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3
다른 건 모두 강인에게 맡겼지만, 적어도 목과 어깨만은 널 위해 남겨둘게?
민효가 강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 중의 오산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강윤과 민효 사이에 오가는 쌍방간의 배려에 의해 성립한 밀약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몇 년 전, 정확히는 99년에 있었던 삼각함수 사건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강윤의 성감대를 자극하는 곡선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이었다는 것쯤은 알아두어도 좋다. 그 이후로 강윤은 종종 그녀의 목이나 어깨를 탐했고 그녀는 자상하다 못해 헌신적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태도로 강윤의 행동을 묵인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거의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 괜한 짓을 했어. 그것이 테이프를 놓아둔 채 민효가 돌아간 후 달콤쌉싸름한 기분으로 담배를 피워 문 강윤의 머리에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는 너무 심하게 민효의 목을 깨물었고 그녀는 제발 그렇게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는 내심 미안했지만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그가 친정집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민효가 좋아하는 딸기 상자를 든 그의 파카 주머니 안에는 그녀가 어제 남기고 한 테이프―‘희’가 케이스 안에 담긴 채 그대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강인이 혹시라도 집에 있다면, 민효 몰래 이 테이프를 돌려 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집을 나섰지만 본가에 가까이 당도함에 따라 그 계획은 차츰 엷어지더니 결국 거의 취소 단계에 다다랐다. 최근 강인이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의 측근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그렇다면 강인과 상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역시 민효를 다시 설득해야 할까. 그건 너무 괴로운 작업이다. 그애가 조금만 더 단순하고 연약하고 부드러웠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애를 지켜볼 수 있었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 새 그는 대문 앞에 다다랐다. 처음에는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대문 틈새로 보이는 빗장이 보이지 않자 문이 열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 역시 잠겨 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20년 이상을 들어온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에도 처음으로 그의 고막을 돌파한 목소리는 민효가 아닌 강인의 것이었다.
“.......네 뱃속에서 지운 그 아이는 깨끗하게 잊고, 새 아기 낳으면 되겠지. 이번에는 지우지 마. 용서 안 해. 자, 이 끈 빨리 풀어. ”
“너 윤이한테 갔다 왔지?”
민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겁에 질린 상태였지만 서슬이 퍼런 강인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무서워하는 내색조차 못했다. 강인의 입이 심하게 뒤틀렸다. 매우 저열해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술 양 끝을 점령했다.
“그래. 윤이 말고 또 누가 이런 짓을 하겠어......그 녀석이 불렀어? 아니면 네가 간 거야?”
“내가 갔어.”
“왜 갔어?”
“할 말이 있었어.”
“무슨 말? ”
“인아!”
강인은 민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강인의 손 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강인은 느닷없이 자신이 어루만지던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와락 그러쥐었다.
“너도 좋아하는 거지? 이렇게 하는 거? 왜? 내가 하는 건 싫고, 윤이가 해 주니까 좋던? 그래서 윤이한테 가서 해달라고 했어? 그게 그 녀석한테 할 말이었지?”
민효는 대답 대신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강인을 쳐다보았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붉게 부풀어오르고 반대로 눈두덩은 푹 꺼져 버렸다. 강인은 징그러운 종기나 부스럼 덩어리처럼 흉해진 그녀의 목을 비틀어 꺾을 태세로 소리쳤다.
“그 자식한테 가지 마!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돼? 그 자식은 너 때문에 자기 발로 나가고도 끝끝내 널 포기 못하고 있잖아. 그걸 몰라? 몰라서 간 거야? 아니면 내가 장유경하고 그 짓을 했다고 해서 너도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간 거야? 카세트 테이프를 그 따위로 만들어놓고도 모자라서? 내 아기 나한테 말도 없이 지운 걸로도 모자라서?”
“인아 그건.....”
민효는 강인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강인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반쯤 넋나간 사람처럼 지껄였다.
“그날, 네가 낙태했다고 말한 그날 넌 내가 그걸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생각했지? 그렇지? 만약 그랬다면 넌 나보다 만 배는 더 멍청해. 내가 그날 이후로 하루라도 말짱한 정신으로 걸어다닌 적이 있었던 줄 알아? 하루라도 편한 마음으로 네 얼굴 쳐다보기나 했을 것 같애? 이 지독한 계집애야. 나한테 그 주사위인지 뭔지 하는 거 어거지로 떠맡기고는 내놓으라고 그렇게 조르면서. 네가 그랬지 아마?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그 주사위가 너한테 그런 내 기억은 안 보여주든? 아, 하긴 보여줬을 턱이 없겠네. 내가 네게 그걸 돌려준다고 해놓고 잃어버렸으니까.”
“인아 그만하고 내 말 좀.......”
“시끄러. 네 말은 두 마디만 들어도 울화통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아. 내가 윤이 자식이 아니었길 망정이지. 그 자식 같았으면 벌써 심장이 터져서라도 죽었을 거야. 이거 벗어. 아기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뱃속에서 지운 그 아기는 깨끗하게 잊고, 새 아기 낳으면 되겠지. 이번에는 지우지 마. 용서 안 해. 자, 이 끈 빨리 풀어.”
“그만해 형.”
그 상황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이자 악몽이었다. 강인은 천천히 한 팔로 민효를 일으키고 자신도 몸을 일으키며 안개처럼 홀연히 나타난 쌍둥이 동생의 얼굴을 응시했다. 민효는 애써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삼키며 옷을 여몄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흐트러진 머릿속에 한 가닥의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대문을 잠그지 않았던가? 아니면 윤이가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나? 그러나 어지럽게 작동하던 그녀의 의식은 잠시 후, 강윤의 몇 마디 말로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애를 괴롭히지 마. 민효는 낙태한 적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