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26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6



“이걸 갖다주려고 왔던 거야. 알겠어?”

이번에는 확실히 강윤의 판정승이었다. 카세트 케이스를 집어들어 테이프를 꺼낸 강인의 얼굴에 번진 당혹한 기색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건......이건, 민효가 망가뜨렸던 건데. 이어붙이지도 못하게 자근자근 부숴서 마그네틱 테이프가 싸그리 빠져나온 게 서랍 안에 그냥 들어 있었는데. 이게 왜.......”

강윤은 피식 웃었다.

“그 녹음 테이프랑 똑같은 걸 사려고 이 근처 레코드 점을 뒤졌다더군. 똑같은 건 없었지만 비슷한 건 있었나 보더라. 어차피 산산조각 내 놓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거라면서.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알겠어? 형 서랍 속에 들어 있었던 건, 그냥 공테이프야. 민효가 그러데. 어제 아침에 형이 이걸 책상 서랍 속에 넣는 걸 보고 몰래 가져왔다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자기도 모르겠지만, 가지고 있을 수 없으니 내게 맡아 달랬어.”

강윤의 목소리를 뇌에 입력하는 동안 강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형제가 서로의 의식을 가다듬는 동안 자상(刺傷)에 가까운 뼈아픈 감정이 두 사람 사이를 짧게 가로질렀다. 이윽고 강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은, 날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야. 그건 너도 인정하지?”

“인정해.”



잠시 후 민효가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혼자 남아 식탁에 엎드린 강윤의 죽어버린 듯한 넓은 등이었다. 민효는 나이디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침대로 들여보내느라 바빴으므로, 그 동안 강인과 강윤이 부엌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나이디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뜬 후 두 사람이 뭔가 대화를 했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싸웠으리라는 데까지도 생각이 미쳤다. 불안해하며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지만 어디에도 강인은 보이지 않았다.

“인이 어디 갔어?”

강윤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갔나? 너, 인이가 나가는 거 못 봤니?”

“......봤지.”

“어디 가는지도 말 안 하고?”

“어딜 가건 내가 알 게 뭐야.”

“윤아!”

거의 질타에 가까운 민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어깨 사이로 머리를 묻은 채 되물을 따름이었다.

“너, 말이야. 너, 그거 알아?”

“그거라니, 뭘?”

“여기에 네가 있었다는 거. 네가 아까 거실에서 강인하고 얘기하는 동안, 여기에 또 다른 네가 있었다는 거 말이야.”

“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야? 술 마신 것도 아니잖아.”

“아니야. 너 날 그렇게 못 믿겠냐? 여기에 네가 있었다고. 이 집안에 김민효가 두 명이란 말이야. 잘못 본 것도 헛것을 본 것도 아니고 귀신을 본 것도 아니야. 틀림없는 너였다고!”

“소리 지르지 마. 무섭잖아.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내가 강인하고 얘기하는 동안이었다면 나이디가 여기에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거야.....”

“네가 여기에 있었어.”

민효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강윤의 어깨를 쳤다. 그리 세게 친 것은 아니었다. 반은 농담하지 말라는 뜻이었고 반은 갑작스러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가벼운 제스추어에 불과했다. 정신 멀쩡한 강윤의 집요한 주장이 그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손이 어깨에 닿기가 무섭게 강윤은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민효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다 유리문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틀거렸다. 강윤은 잽싸게 그녀가 주저앉지 않도록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부축은 이내 포옹으로 변했다. 그녀로서는 반항할 힘도 없었고, 강윤의 혀가 목이 아닌 입 속을 파고드는 것 역시 막을 도리가 없었다. 민효의 몸이 유리문에 부딪치면서 유리문은 천둥 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냈다. 온 몸이 쓰라렸다. 내 꼴을 봐. 너희들, 같은 피가 섞인 두 남자 때문에 내 온 몸이 아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어느 한 가닥의 신경도 편안하지 않아. 그리고, 뺨을 스치는 축축한 감촉이 민효를 놀라게 했다. 물기? 눈물? 윤이가 울고 있었던 걸까? 윤이가? 다섯 살 때 내 품에 안겨 어느 순간 뚝 멈춰버릴 것처럼 가파른 숨을 쉬던 그 윤이가? 어느 순간 민효는 자신의 뺨을 스치는 습한 감촉이 강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 역시 울고 있었고, 두 사람의 눈물의 서로 섞여 두 사람의 얼굴을 젖은 종이처럼 만들었다.

민효에게서 입을 뗀 강윤은 도망치다시피 부엌을 나갔다. 민효는 잠시 그대로 서서 입가에 흥건한 침을 손등으로 닦다가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강인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윤아! 잠깐만......인이는, 어디 갔어? ”

현관에서 신을 신던 강윤의 귀에 민효의 목소리가 들어갈 여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허망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선 민효의 귀에 현관문이 아닌 절망의 문턱과 마주선 강윤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가 목소리가 끌어안은 통증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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