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24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4




“거짓말을 했어?........왜,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오래 전 강윤이 민효에게 했던 말던 이 말을 기억하는 우리들은 여기에서 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짐작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거짓말의 실체는 보잘것없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에 대한 확인사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나 있었나 싶어 확인해 보았더니 결국 그 자리에 있었던 적도 없었다는 얘기였다. 강인은 낮게 숨을 들이키며 동생을 쳐다보고 그 다음에는 민효를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놀란 것 같았지만 그 다음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낙태한 적이 없다고?”

“그래, 없어.”

이번에는 강윤 대신 민효가 대답했다. 엉뚱한 상황에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침착한 태도로 강인을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인에게 거의 깔릴 뻔했던 자신의 몸을 빼낸 후 자세를 고쳐 단정히 앉았다. 그러나 이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임신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낙태를 했겠어.”

“그런데 낙태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단 말이지. 정말 바보같은 짓 했군. 너도, 나도.”

강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직사광선을 피하는 사람마냥 이마에 손을 얹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감추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민효는 울다가 입술을 깨물기를 반복했는데, 뭔가 할 말이 잔뜩 있지만 울음소리를 참느라 말은 고사하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윤이 픽 웃었다.

“그만 울어. 다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거 알아. 형은 그애를 너무 많이 괴롭혔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야? 넌 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말해봐야 이해 못할 거야.”

그 순간 눈물을 닦던 민효가 훌쩍훌쩍 울며 입을 열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그야말로 멍청해 보이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표정만큼 바보스럽지 않았다.

“내가 윤이한테 다 얘기했던 것 뿐이야. 윤이한테 뭐라고 할 생각은 하지 마. 네 말대로 내가 한 거짓말은 확실히 바보같은 짓이었어. 하지만 내가 장유경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넌 정말 착각한 거야.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한 이유를 길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어. 다만 나는 네가 네 음악에 쏟는 정열의 삼 분의 일만이라도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란 거야. 네가 화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임신했다가 아기를 지웠다고 말한 거야.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편이 마음에서 아예 멀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너는 자꾸 죄책감 때문에 날 피하려고 했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있겠지. 거짓말은 쉬운 거야. 그리고 들통났을 때 서로에게 입히는 상처가 얼마나 크다는 것도 잘 알지. 하지만 말야. 어떤 특정한 종류의 거짓말에 한해서, 가장 크고 깊은 상처를 입는 사람은 속는 사람이 아니라 속이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넌 나한테 속았다고 날 원망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후회하는 마음은 없어.”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구! 됐지? 더 뭘 바래?”

강인이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윤은 천장을 쳐다보며 짧은 숨을 토했다. 그 역시 자신의 경솔한 폭로를 후회하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시인한 민효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말들은 그로서는 듣기 괴로운 것이었다. 하긴, 네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고, 한 마디라도 내가 듣기 편한 말들이 있었나. 그는 물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황망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눈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있나? 민효가, 열 두 번 눈을 씻고 보아도 틀림없는 민효가 탁자에 앉아 바싹 구운 토스트를 손에 들고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황급히 거실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가 선 자리에서는 거실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장 나가서 소파에 있는 민효에게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에 불과했다. 토스트를 다 먹어치운 민효는 이번에는 삶은 달걀을 집어들고 태연히 손으로 껍질을 까고 있었는데, 강윤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달걀을 입에 넣는 것이었다. 물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편 거실에서는 강인과 민효의 신경전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민효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강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그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는데, 강인이 그녀에게 냉혹하게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겁에 질려 버린 탓이었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제발 용서해 줘.”

강인은 그녀에게 팔을 내맡긴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묘한 수치심에 젖어 있었다. 나는 속은 거야. 내가 멍청해서 속은 건 아니지. 누가 낙태 따위를 가지고,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민효가 거짓말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그러나, 역시 나는 멍청했어. 네가 나를 속인 건 네가 내게 바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어. 바보였기 때문에 그걸 몰랐다. 나는 너와 내가 만든 아기가 태어날 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고 특별히 신경을 쓰지도 않았지. 왜냐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그러나 속임수, 있지도 않았던 아기의 그림자가 빛 사이로 새어나간 후 왜 내게 찾아든 것이 안도감이 아닌 슬픔이고 허탈감이란 말인가. 복잡한 상념의 수식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하나의 뿌리로 귀결되었다. 그가 마침내 입 밖으로 토해낸 결론은 정확하고 솔직한 결론이었다.

“나는, 네 말이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랬던 거야. ”

진짜였든 가짜였든 아기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숨쉬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중요했던 거다. 그 사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뭔가 중요한 느낌을 남겼던 건 사실이다. 그건 책임감일 수도 있고, 자기 멋대로 아이를 지운 민효에 대한 원망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것을. 민효는 강인의 팔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나는 그걸 영원히 사실로 만들고 싶었어. ”

그때서야 비로소 강인의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므로,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자신이 진작부터 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해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냈다.

“오늘 낮에 장유경이 왔다 갔어.”

“뭐? 그 여자가 여길 왜?”

“그 주사위,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를 주고 갔어. 걱정할 건 없어. 그냥 그것뿐이니까. 서로 머리 쥐어뜯고 싸우거나 그러지는 않았으니까.”

“이상하네. ”

뭐야. 꼭 모든 걸 다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민효가 그 주사위를 찾고 있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걸 주고 갔다고 하니. 이상하긴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해.”

민효 역시 즉각 강인의 말을 되받았지만, 그것은 강인의 생각에 대한 동의가 아니었다. 역시 강인은 그 주사위가 옮기고 다니는 기억들을 못 읽는 게 분명해. 왜 강인에게만 그런 걸까? 이상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상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민효도 강인도 아닌 강윤이었다. 강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 채 계란을 오물거리며 씹어먹는 또 다른 민효를 쳐다보았다. 또 다른 민효가 두 개째의 계란을 다 먹을 때까지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얼어붙은 채 서서 조각공원의 조각품마냥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거실로 뛰어들어온 그는 더욱 얼굴에 하얗게 질린 채 강인의 곁에 앉은 민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강인에게 장유경과의 면담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참이었다. 그녀의 실제 나이가 스물 여덟 살이 아니라 서른 한 살이었다는 말에도 강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세 살이 많든 서른 살이 많든 무슨 상관이야. 애시당초 나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하지만 여자들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거짓말하는 걸 좋아하는군. 특히 나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말이야. ”

“그 여자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너 역시 그 여자에게 심했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그 여자는 너를 사랑했어. 목적도 수단도 불순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어.”

“그 여자가 그러던? 날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이 바보야. 나는 그 여자의 기억을 읽은 거야. 너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 네 몸 아래 깔려서 허우적거릴 때 그 여자의 눈가에 어렸던 눈물. 그 여자의 코 속으로 들어간 네 땀냄새까지도. 말보다 더 중요한 걸 알았는데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 여자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걸 읽었겠지. 도대체 어떻게 몇 년 전 K클럽에서의 기억이 그 여자에게 읽혔을까.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녹슨 기계마냥 빡빡한 혀를 억지로 움직이며 강윤이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강인도 민효도 자신들을 외계인처럼 쳐다보는 강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나 좀 봐.”

“너 왜 그래? 손에 든 건 뭐야? 어디 아파?”

그제서야 강윤은 자신이 포장한 딸기 상자를 그냥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에서, 정체불명의 민효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그 딸기 상자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민효의 정체도 의심스럽다. 도대체 어느 쪽이 내가 아는 민효이고 어느 쪽이 정체불명의 민효란 말인가?

“왜 그러고 있어? 너, 혹시 또 심장이....”

“아니야, 그게 아니야.....저기, 부엌에 있는 저 여자, 아니 부엌에 있는 민효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강윤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히 믿기 어려울 테지만, 강인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민효 역시 쌍둥이였어.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였지. 민효의 쌍둥이 언니(혹은 동생)는 그애들의 생모 손에 컸는데 이번에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만나려고 온 거야. 그래? 전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 최소한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지.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강윤에게 그와 같은 해명을 해 주지 않았다. 단지 민효가 의자에서 풀쩍 뛰어오르며 이렇게 외쳤을 뿐이다.

“나이디! 나이디를 부엌에 그냥 내버려뒀어. 맙소사! 내가 없으면 혼자 의자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애를 이렇게 오래 그냥 놔두다니, 내 정신 좀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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