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17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17



민효가 나이디에게서 받은 느낌들이야 어쨌든 간에, 적어도 강인이 주사위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주려고 할 것이라는 그녀의 확신은 그런대로 옳았다. 아니 오히려 집을 나가 버리겠다던 그 협박이 주효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경의 아파트를 찾아간 강인은 그녀에게 키스하기에 앞서 곧장 자신이 벗어놓은 옷 속에 있던 소지품들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왜? 뭐 중요한 거 빠뜨리기라도 했어?”

현금카드가 든 지갑. 십원짜리 동전 세 개, 백원짜리 동전 두 개, 지뽀 라이터, 담배가 두 개피 정도 남은 담뱃갑, 슈퍼마켓에서 담배를 사고 받은 영수증, 집 열쇠. 그게 전부였다. 이쯤 되자 강인은 유경에게 싫어도 자신이 찾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혹시......주사위는 없었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네. 놋쇠나 뭐 그런 종류의 금속으로 되어 있고, 1부터 6까지 숫자가 새겨져 있고, 아니 숫자가 아니라 점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고....아무튼 주사위....”

유경은 강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픽 웃었다. 강인은 그녀의 웃음에 그만 기분이 상해 버렸다.

“이걸 찾는 거지?”

유경은 주사위를 내밀었다. 그러나 강인이 주사위를 향해 손을 내 뻗은 순간, 그녀는 폈던 손바닥을 잽싸게 쥐고 팔을 뒤로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화가 나 있던 강인은 더욱 화가 났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이걸 돌려주기 전에 할 얘기가 있어.”

“뭔데?”

“우리들의 아기가 곧 태어날 거라고.”

“아기라는 말 좀 그만 해! 그건 아기가 아니고 그냥 노래일 뿐이야!”

“그럼 그 노래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아무튼 거기에 대해선 일단 접어둘게. 내가 하려던 얘기는 다른 얘기니까. 너, 그 주사위가 어떤 주사위인지 알아?”

강인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 전에, 그가 주사위를 받으면서 어떤 복사된 기억도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부터 우선 상기해야 한다. 그런 그가 주사위에 대해 단 한마디인들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유경은 TV 앞으로 걸어가 하얀 털가죽을 깐 소파에 앉았다. 강인과 함께 누워 곧잘 사랑을 나누던 공기침대는 어디에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건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야. 어떤 기억을 복사하는지는 모르지만, 주사위를 넘겨받는 사람이 주사위를 넘겨준 사람의 기억을 복사할 수 있어. 아니 주사위를 넘겨 준 사람보다 앞서 그 주사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까지 복사할 수 있어.”

“말도 안 돼.”

“너한테는 말이 안 되겠지. 너는 그 기억을 넘겨받기를 거부한 거야. ”

강인은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눈길로 유경을 쳐다보았다. 유경은 손바닥을 펴고 주사위를 들여다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기억 못 하지? 내가 춤추는 아이스크림에 대해서 했던 농담. 난 그게 내 머릿속에서 홀연히 떠오른 잔상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웃었어. 그게 누군가의 기억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어. 네 라이터 옆에 있던 이걸 두 번째로 집어들었을 때 네 기억이 복사되어 내게로 들어온 거야. 넌 네 여자에게 주려고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집에 들어갔었고, 너는 그 여자한테 심한 죄책감을 가졌고.”

“그건 감정이지 기억이 아니야.”

“감정도 기억의 일부지. 죄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상한 기억들이지. 너는 절정에 다다랐을 때의 내 얼굴을 보면서 그 여자가 절정에 다다른 모습과 뭐가 다른지 비교했고.”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나는 그 여자가 우는 모습을 봤어. 네 기억이 찍은 사진, 그 여자가 우는 사진을 봤어.”

유경은 주사위를 강인 쪽으로 집어던졌다. 주사위는 강인의 가슴에 정확히 맞고 떨어진 후 부엌 쪽으로 또르르르 굴러갔다. 강인은 굴러가는 주사위를 쳐다보며 그 주사위를 집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민효와 유경. 두 여자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같다. 두 여자는 나를 비난하고 싶어한다. ‘너는 비열해.’ 그래, 나는 비열하다. 비열해지지 않으면, 난 살 수도 없고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자기연민이나 자기비하에 빠지는 건 지금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건 잠시 미뤄도 된다. 강인은 유경에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지 않은가. 달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므로 더더욱 그렇다.

“너는 내게 한 가지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 너는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노래를 원한 거야.”

“그래도 어쨌든 너하고 자고 싶었어.”

“네가 손해보는 거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겠지. 이젠 다 끝났어.”

“끝? 끝이라고 말할 수 있어?”

강인은 유경을 쓰러뜨리듯 소파에 눕혔다. 그는 유경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설령 자존심을 다쳤다 해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의 예상은 반쯤 적중했다. 그녀는 몸을 열었지만 달아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달아올랐을 때조차도 차갑기만 한 몸이었다.

“부탁할 게 있어.”

유경의 몸 위로 길게 늘어진 강인의 등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 목소리를 듣던 그 여자가 쓰러졌어. 그것도 내가 읽은 네 기억의 일부였어. 왜 쓰러졌는지는 너도 몰랐기 때문에 나 역시 알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젠 그 여자가 쓰러진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녀는 네가 그녀 자신을 위해서 노래부르길 바랬어. 그렇게 애절한 네 목소리가 자신만을 위한 목소리이기를 바랬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슬퍼서 쓰러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를 위해서 노래 불러 줘. 약속해.”

“약속하지.”

모든 여자들은 약속을 요구한다.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하거나 혹은 단순해지고 싶은 인간이다. 강인은 유경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유경은 그 입맞춤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가, 눈물과 침을 한꺼번에 삼키고 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아기 이름은 ‘희’야. 기쁠 희(喜). 내 침대 위에 있어. 데리고 가.”

강인은 상체를 황급히 일으키며 유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약속을 지킨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솟아나 눈꼬리를 타고 소파 위 쿠션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강인은 그 순간의 유경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설령 민효가 찾아오라고 그렇게 악다구니를 친 저 주사위가 정말로 기억을 복사한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얼굴을 복사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 강인은 유경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넣었고 유경은 강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제 다시는 안 올 거지?”

강인은 자신이 과연 여기에 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자문했다. 민효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여기에 오든 혹은 다른 곳에 가든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민효 역시 자신을 막지는 않았다. 민효는 자신의 소유욕을 늘 조심스럽게 숨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제외하고, 내가 여기에 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굳이 유경의 말에 반박하자면, ‘어느 쪽도 손해보지 않는 거래’이다. 설령 오지 않는다 쳐도, 여기에서 굳이 진실을 말해서 유경을 울릴 필요가 없다. 그게 그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모든 이유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로 했다.

“가끔 올 거야. 네가 쫓아내지만 않으면.”

“쫓아낼 거야.”

“그렇다면 문 밖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애절하게 노래 불러야겠군. 약속 지키게 되겠어.”

“난 진지하게 부탁한 거야.”

“알아. 나도 진지하게 약속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위해서 노래할게.”

강인은 몸을 일으켜 소파에서 일어났다. 곧장 팬티를 입고 바지의 훅을 잠근 후 유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티끌 하나 없이 흰 시트 위에 놓인 데모 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이렇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거야. 그 순간 또 다른 죄책감이 강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침실에서 나온 강인은 다시 유경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 맨몸에 얇은 네글리제를 걸친 모습으로 강인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백의의 천사 같군, 하고 강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백의의 천사는 강인의 마지막 키스를 거부했다.

강인은 데모테이프를 파카 주머니에 넣은 후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일어난 유경은 미끄러지듯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지방 바로 아래 널브러진 주사위를 집어들었다. 아아 강인, 이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야. 넌 결국 주사위를 가져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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