떤 관계이든 간에 기본적으로는 동지 의식을 지닌 데 반해, 이 두 사람은 묘하게도 서로에게 일종의 견제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경계심을 깔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아하면서도 부러워하잖아. 그리고 내가 듣기에는 강인 목소리 달라진 거 하나도 없다니까. 이거 왜 이래?”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진호가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칠득이 형 말을 무시 못하겠어. 내 느낌도 그래.”
용환이는 방금 전까지 스테이지에서 자신과 사이좋게 보조를 맞추던 친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맥이 풀리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치켜들어 보였다. 그는 의자 뒤쪽 벽에 세워둔 자신의 베이스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사실은, 사실은 내가 요 얼마 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아, 미치겠네.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본인한테 물어봐도 도통 신경 끄라는 소리밖에 안 하니........”
“아마, 장유경이 약속을 안 지켜서 열받아서 그런지도 모르지. ”
칠득이가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구며 말했다. 그러자 진호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다가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아니면, 며칠 전에 강인 집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강인은 그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무슨 일?”
때마침 은하가 나타났다. 진호 옆에 앉아 있던 용환이를 밀어내고 진호의 옆구리에 매달리다시피 앉은 은하는 진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채자마자 즉각 자신이 나서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아, 그 아이? 참 웃기지. 그날, 강인 때문에 내가 화나서 K클럽을 뛰쳐나간 날 있었던 일이에요. 민효한테 가서 진호랑 셋이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찾아와서는 이상한 말을 잔뜩 하더니 난데없는 꼬마 계집애랑 돈을 놓고 갔지 뭐예요. 그 돈 꽤 많아 보이던데. 그때 강윤이 그 애를 자기 딸이라고 말해서 우리 모두 뒤집어질 뻔했어요.”
“강윤 딸?”
일동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여간해서 입을 열지 않는 드러머 헌수조차 입을 크게 벌리고 우렁차게 외쳤기 때문에 다른 탁자의 손님들은 물론이고 카운터에 앉은 계산원마저 그들을 쳐다볼 정도였다.
“그거야 농담이었죠. 하여간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본데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질 않더라구요. 뭐, 강윤이 어떤 사람을 구할 뻔했는데 구해내질 못했다나? 그리고 그 꼬마가 그 사람 딸이라던가 아니라던가? 그리고 뭐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가 어쩌고 하던데 난 잘 못 들었어요. ”
“그런데 그게 강인 목소리가 이상해진 거하고 뭔 상관이라는 거야.”
용환이가 투덜거렸다.
“그 녀석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홀려. 그 음색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우렁찬 목소리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허스키하거나 굵고 거친 음색도 아니야. 그 녀석 자기 목소리를 지금처럼 다듬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진짜로 피 토한 적도 있다고. 그런데도 듣고 있으면 감정 이입이 된단 말이야. 하다못해 나처럼 냉정한 인간조차도 듣고 있으면 심란해져서 베이스 에프 코드 만들기도 힘들단 말야.”
“그래도 계속 듣고 싶지? 나이에 안 맞게 씁쓰름한 음색을 낼 줄 알아 그 자식. 하긴 원래부터 그 자식이 가끔가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땡고함을 간간히 치긴 하지만, 가슴이 뜨끔하게 날이 잘 드는 칼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목소리에 악의(惡意)가 섞이는 느낌은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자기 문제를 노래에까지 연관시킨다거나 하는 바보같은 짓을.....”
“바보같은 짓이 아니야. 자연스러운 거야.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자기 심리나 신체 컨디션이 목소리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나는 지금 목소리 그 자체보다도 느낌을 가지고 말하는 거야.”
“알아. 그래서 너도 요즘 인이가 민효 씨랑 사이가 나빠진 건가 하고 걱정하는 거지?”
“아예 민효 얘길 하는 것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듣다 못한 은하가 짜증을 냈다.
“우리가 지금 강인 걱정하고 있을 군번인가? 걔 요즘 왜 그런대요? 듣자니 집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면서요? 그러니 자기 집에 어린애가 굴러 들어왔는지 호박이 굴러 들어왔는지 아무것도 모르지. 부모님이 계시던 때하고는 전혀 달라. 본색이 드러나잖아.”
“내 참. 강인도 다 알아. 자기 집에 누가 와 있는지 다 안다고. 내가 얘기했어. 그 녀석 도 다 나이디를 본 모양이더군.”
“다 나이디?”
“그 꼬마 이름이래.”
이 때 가만히 일동의 얘기를 듣고 있던 헌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디아이 셀의 드러머였다.
“아까 전에, 은하씨가 뭐라고 그랬던가요?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요?”
“예. 난데없이 강인 집에 다녀간 괴한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죠. 근데 그건 왜요?”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헌수가 입을 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마우스 지퍼>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가 무슨 얘기를 꺼냈다 하면 모두들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었다.
“전에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그 주사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그 주사위가 복사해서 전달한다고 하더라고요. 주사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복사할 수 있다고 했어요. 나도 그때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칠득이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얘기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던 괴소문이야. 그 주사위에 옮겨진 기억을 받는 사람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자신이 남의 기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더군. 직감적으로 말이지. 그리고 그게 누구의 어떤 기억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해. ”
“중요한 건 강인의 집에 찾아왔던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거죠.”
“신경쓰지 마. 그런 건 말 그대로 헛소문이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잖아.”
칠득이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재떨이에 물을 들이부었다. 은하는 입을 삐죽거리며 칠득이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주사위가 실제로 있다면 골치 아파질 거야. 너도 나도 그걸 이용해서 자신과 상관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기를 쓸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