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25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5



민효는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갔고, 강윤이 뒤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재빨리 다 나이디를 안고 거실로 돌아왔다. 다 나이디의 새까만 눈과 머리카락을 재빨리 훑어본 강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꽤 무거워 보이는데? 너 혼자 안고 다니기에는 버겁지 않아?”

“아니.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 네가 안아 볼래?”

“됐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강인은 장유경에 관해 이야기하던 도중 난데없는 강윤과 나이디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불쾌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한편 강윤은 부엌에서 나이디를 안고 나온 민효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애 따위는 없었는데. 아니, 애는 둘째 문제고 (하다못해 내 시선이 닿지 않는 바닥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있던 또 다른 민효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말해줘서 고마워. 네가 나이디 얘기를 안 해 줬으면 애를 그냥 내버려 둘 뻔했어.”

“난 그 얘기를 한 게 아닌데.....”

“그 딸기 내려놓고 앉아. 왜 장승처럼 서서 그래?”

강윤은 딸기가 든 상자를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졌지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제 2의 민효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정작 민효는 나이디를 안은 채 그대로 급히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 대신 강인이 그의 팔을 잡았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좋다. 이판사판이다. 그까짓 게 대수냐. 세상에 온갖 말대로 안 되는 황당무계한 일들이 수두룩한데, 막말로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인지 뭔지 하는 것도 나돌아다니는 판에, 그깟 김민효의 도플갱어 하나쯤 목격한 게 뭐 그리 충격적인 일이라고.

그렇게 해서, 강인과 부엌 식탁에 마주앉았을 때, 강윤은 다시 본연의 냉담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나 산 너머 산이라고, 이번에는 자신의 합법적인 도플갱어, 더구나 얼굴은 다르게 생긴 이란성 쌍둥이 형인 강인이 그를 괴롭히려는 참이었다.

“왜 왔냐?”

“내가 내 집에 오는데 왜 왔냐는 말은 또 뭐야?”

“그게 아니라 무슨 일 있느냐는 말을 하려던 거야.”

“아무 일 없어. 아까 딸기 봤잖아. 민효한테 그거 주려던 거야.”

“그게 다야?”

“그래.”

이때는 강윤도 자신의 파카 호주머니 속에 든 테이프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너 요즘 집에 자주 왔었냐?”

“그건 왜 물어?”

“내가 못 물어 볼 걸 물어 본 거 아니잖아?”

“ 나도 몰라. 집에 자주 왔던 건지 아닌 건지.....”

“내 참. 그럼 질문 바꿔서, 민효가 너한테 자주 가는 편이야?”

“나한테 자주 오는 건 아니고, 내 방한테는 자주 오지.”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내가 없는 동안 자주 왔다 간단 말이야. 가끔은 청소나 빨래도 해 놓더라. 역시 이래서 여자가 필요해.”

“허어. 그래, 그러다 간혹 집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겠구나.”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야?”

“민효 목.”

순식간에 강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때까지 그는 시종일관 느물거리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봤으면 알 거 아냐. 그 피멍. 너, 그 애 목줄기를 아예 물어뜯어 놓을 뻔했어.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민효가 가만 있든?”

“신경 꺼.”

날카로운 적의가 강인의 눈에서 번득였다.

“신경 켠 적 없다. 그런데, 죄 없는 애 목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오늘은 또 왜 온 거야? 혹시 그 때문에 그 멍청한 딸기 사 들고 온 거야?”

사실 딸기나 아이스크림이나 멍청하기는 마찬가지지. 나 역시 멍청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와서는 민효에게 잡수시라고 바치지 않았던가. 그 중에 한 두 개는 딸기맛 아이스크림도 있었을 것이다.

“형보다는 나아.”

강윤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인은 그런 그의 심중을 빨리 읽지 못했다. 아니 읽었다 해도 그로서는 확실히 못박아 두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만약 내가 없었으면 오늘도 민효한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군.”

“진짜 이렇게 재수없게 나오기야?”

“분명히 말하는데 민효 목에 손대지 마. 아니 입 대지 마. ”

“씨발!”

강윤이 탁자를 치며 일어섰지만 강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강윤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결코 강인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강인의 내부에 자리잡은 어떤 부분을 참을 수 없이 혐오했는데, 이제 그 어떤 부분이 막 밖으로 드러난 참이었다. 바로 이거다.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강인의 잔인함, 냉혹함. 그는 다정할 때는 한없이 다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제서야 그는 민효가 낙태를 했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애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거야. 강인이 변한 건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감정의 사이클이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도, 그애는 자신이 사랑했던 강인의 모습이 지금의 이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거야. 다정하고 자상하던 때조차도 언뜻언뜻 비치던 그 믿을 수 없는 비열함은 쌍둥이 동생인 나조차 고개를 돌리게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자상이니 다정이니 하는 건 온데간데없다. 강윤은 탁자 위에 내리꽂은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쯤 해서 그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강윤은 파카 주머니에서 카세트 케이스를 꺼냈다. 강인이 그토록 찾았던 문제의 그 테이프, 민효가 망가뜨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문제의 그 테이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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