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lsavina May 21. 2018

수필] 커튼

Curtain in my dream

커튼



살면서, '내 커튼'을 달아본 기억이 없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만의 커튼을 달 나만의 집이 없었다는 뜻이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은 부모님의 집이었고, 그 집에서는 어머니가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셨으며, 모든 집안의 대소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어머니께서 주관하셨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 집에 칠 커튼을 고를 권리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탐해서도 안 되는 권리였다.

결혼 후에는 계속해서 전셋집을 전전했다. 내가 아닌 집주인이 버젓이 존재하는 집을 빌려 사는 동안, 나는 어김없이 내가 세든 집에 미리 설치된 블라인드를 없애고 나만의 커튼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도 있었던 기회는 집안에 찾아온 우환과 더불어 시원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 이후 계속해서 월세집과 임대주택을 전전하는 동안, 감히 나만의 커튼을 골라 거실과 발코니 사이를 근사하게 장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가슴 뿌듯한 기쁨이리라.

딱 한 번, 친정집에 칠 커튼을 손수 살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호기롭게 들어간 커튼 전문점에서 나는 터무니없이 비쌀 뿐 좀처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커튼들을 구경하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윽고 고른 커튼은 내가 살 수 있는 가격의 적정선에서 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에 의한 커튼이었을 뿐, 내 취향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커튼이었다. 어정쩡하게 어머니의 취향에 맞춰진, 철저하게 가성비와 타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저렴하지 않았던 그 커튼은 10년 동안 내 친정집을 묵묵히 지켰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여전히 나는 나만의 집을 갖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내가 원하는 커튼을 내 집의 발코니에 근사하게 매달 권리 또한 마음으로 유보해놓은 상태다.

하얀 레이스 커튼은, 아마도 거의 모든 여자들의 마음 속에 간직한 로망일 테지만,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편리하고 깔끔하기는 하지만 나만의 센스를 발휘할 여지가 없는 블라인드를 구태여 정성스럽게 설치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런 스타일의 커튼을 원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내가 원하는 커튼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막연하게 생각해보는 나만의 커튼이 될 자격 중 단연 첫 번째는 '쉽게 싫증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검은색은 안 된다'는 조건. 어떤 색깔이든 상관없지만 검은색 커튼만은 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다. 세 번째로, 나만의 커튼은 반드시 나만의 보금자리를 장식해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대여한,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는 공간에 나만의 커튼을 칠 수는 없다.

도대체 어쩌다가 커튼 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달지 못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인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커튼 하나 때문에 주어진 날들을-지나온 날과 다가올 날들을 포함한 모든 날들을- 원망한다는 것도 우습기는 하다.  

오래되고 진부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커튼을 걷고 눈부신 아침 햇살을 살며시 확인하는 여주인공의 등 뒤로 다가들며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는 남자. 오래되고 진부한 소원이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을 테지만, 분명한 한때의 현실이었을 그런 순간 말이다.

꿈꾸는 모든 것이 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의 커튼을 나만의 발코니에 달아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나만의 커튼을 달고 싶다는 꿈은 그 어떤 환상보다 분명한 현실이 되어 있다. 10년 전 부모님의 집에 달 커튼을 골랐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서, 지금은 얼마든지 내 취향에 맞는 커튼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커튼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아름다운 커튼을 꿈꾸며 한숨을 쉬는 일도 없다. 다만 '나만의 커튼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생'에 대해서만 잠시 골똘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생이 있으니까, 커튼 하나쯤 달지 못하는 인생이 되었다고 해서 불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창문에 커튼을 매다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을 해내기도 했으니까, 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다만, 오늘도 어김없이 오롯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수많은 벽 속의 여자들에게 일일이 던져 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생겼다.


당신은, 당신만의 보금자리에서, 당신의 공간에서.

당신의 공간으로 햇빛을 들여보내는 창문에.

당신만의 창문에, 당신만의 커튼을 달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하잘것없이 보이는 커튼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삶의 기쁨을 내포하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그 예쁜 아름다운 커튼이 가려주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나요? 당신과 당신의 동반자 사이에 오갔던 내밀한 기쁨들, 아래층을 화나게 하는 당신 아이들의 부산스러운 뜀박질, 풍성하게 퍼지는 웃음소리, 때로는 고함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만들어내는 당신과 당신 가족들, 그들의 표정들, 바닥을 스치는 발걸음들, 오가는 과일접시와 귀따가운 소음을 내보내는 TV.

당신의 취향대로 꾸며놓은 식탁보와 카펫 그리고 소파들.



꿈꾸는 모든 것이 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초대받은 친구들의 집에서 보는 발코니의 호사스러운 커튼은, 여전히 내게는 분명하게 다가오는,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나만의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력이 아니다. 기적이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삶이 내게 선물한 사소하지만 위대한 기적 말이다.

그 모든 기적들 덕분에, 행복은 그 행복을 간직한 사람들의 커튼 뒤로 조심스레 감추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간직한 행복을 음미할 겨를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여전히 자신만의 커튼을 소망하는, 한 사람이 있다.

과거의 어느 찬란했던 한 순간, 자신만의 방에 자신만의 커튼을 칠 기회를 물거품처럼 날려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레이스처럼, 하얗게, 화려하고도 덧없는 물거품처럼.

꿈꾸는 모든 것이 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날려보낸 모든 행복의 계산서와도 같은 형태로 내게 되돌아올 나만의 커튼을 떠올린다. 먼 미래의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내가 내 운명과도 같은 커튼을 발견했을 때, 내가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기를 나는 간절히 기원한다. 나만의 아름다운 커튼만큼은 꿈으로 남겨 두어도 좋다. 하지만, 그 커튼을 달 나만의 공간에 대한 염원까지 하염없는 꿈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는 자의 소박한 욕심이다. 그 욕심의 한 가운데에, 여전히 버릴 수 없는 먼 옛날의 추억과도 같은, 바람을 맞아 하늘거리며 하얗게 흔들리는, 부드러운 레이스 커튼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다이스Ⅱ-37(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