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20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0



민효는 녹음용 테이프의 모서리를 따라 일렬로 뚫린 네모난 구멍을 살펴보았다 그 구멍을 따라 검고 가느다란 마그네틱 테이프가 노출되어 있었다. 구멍에 손을 대고 마그네틱 테이프의 매끈한 감촉을 피하 신경으로 포착한 민효는 손가락을 넣어 테이프를 잡아 뺐다. 그런 후 마구 잡아당겨 풀고 또 풀었다. 둥근 실타래를 마구 풀어 흩어버리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민효는 멈출 줄 모르고 네모난 플라스틱 조각 속에서 튀어나오는 테이프를 손에 둘둘 감았다. 그런 후 테이프가 감긴 자신의 손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마그네틱 필름이 머리타래마냥 엉겨붙은 카세트를 강인의 서랍 속에 집어넣은 후 그녀는 자신이 강인에게 했던 거짓말들을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다. 그 거짓말 가운데에는 매우 오래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인에게 숨겨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 나이디를 깨워 늦은 아침을 먹인 후, 오후가 될 때까지 민효는 자신의 아르바이트 겸 부업인 일본어 번역에 전념했다. 전념했다는 표현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희부연 의식의 백지 위에서 스멀거리는 히라가나의 행렬 사이로 이따금 강인의 일그러진 표정이 떠오르긴 했으니까. 그러나 부엌 탁자 위에 놓아 둔 시계바늘이 두 시를 가리킬 때까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일한사전을 덮은 후 일어나 냉장고에서 먹다 만 식빵 봉지와 햄 스프레드를 꺼냈다. 식빵 위에 스프레드를 바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녀는 입고 있던 두꺼운 가디건의 옷깃을 여미며 인터폰을 부엌 벽에 붙은 인터폰을 들었다.

“인아?”

“실례지만 여기가 강인이 사는 집 맞나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때리자 민효는 순간 긴장했다.

“그렇습니다만.”

“강인은 지금 집에 없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

민효는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다. 그녀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그녀 또래의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민효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하, 그 여자로군. 자신의 노래를 강인에 팔고 그 댓가로, 강인과, 잤다는 그 여자. 민효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안 유경은 입가에 가냘픈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 대목에서 민효가 망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은 단 2초도 못 되어 끊어졌고 민효는 유경을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유경은 빠른 눈길로 필요 이상으로 넓은 거실이며 낡고 먼지가 쌓인 가구들을 훑어보았다. 그런 후 민효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곧장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커피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요?”

“용건이 뭐지요?”

“천천히 말씀드릴 테니 차 한 잔만 주세요. 운전하기 귀찮아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한 것보다 더 피곤하군요.”

이런 상황에서 민효가 할 수 있는 일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30분 이내에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재빨리 이모저모로 추측해 보았다. 어쩌면 머리끄댕이를 잡힐 수도 있고. 강인과 결혼해야겠으니 당신은 빠져 달라는 폭탄 선언을 할 수 도 있겠지만 그건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운 오버센스에 불과했다. 히라가나보다 더욱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궁금증들이 머릿속을 분주히 오갔지만 그건 곧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민효는 자신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재빨리 티백 원두커피를 꺼냈다.

민효가 커피를 내놓자 유경은 향을 음미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민효는 그녀가 백합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인은 이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갈증이 풀렸으니까 이제 용건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죠? 장유경 씨?”

유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런, 알고 있었군요. 처음 볼 때부터 성미 급하고 고집 세어 보이는 아가씨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눈치도 빠른 줄은 몰랐어요. 조금은 우아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싶었는데.....예를 들면 이 커피맛이 아주 부드럽다든가 하는.....”

민효는 한 손으로 자신의 달아오르는 뺨을 번갈아 눌렀다.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당신의 그 입술 색깔도 퍽 부드러워 보이네요. 용건이나 말해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민효의 태도는 확실히 유경의 느긋하고 우아한 태도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유경은 천천히 자신이 들고 있던 작은 백을 열고 차가운 윤기가 흐르는 반들거리는 작은 직육면체의 금속을 꺼냈다. 순간 민효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역시 이 여자에게 가 있었구나. 그러나 굴욕감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끄러미 주사위를 쳐다보는 동안 민효의 가슴속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냉정함이 생겨났다. 민효는 정색을 하고 유경이 앉은 소파 맞은편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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