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15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15




무심결에 냉장고를 연 강인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모양도 색깔도 제각기 다른 아이스크림 통이 포장 하나 뜯어지지 않고 그대로 냉동고 안에 쌓여 있다가 열린 문 밖으로 우당탕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강인은 그 아이스크림들이 자신이 사 온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민효에 대한 죄책감과 자기 양심의 상징과도 같았던 아이스크림들이 돌처럼 꽁꽁 얼어 무더기로 그의 발등에 떨어지자 그는 화가 났다. 그는 2층에 있는 민효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문이 약간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강인은 문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너 무슨 생각.....”

민효는 강인을 보자 조용히 입술에 손을 갖다댔다. 깨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불을 끄고 작은 스탠드 하나만을 켜 둔 채 자신의 침대에서 잠든 다 나이디를 지켜보고 있었다. 강인은 민효의 침대로 다가가 잠든 계집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민효는 창가로 끌어다 놓은 의자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노란 스탠드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진한 음영을 만들었다. 흡사 영화에 흔히 나오는 마귀할멈 같은 점장이 노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아이의 왼손 손바닥을 봐. 왜 내가 그 아이를 다 나이디라고 부르는지 알 거야.”

강인은 반쯤 주먹을 쥔 아이의 왼손을 펴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아이의 손을 놓고 자리를 옮겨 민효가 앉은 의자 바로 앞에 위치한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굽혀 민효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스크림 하나도 안 먹었더군. 왜 그랬어?”

민효는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렇게 많이 먹지 못해.”

“그런데 왜 계속 사 오라고 한 거야?”

민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반쯤 감았을 뿐이었다. 강인은 옆으로 슬슬 미끄러지는 민효의 어깨를 잡아 벽에 붙였다. 민효의 뒤통수가 뒤에 있던 창문틀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강인은 민효의 입에 자신의 코를 바싹 가져갔다. 술이라도 마신 게 아닌가 싶었지만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너 혹시 약 먹었어?”

“약? 무슨 약?”

“약 먹은 게 아니면 왜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헤롱거려?”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럼 좀 자든지.”

“이 애 옆에서는 못 자. 그런데 인아. 물어볼 게 있어. 네가 그 여자한테 받기로 한 그 노래, 받았어?”

“아직 안 받았어. 그건 왜?”

“그럼, 내가 준 주사위, 그거 지금 가지고 있어?”

“무슨 주사위?”

“전에 내가 너한테 꼭 가지고 있어달라고 말한 것.”

강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신신당부하며 자신에게 맡긴 주사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그때 입었던 옷들이 모두 유경이 누나의 아파트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보나마나 그 주사위도 옷 속에 같이 들어있을 터였다. 적어도 자신이 잃어버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주사위 좀 돌려 줘.”

“내일 돌려 줄게.”

“왜? 지금은 안 돼? 지금 너한테 없구나?”

“그래.”

“장유경, 그 여자한테 가 있지?”

말 끄트머리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강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돌려줘. 지금 당장.”

“내일 돌려줄게.”

“거짓말 하지 마. 잘 가지고 있으라고 했는데, 결국 그 여자 집에 내버려두고 왔지? 그 주사위가 내 건 줄 알아? 그거 윤이 거야.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알았어. 죽어도 돌려줄게. ”

민효의 목소리는 나이디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나직했지만 그래도 역시 악을 쓰는 목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강인은 민효의 턱을 붙잡고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오늘 정말 예쁘게 보인다.”

“조명발이지.”

“내 방에 가자.”

“주사위 돌려 줄 거야 말 거야?”

“윤이 거라며? 꼭 찾아서 돌려줄게. 약속해.”

“내 거였으면 안 돌려줄려고 했지?”

“그래. 어쩔 거야?”

“같이 안 잘 거야.”

강인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일으키려 했다. 민효는 강인의 팔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안 자! 같이 안 잔다고! 그 뿐인 줄 알아? 나갈 거야. 집 나갈 거라고. 멀리 가서 다시 안 올 거야. 찾지도 못하는 곳에 꼭꼭 숨어버릴 거야.”

“그래 숨어 봐. 찾아내면 이 예쁜 다리 두 쪽 다 분질러서 걷지도 못하게 해 줄 테니까!”

그러나 말 끝에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나이디가 깨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강인은 기어이 민효를 일으켜 떠메다시피 안아서는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오랫동안 비워 둔 탓인지 빨지 않고 내버려 둔 걸레같은 냄새가 벽 여기저기에서 배어나고 있었다. 강인이 곱게 개켜진 이불 위에 민효를 쓰러뜨리자 그녀는 반쯤 일어나 앉은 자세가 되었다. 그는 민효의 팬티를 끌어내린 후 그녀의 희고 긴 두 다리를 벌리며 천천히 그녀의 위로 몸을 눕혔다.

“진짜 분질러 줄까?”

민효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강인은 오랫동안 눈을 감고 민효의 입술과 혓바닥이 자신의 입술과 혓바닥에 가져다주는 감촉을 음미했다. 민효의 폐로부터 나온 이산화탄소가 강인의 폐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의 호흡을 공유했다. 이런 감각은 없다. 장유경에게서도, 그리고 다른 어쩐 여자와 잔다고 해도, 달착지근하게 몸을 달구는 이런 감각은 없을 거다. 이렇게 사람을 헷가닥 돌아버리게 하는, 이렇게 미치게 애절한 감각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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