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1
“이게 기억을 복사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요. 언젠가 강인의 바지를 세탁했을 때였죠. 이게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어요. 나는 이걸 집어든 순간 이게 뭔지 금방 알았죠. 하지만 강인은 몰라요. 그걸 돌려달라고 내게 애걸복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걸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인이가 당신에게 애걸복걸했다고요? 그걸 돌려달라고?”
“아, 실수. 내가 그걸 집어던졌고 그는 화가 나서 그걸 내버려두고 내 아기만 가지고 가 버렸어요. 아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알죠? 강인이 처음에 내게 요구했던 것. 내가 만든 가락, 내가 만든 리듬, 내가 낳은 아기.”
민효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 여자의 실체가 그다지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아 버려서 맥이 빠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를 평가할 자격은 내게는 없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지, 그 여자가 그 주사위를 가지고 뭘 어디까지 읽어냈는지를 알아내는 거야.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강인에게 준 거예요. 조금은 비열한 목적으로 그걸 그애한테 맡겼죠. 당신 말대로 강인은 아무것도 모르지만요.”
“알고 있어요. ”
“만약 그 주사위가 내 기억을 복사해서 당신에게 전했다면, 당신은 그 주사위가 당신 손에 들어가게 된 대강의 상황을 이해하겠죠?”
“그래요, 맞아요. ”
“그렇다면 내가 강인에게 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잘 알겠네요.”
그 형편없는 거짓말들이 저 여자의 의식 속에 입력되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어차피 탄로날 일들이었으니까. 민효는 유경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가냘프고 핏기 없는 우유빛 피부는 은하의 집 거실 한켠에 세워놓은 성모상을 연상케 했다. 갑자기 유경의 입가에 시종일관 머물러 있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복화술을 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아마 당신도 인정하겠죠. 나는, 강인이 지금 집에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당신에게 이걸 돌려주려고 여기에 왔어요. 나는 이 주사위가 복사한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보았어요. 하지만 아주 단편적이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단, 그게 누군가의 기억들이었다는 사실만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어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기억을 읽었어요. 그 사람은 강인이 아니었어요. 아마도.....그래요, 얘기 안 하는 게 낫겠네요. 좌우지간 당신의 기억은 뭔가 비밀스럽고, 모호하고, 많이 왜곡되어 있었어요. ”
“그래, 그 주사위를 통해서 뭘 봤죠?”
화가 치미는 것을 참으려고 애쓰며 민효가 따져 물었다. 그녀는 매 순간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은 최소한 증오나 적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인의 목소리를 듣는 당신요. 당신은 쓰러졌죠. 그렇죠? 나는 당신의 눈을 통해서 강인을 보았어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웠어요. 그래요. 그의 목소리는 진짜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어요.”
민효는 그게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녀가 K클럽에 가서 강인의 노래를 들은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 그녀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강인의 노래를 들었고, 갑자기 실신했다. 시끄럽고 난잡한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날뛰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람이 쓰러졌는지 알지도 못했다. 자칫하면 압사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황급히 달려온 강윤이 그 야만적인 관객들과 싸우다시피 하며 그녀를 그들의 발길로부터 구해냈다. 그가 그녀를 병원까지 들쳐업고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녀가 생애 최초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겪은 실신이었다. 말이 실신이지 거의 간질 발작에 가까웠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은하가 전한 말에 따르면 눈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 낯팔리는 기억이 저 주사위에 복사되어 저 여자에게로 넘어갔다는 건가?
“강인을 사랑하죠?”
이 말이 두 여자 중 어느 쪽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를 알기란 어려울 것 같다. 민효의 의식 속에서 다른 질문이 분주히 오갔다. 물론, 나는 그애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게 그때 내가 쓰러진 이유였나? 아니다. 그러면 나는 왜 쓰러졌지? 민효는 팔을 뻗어 주사위를 집어들고 어루만졌다. 강윤에게 돌려줘야 할 주사위다. 그녀는 강윤을 생각하고, 지금쯤 2층에서 TV를 보고 있을 나이디를 생각했다. 문득 나이디를 데려온 주사위 담당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주사위는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의 손에 되돌아오게 된다고 했던가. 갑자기 민효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주사위를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기억을 복사하다니, 참 이상한 주사위야. 하지만 그 주사위가 복사한 기억이 진짜인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갑자기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긴 하군요. 내가 인이에게 처음으로 순결을 잃은 날이 생각나요. 아주 오래 전 일이에요.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날 인이 아버님, 강태규 박사님께 아주 심한 꾸지람을 들었어요. 그때까지 그런 꾸지람을 들어 본 적이 없었죠. 그날 밤에 침대에 혼자 누워 울고 있는데 강인이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위로를 하려고 들어온 거였지만 끝까지 그런 순진한 목적을 유지하지는 못했던 거죠. 물 흐르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민효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일어난 일이었죠. 그 다음날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그러니까, 날 낳아준 생모를 말하는 거예요. 난 내 생모를 싫어했는데 그날은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 봐요. 그걸 다 털어놓았거든요. 나 강인하고 그만 해 버렸어. 어떡하죠? 하고요. 웃지 않으시네. 별로 웃기는 얘기는 아닌가 봐요.”
유경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민효는 갑자기 생각난 듯 머리를 손으로 쳤다. 그제서야 허공을 떠돌던 그녀의 시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주사위가 당신에게 그런 기억들을 보여주던가요?”
“아니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유경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민효는 문득 그녀의 키가 꽤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어도 민효 자신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의 기억, 나는 의심스러워요.”
“뭐라고요?”
“당신이 강인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말, 뭔가 이상하게 들려요.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걸 믿기 싫은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 주사위는 그런 기억을 내게 보여주지는 않았고요. 하지만, 그 기억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
“강인의 기억을 보았으니까. 강인은 그 주사위가 기억을 복사한다는 걸 전혀 모르고, 그 주사위가 담은 기억을 읽지도 못해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죠. 그가 당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억은 당신이 말하는 것과는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요?”
“그는 당신을 사랑하죠. 하지만 배신감, 자책감, 결코 원하지 않는 책임감, 그런 것들이 그를 괴롭혀요. 그 주사위가 복사한 강인의 기억은 그런 것들이었어요. 이상하게도 그는 당신이 우는 모습을 아주 많이 기억하고 있었죠. 그는 당신에 대해 엄청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강인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닌지도 모른다. 민효가 씁쓰름한 입맛을 다시는 동안 유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말이죠. 강인은 당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강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었어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내 생각 좀 하면서 노래 불러 달라고요. 그의 목소리가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그랬죠?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그게 아니면 적어도 서 있을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귀속에 든 달팽이관이라든지 전정기관이라든지 하는 걸 파괴해서, 몸의 균형을 빼앗아 버릴 수 있다고요. 물론 그 때문에 당신이 쓰러졌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그가 날 위해서 노래 부른다면, 당신은 날 미워하겠죠?”
민효는 확신을 가지고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런 이유로 미워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난 그가 아무리 날 사랑한대도 그런 부탁 따위는 안 할 거고, 음악이나 노래 같은 건 오늘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주기를 바라니까.”
유경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민효의 말을 듣다가, 한숨 비슷한 웃음을 토해냈다. 마치 의외네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두 여자의 시선이 말없이 교차하는 동안 시계의 초침소리가 증폭되어 울렸다. 웅장하게 메아리치는 공허가 두 사람을 감쌌다. 민효를 주시하는 유경의 얼굴이 차츰 슬픔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민효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지만 유경의 표정과는 아주 달랐다. 최소한 민효의 표정에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었다. 유경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어 시선을 탁자로 떨구고는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요.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했군요. 미안해요.”
“잠깐만요!”
느닷없는 민효의 외침에 유경은 눈을 크게 떴다. 민효는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나무라는 선생과도 같은 눈길로 유경을 응시했다.
“최소한 당신은 강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어요. 아니, 꼭 필요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강인이 원하는 그 잘난 음악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
유경은 갑자기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임이 틀림없는 단순하고 고상한 디자인의 흰 원피스 자락이 풀썩 요동쳤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옷으로 감추어져 있긴 하지만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 몸이었다. 저 연약한 몸뚱이를 가지고 강인과 침대에서 그 짓을 몇 번이나 해댔다는 말이지. 천박한 의문이다. 그러나 악의는 없다. 유경의 입술이 갑자기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민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민효 씨. 당신은 지금, 내 얼굴을 보고 있죠?......내가 당신 얼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내 얼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퍽 아름다운 얼굴이에요. 내 친구네 집에 있는 성모상을 닮았어요.”
“그뿐인가요? 혹시, 내 나이를 알아요? 내가 몇 살로 보여요?”
민효는 종잡을 수 없는 유경의 행동과, 갑자기 파랗게 질린 채 굳어져 버린 듯한 그녀의 안색에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내 친구들, 그러니까 강인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스물 여덟이라고 하더군요. 실제로는 좀 더 어려 보이는군요.”
“그렇게 보아 주니 고마워요. 하지만 틀렸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물 여덟 살로 알고 있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사실 스물 여덟 살이 아니에요. 나는, 나는 사실은, 서른 한 살이에요. 당신보다도, 그리고 강인보다도, 일곱 살이 많아요.”
민효는 유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결코 적의를 담은 눈길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강인이 유경에게 때때로 느꼈던 것과 유사한 종류의 애잔한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담은 눈길이었다. 만약 적의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있었다면, 그 감정은 결코 유경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민효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