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2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주사위의 이동 경로를 정리해 보자. 강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받은 주사위를 민효에게 넘겼고, 민효는 그 주사위를 강인에게 넘겼고, 강인은 그 주사위를 본의 아니게 유경의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주사위는 자연스레 유경에게 넘어갔고, 유경은 주사위를 민효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동 경로는 하나의 원으로 맞물린 셈이다.
물론 그 중간에 전혀 엉뚱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희’라는 이름의 카세트 테이프를 전제로 한 강인과 유경의 섹스도 사건이라면 사건이 될 수 있다. 주사위가 이들 속으로 개입하기 전에 있었던 민효의 고백 역시 사건이 될 수 있다. 디 아이 셀의 신보를 녹음하는 작업에 차질이 생긴 것도 중요한 사건이고 강윤이 심장 발작을 일으켜 죽을 뻔한 상황에서 민효가 그를 찾아갔다는 것도 사건은 사건이다. 물론 주사위 담당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다 나이디를 맡기고 간 것은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나이디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강인과 민효의 엇갈린 이틀 밤의 행적을 살펴야 할 때다.
일요일 밤, 유경의 집에서 돌아온 강인은 주사위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지만 그녀와의 거래가 끝난 증거로 받은 ‘희’ 때문에 주사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책상에 앉아 희를 만지작거리던 강인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민효에게 주사위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었다. 그러나 민효가 주사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기에 강인은 안심하고 디아이 셀 멤버들이 기다리는 연습실로 향했다. 강인은 용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 다음날인 화요일 밤이 되어서야 돌아와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한편 민효는 월요일 저녁에 강윤을 만나러 갔다가 밤에 돌아왔고 화요일 오후에 뜬금없이 찾아온 유경을 맞이했다. 이쯤하면 우리가 단편적으로 살펴본 두 사람의 행보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그러면 화요일 밤부터 다시 그들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강인은 떼거지로 죽은 방울뱀의 허물을 연상케 하는 마그네틱 테이프가 구불구불하게 엉킨 채 자신을 쳐다보는 꼴을 몇 분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조용히 책상 서랍을 닫았다. 서랍을 닫는 그의 손등에 푸른 정맥이 선명하게 불거졌다. 그는 문짝을 부술 듯한 기세로 여닫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자신이 집에 들어올 때 문을 열어주던 민효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미칠 지경이 되었다. 딱히 분노라고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정이 조금씩 섞여 응고된 광분의 덩어리였다. 그는 부엌에서 다 나이디를 식탁에 앉혀 놓고 저녁밥인지 간식인지 모를 음식을 앞에 차려 둔 채 동화책을 읽어주는 민효를 발견했다.
“토끼는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어디 처음에 당신이 이 함정에 어떻게 빠졌는지 다시 보여 주세요. 어? 인아? 왜 그래? 배고파서 내려온 거야?”
“.....왜 그랬어?”
다짜고짜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받은 민효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강인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입 끝을 치켜 올려 웃어 보였다. 그녀는 말없이 책을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그녀가 미처 소파에 앉기도 전에 강인은 그녀를 밀치다시피 소파에 눕히고 그녀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허리가 불편할 만큼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틀어진 상태에서 억지로 상반신을 눕힌 민효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잠깐만, 허리가 너무 아파. 이렇게 누르지 마. 안 일어날게. 아얏!.......그 테이프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일부러 그런 거지? 너, 그게 뭔지 알고 일부러 그렇게 망쳐 놓은 거지? 이유가 뭐야? 어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봐.”
만약 민효에게 좀 더 연극배우의 기질이 풍부했더라면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강인의 연민을 자극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직감이나 감정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것들, 즉 이성적 판단과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인의 팔이 자신의 어깨에 가하는 압력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나는 알고 싶었어. 그 망해먹을 음악이, 그 망해먹을 노래가락이 나보다 너한테 더 소중했는지 알고 싶었던 거야.”
“뭐?”
확실히 민효가 댄 이유는 강인을 당황하게 했다. 적어도 애절한 눈빛보다는 확실히 그를 당황하게 했음이 틀림없다. 강인은 민효를 누르던 팔을 풀고 그녀로부터 물러났다. 통증에서 놓여난 민효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턱을 덜덜 떠는 강인의 표정을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는 자신이 훌륭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판단이 옳았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강인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망연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인아, 나는.....”
민효는 강인의 등에 손을 얹었고 강인은 그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냉기 어린 침묵이 두 남녀의 주위를 배회하는 동안 민효는 몇 번이나 강인의 등에 손을 대려 하다가는 움찔거리며 손을 내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녀가 울음을 떠뜨리면서 침묵 시효는 종료했고 이와 동시에 강인은 그녀의 어깨를 다시 찍어 눌렀다. 이번에는 소파 위로 눕히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소파 등받이에 대고 힘껏 눌렀다. 이번에는 민효의 허리 대신 견갑골이 수난을 당할 차례였다.
“넌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장유경 때문에? 내가 그 노래 때문에 그 여자랑 잤다고? 처음부터 너한테 미안하네 어쩌네 말하기도 싫었지만, 내가 좋아서 그 여자랑 잤다고 생각해? 난 말이야.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내 모든 걸 너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테이프만 해도 그래. 그 테이프가 장유경 같은 여자한테 내 정액을 낭비할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싶지? 있어. 내게는 그게 필요했어. 그게 그냥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 노래는 망가져가는 내 목소리를 복원시킬 수 있는 발성 연습 프로그램을 담고 있었어. 그 여자가 옛날 자기 애인이었던 사람의 목소리를 고치려고 4년간을 연구해서 음악으로 만든 거야. 이런 얘기까지는 하기 싫었어. 적어도 넌 한 가지는 알잖아. 난 내 목젖 안에서 고이는 이 목소리를 밖으로 내뿜지 않고 살 수는 없어. 너나 윤이가 없이 살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인아......아파, 이거 놓고 얘기해. 어깨뼈가 부러지는 것 같아. 내가 잘못했어.....”
안으로 고여드는 소리를 민효의 귀에 대고 목청껏 토해내는 동안 강인의 마음도 다소 누그러들었다. 본래 격앙된 분노란 한 차례의 고비를 넘기면 되는 것이다. 잘못했다는 민효의 울음섞인 사과로서 그 고비가 넘어갔기 때문에 이대로 두 사람의 격전은 무사히 화해 무드로 일단락될 것처럼 보였다. 늘 그랬듯이 그대로 서로 옷을 벗고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개입되고 말았다. 강인이 민효의 어깨를 찍어 누르면서 옷깃이 당기는 통에 민효가 입고 있던 남방의 맨 위 단추가 뜯겨져 나간 것이다. 강인이 민효의 어깨를 놓은 순간 그의 눈에 선명하게 드러난 민효의 목과 어깨가 보였다.
그는 그녀의 목을 문신처럼 수놓은 이빨 자국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직 민효의 옆구리를 잡은 강인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너, 윤이한테 갔다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