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낡은 꿈을 불러들이는 시간

kalsavina의 인형이야기

by Kalsavina

한때는 절실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꿈들이 있다. 너절하고 켸켸묵은, 낡은 꿈들 말이다. 한때는 머릿속을 점령했던 부질없는 공상들과 소망들은 제법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상상이었다. 물론 살면서쌓여가는 세월의 퇴적물에 파묻혀 기억의 단층 어딘가에 화석처럼 묻힌 그런 꿈들이다.

그런 꿈들이 간혹 현재로 소환되는 밤이 찾아온다.

요즘들어 더더욱 편애하게 되는 가을이. 소다에게 미안해진다.

참 뜬금없이 그런 골동품같은 꿈들을 발굴하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가을이가 아니면 릴로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가발을 손질하게 된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바늘을 잡는 것조차 힘들지만, 신기하게도 몽롱한 머릿속은 과거를 꽤 정확하게 헤집어 잊혀졌던 꿈들을 끄집어낸다.

유럽의 어느 나라 호젓한 뒷골목을 누비는 내 모습(강도나 성폭행을 염려할 필요 없는)이 등장하는가 하면.

근사하고 날씬하며 눈매가 사나운 록 스타의 애인이 된 내 모습도 있고.

유명 작가 되어 팬싸인회를 하는 내 모습도 있다.

파티를 열어 주위를 마구마구 행복하게 하는, 억만장자인 내 모습도 튀어나온다. 사실은 더 너절하고 유치하며 실소를 자아내는 공상들과 단상들도 많은데,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기억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루뭉술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낡은 꿈들을 불러오는 건, 언제봐도 기적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책상요정 언니들이다.

소다와 예무하. 원단이 화려한 의상은 대충 만들어도 불품없는 느낌을 주지 않아서 좋다.

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기억의 단층 어딘가에 숨어 잠들고 나면, 남는 건 생활에 찌들어 지친 내 모습만이 남는다. 실로 서글픈 노릇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건 나만이 아니다.

낡은 꿈을 대신할 수 없지만, 낡은 꿈을 간직하게 도와주는 호사스러운 아름다움 또한 곁에 남는다.


그러니까, 불필요하다고 해서 간직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래되고 빛바랜 꿈이라는 건 그런 거다. 이뤄질 가망이 없다면, 간직할 권리라도 누려야 하는 게 아닐런지.

그리고 그 꿈들 가운데 하나는 어찌됐건, 현실이 되었다. 언젠가 사랑스러운 인형을 만나는 꿈을 꿨던 기억 또한 머릿속 어딘가에는 분명히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쩌면 이제는 원하지 않게 된 다른 꿈들 또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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