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19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19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고 강인은 생각했다.

확실히 그 주사위가 아직 유경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유경의 집에서 그녀가 주사위를 팽개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경의 집으로 가서 도로 주사위를 찾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원하던 것을 얻었다. 그걸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여자의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다. 항상 주인을 섬기는 노예처럼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유경이 어째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던가. 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주사위를 찾던 민효는 어째서 주사위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먼 옛날의 온화하고 쾌활한 모습을 다시 되찾은 것인가.

“야, 야. 너 무슨 생각해?”

강인은 고개를 들어 용환을 쳐다보았다. 곧이어 그는 옆에 앉은 진호를 쳐다보고 용환이의 맞은편에 앉은 헌수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멤버들과 함께 연습실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바닥에 시선을 떨구고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생수병을 집어들어 뚜껑을 열었다.

“너 지금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었지?”

“......미안하다.”

“미안하고 자시고 너 때문에 레코딩을 무한정 미룰 수가 없잖아. 솔직히 장유경이가 주는 그 곡 없으면 우리가 다 죽냐? 그 노래 하나쯤 없어도 되잖아? ”

왜 네 고집 때문에 우리가 레코딩을 차일피일 늦춰야 되느냐고 땡고함을 칠 찰나였지만, 진호와 헌수가 눈짓으로 뜯어말리는 통에 용환이는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아무리 친구 이상의 친구라고는 하나 이번만큼은 그도 강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 강인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테이프 받았어. 급하게 오느라고 깜박 잊고 안 가져왔는데, 내일 가져올게. 그거 편곡하는 대로 바로 레코딩 들어가자. 용환이 너 그거 사보 뜨고 편곡하려면 며칠 걸리겠냐?”

진호는 어이없다는 듯 용환을 쳐다보았고 헌수는 들고 있던 드럼 스틱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용환은 입을 벌리고 약간 놀란 표정으로 강인을 쳐다보았다. 이 고집불통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게임 끝났네.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정훈이 형이 스튜디오하고 장비는 책임지고 제공한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나흘 안에는 끝내야지. 끝내도록 하마. 눈깔이 튀어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용환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해 보이지 않았다. 헌수는 드럼 연습이나 하겠다며 일어섰고 진호 역시 일어서서 벽에 세워둔 기타 쪽으로 갔다. 용환은 담배를 꺼내어 강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무슨 다른 일 있냐?”

대답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용환 역시 일어나 자신의 베이스 기타를 집었다. 강인은 혼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친구들의 시끄러운 연주를 들으며 자신이 연습실로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제 밤에, 유경이한테 테이프를 받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는 동안 그 놈의 망할 주사위를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고, 그리고 민효를 찾았지만 그애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고.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 방에 와서 혼자 잠이 들었고. 그리고 아침에 잠을 깨자마자 그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어 보았고.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희라는 이름의 아기, 장유경이 선사한 러브 송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청신경을 타고 들어온 선율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을 음미하는 동안 강인은 이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참을 수 없이 역겨운 느낌을 감지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매혹적이었고,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는 음악이었다. 이거면 됐다. 그러나, 도대체......그는 유경의 손에서 팽개쳐진 그 주사위가 바닥을 따라 구르던 광경을 기억해내고 심한 불쾌감에 빠졌다. 그는 카세트 플레이어의 전원을 끈 후 ‘희’가 담긴 테이프를 꺼냈다. 일단은 이걸 용환이한테 넘기는 게 순서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케이스에 집어넣은 ‘희’를 내려다보며 차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게 뭘까? 이 불안감은? 주사위를 꼭 돌려달라고 애원하던 민효의 목소리. 그리고 부엌 바닥을 따라 구르던 주사위. 갑자기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민효의 머리통이 매끈한 우드륨 바닥을 굴러가는 광경이 떠올랐다. 강인의 오른손이 불끈 쥐어졌다. 화가 났다. 그때 문이 열리며 민효가 들어섰던 것이다.

“인아. 너 언제 들어왔어?”

강인은 놀라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 어젯밤에. 10시쯤에 들어왔는데 네 방에 가니까 벌써 자고 있더라. 왜 그렇게 일찍 잤어? 어디 아팠어?”

“조금 피곤했어. 어제는. 그런데.......너 그럼 아침까지 여기서 잔 거야?”

강인은 ‘희’를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민효의 시선이 강인의 손을 잠깐 쫓았지만 그녀는 곧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 그녀의 몸이 강인의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말, 이불이 따뜻하네. 네 체온이 아직 남아 있어. 나 깨우지 그랬어.”

“너무 곤하게 자는 것 같아서......참. 미안해. 그 주사위 말인데.......꼭 되찾아 주려고 했는데.......”

민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게 미안해할 거 없어. 말했잖아. 그 주사위는 윤이 거라고. ”

“그래도.....”

“그렇게 미안하면 와서 좀 안아줘.”

그래서 자신도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매우 부드럽고 조용하게 서로를 안았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 불안하다. 강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자신이 장유경과 거래하던 요 몇 달 간,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편안하고 포근하게 대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 놈의 주사위. 괜시리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던 그 직육면체의 구슬. 그걸 돌려 달라고 징징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렇게 천사처럼 구느냔 말이다. 왜, 왜?

“씨발!”

강인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디아이 셀 멤버들의 연주는 일시에 멈추었다. 헌수는 드럼 스틱을 심벌즈에 되게 내리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용환이와 진호가 동시에 강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지금 안색이 안 좋다?”

“아픈 건 아닌데.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가......아니다. 됐다. 연습하자. 나도 놀고만 있을 수가 없으니까. 자, 다시 시작하자. ”

진호와 용환은 서로를 마주 쳐다보다가 헌수를 쳐다보았다. 헌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겠어?”

“연습하면 괜찮겠지. 연습합시다. 보컬 없이 연습하니까 잘 되냐? 못된 놈들. 자, 우리들의 천재적인 작곡가 이용환이 만든 걸작 <화환>. 뭐해? 시작하자니까? ”

강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간주 부분을 흥얼거렸다. 모두들 어이없어하면서도 연주를 재개했고 강인은 차츰 매캐한 통증이 치받쳐 올라오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자신의 성대가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울한 저음을 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은, 정신이 반쯤 풀린 듯한 목소리였다. 진호의 기타 리프가 점점 빨라짐에 따라 강인은 거의 발악에 가까운 하울링을 구사했다. 간주가 느려지는 부분에서 진호가 용환이에게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용환이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강인이 평소의 냉정한 해석력과 통제력을 상실하고 미친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고함을 지르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드럼 스틱을 한층 빠르게 돌리던 헌수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강인의 목소리는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미친 짐승이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땡고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폭주하는 음량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연주를 멈춘 헌수가 드럼 스틱을 세 번 내리쳐서 강인의 폭주를 막았다. 그만, 그만. 그만해!

마침내 강인이 노래를 멈췄을 때, 그는 아연실색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이윽고 용환이가 입을 열었다.

“너 이 자식 정말 이럴래? 이래 가지고서야 차라리 연습 안 하느니만 못 하잖아? 또 피 올려서 병원 갈 거야? ”

“미안하다.”

괜찮다고? 그 주사위는 윤이 거니까 갖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나 그 주사위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을 때도 똑같은 이유를 대지 않았던가. 그 주사위는 윤이 거라고. 게다가,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고?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 분명한 건, 그 주사위라는 게 민효에게 꼭 필요했으나 어느 순간 그녀가 그걸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내 팔에 안기던 순간에? 아니다. 아닐 거야.

“강인, 잊지 마. 네가 그 망할 노래가 든 테이프를 가져오든 안 하든 우리는 토요일에 녹음 들어간다. ”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에게 쓸데없이 맞서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을 조금 더 면밀하게 떠올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그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의 민효는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옷차림이 달랐다. 얇고 흰 슈미즈 위에 하얀 가디건을 걸치고. 하얀색? 민효는 하얀색을 싫어했다. 그러나 일부러 아침부터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들어올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꺼번에 많은 빨래를 한 탓에 다른 색깔의 옷이 없었던 거겠지. 그러나 흰 옷을 입은 그녀는 여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게다가 시선까지 아래로 내리깐 모습이라니! 그 모습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움켜 쥐었던 오른손을 펴는 동안 민효의 눈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데모 테이프 ‘희’의 매끄러운 케이스에 머물렀다. 정확히 수직으로 내리뻗은 플라스틱의 조합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웃었다. 직각으로 양분된 플라스틱 스마일. 아, 그래! 그 미소, 그 미소의 의미가 뭐였지? 강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부르튼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인은 자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몇 분 간 말없이 서랍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깨끗하게 정돈된 서랍 속에 ‘희’가 들어 있었다. 네모난 몸통이 앞뒤로 갈라진 채 속에 든 길다란 마그네틱 테이프들이 몇십 마리의 뱀처럼 서로 엉긴 채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어림잡아 몇백 미터는 넘을 정도로 길고 가느다란 검은 줄이 이리저리 엉킨 채 널브러진 꼴은 참으로 볼 만했다. 손으로 건드리면 꿈틀거리며 대가리를 쳐들고 강인을 향해 와락 덤벼들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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