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8
어느 순간 맹렬하게 치솟던 강인의 목소리가 그쳤다. 민효의 귀를 타고 들어가던 바늘과도 같은 감각이 일시에 끊어졌다. 민효는 폐포가 터지도록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끌고 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못했다. 계단이 나타나자 그녀는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라갔다. 싸늘한 바깥 바람이 그녀의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잡은 강윤의 가슴을 덮은 티셔츠의 줄무늬를 볼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질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대답했다.
“또 쓰러지는 줄 알았어.”
강윤은 뻣뻣해진 민효의 몸을 억지로 끌다시피 하며 그녀를 데리고 걸었다. 다행히 얼마 걷지 않아 작은 편의점이 나타났다. 편의점 앞에 놓인 둥근 탁자와 의자를 본 강윤은 즉각 민효를 의자에 앉히고 편의점에서 냉커피를 산 후 뚜껑을 따서 민효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입 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카페인을 함유한 차가운 수분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비로소 맑은 정신이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녀는 말없이 강윤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길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의 냉담하다고 해도 좋을 법한 그 태도가 오히려 민효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혔다.
“너, 용케도 날 찾아냈구나. 네가 와 있을 줄 몰랐어.”
“네가 거기에 가 있을 줄 알았으니까.”
“어떻게 알고?”
“집에 갔었어. 네가 없길래 어딜 갔나 했는데, 갑자기 인이한테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맞췄네.”
“네가 바로 맞추게 만들잖아.”
“무슨 뜻이야?”
“그만둬!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 그만 집에 돌아가. 바래다 줄 테니까. ”
“인이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니?”
“노래.......부르다가 갑자기 멈췄잖아. ”
“몰라. 난 인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 네가 금방 기절할 것 같아서 너 데리고 나오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래.......가슴이 너무 심하게 뛰었어. 그뿐이었다면 괜찮았을 거야. 그 다음에는 걸레를 손으로 돌려 짜는 것처럼 가슴을 돌려서 쥐어짜는 것 같았어. 왜 나는 그 곳에서 인이의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그렇게 아픈 거지?”
“그 생각은 하지 마. 네가 그 곳에 가서 인이를 보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강윤은 민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거리는 한산했고 간간히 지나다니는 차들이 내는 엔진 소리와 타이어 소리 이외에는 어떤 소음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민효와 강윤은 각자의 의식 속에 생겨난 어둡고 깊은 공백을 채우지 않고 걸었다. 그들이 내는 발걸음 소리는 작고 가냘팠으나,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런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을 터였다.
강윤은 이따금 고개를 숙여 민효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는 무덤에서 막 빠져나온 시체처럼 생기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를 움직이는 생명의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가서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의 뒤에서 억지로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인이 목소리 말이야......”
“응?”
“아까 노래부를 때, 인이 목소리. 조금 이상하지 않았어? 원래부터 그런 목소리는 아니었잖아.”
강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동조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용케도 알아차렸구나. 그 역시 강인의 목소리에 말할 수 없이 미묘한 이상이 생겼음을 애진작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효 역시 그 미묘한 이상을 포착했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했다.
“대답 좀 해 봐. 맞아? 아니야?”
잠시 사이를 두고 강윤은 대답했다.
“맞아. 네가 바로 맞췄어.”
“왜 그렇지? 인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궁금해. 그리고 불안하기도 하고.”
“신경......많이 쓰여?”
“그래.”
잠시 사이를 두고 민효는 자신의 대답을 고쳤다.
“아니, 사실은.......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무슨 생각?”
강윤은 민효의 뭐라고 대답할지 두려웠다.
“그거 참, 쌤통이다, 라고.”
“뭐라고?”
최소한 그를 두렵게 만들 만한 대답은 일단 비껴갔다. 그러나 예상 외로 어이없는 대답이 나왔으므로 강윤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쯤은 악의를 품고 있기까지 했지만, 그 악의는 그녀 자신을 갉아먹을 듯 희미한 고통까지도 함께 담고 있었다.
“이제는 끝난 거야. ”
“뭐가?”
“욕심만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고, 거기에서 오는 분노나 상처를 목소리에 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그애가 노래하는 방식이었어. 이제는 그 노래를 끝낼 때가 온 거야. 이제는 선택해야 해. 계속해서 음악의 여신하고나 잘 것인지, 아니면 장유경과 잘 것인지......아니 선택할 필요도 없겠네. 장유경 그 여자가 음악의 여신이잖아. 최소한 인이가 날 선택하지는 않을 거야. 선택한다 해도 너무 늦었어. 이미 끝났어.”
“무슨 뜻이야?”
민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숨의 여운이 실타래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인이하고는 자지 않을 거야.”
“흥.”
강윤은 코웃음을 쳤다.
“너 네가 얼마나 웃기는지 알고 있어? 그런다고, 그런다고 해서........”
강윤이 별안간 말을 끊자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민효는 점차 의아해하는 표정을 얼굴에 띄우며 그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알아. 그런다고 해서 인이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지. ”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마침내 그들은 버스 정류장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을 5미터쯤 앞둔 지점에서 나란히 멈춰섰다. 두 사람의 발이 함께 정지한 순간 강윤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넌 내 마음, 내 생각, 나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