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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May 26. 2018

단편] 중국 나무젓가락(2003)

China Wood-chapstick(2003)

중국 나무젓가락(China Wood-Chopstick)



   참 지독한 비였다. 폭우는 아니었지만,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가 하기를 하루에도 수십차례 되풀이하는 비가 장마철도 아닌데 근 열흘 동안이나 계속 내렸으니 말이다. 그 비는 전국을 수해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고, 우리들의 가슴 속에까지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적어도 두 사람, 현지와 나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수마가 각각의 어지러운 가슴속을 찾아와 긴 손톱으로 흉터를 내 놓았다. 그러나 둘 다 각자의 흉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가슴을 할퀸 수마의 실체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모를 터였다. 그것은 비가 아니었다. 아마 끝없이 펼쳐지는 흙탕물의 물바다였을 것이다. 정작 나 자신의 가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현지의 가슴 속에는 흙탕물의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열흘 이상이나 이 땅을 햇빛과 격리시켰던 비가 최초로 내리기 시작한 날 나는 일찍 잠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지가 현관문을 골백번 두들겼다 한들 잠귀가 어두운 내가 꼭두새벽에 잠을 깨지는 못했으리라고 단정한다. 우중충하고 춥고 습기로 뒤덮인 새벽에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필요 이상의 인내심을 요구했다. 방바닥에 발을 디디자 싸늘한 냉기가 전해져왔다. 아직 보일러를 가동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중학교 때 자주 연습하던 마스게임의 보조음악을 연상시키는 초인종의 멜로디가 줄기차게 귓가에 울려댔다. 이건 흡사 자명종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신경질적으로 인터폰을 들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정화야. 나다. 현지다.”

믿기 힘든 일들이 속속 일어나고 있었다. 내 상식이 허용하는 추측대로라면 그녀는 서울에 있는 그녀의 보금자리에서 남편의 품에 안겨 단잠을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비오는 날 꼭두새벽에 혼자 사는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를 용감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달리 다른 누구의 목소리라고도 말할 수 없는 현지의 목소리가 아닌가. 나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흠뻑 젖은 파란색 삼단 우산을 손에 든 현지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나 좀 들여보내 줘.”

풀어해친 머리는 잔뜩 잔머리가 일어 마치 시든 안개꽃 줄기를 뒤집어쓴 듯했다. 게다가 우산이 굵은 빗줄기를 그리 알뜰히 막아주지 못했던 모양인지 어깨며 팔이며 할 것 없이 온통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나는 멍청히 입만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고 결국 그녀는 들여보내달라는 말로 공중에 뜬 내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사실 잠이 완전히 깨지도 않았다.

거실의 불을 켜고 곧이어 부엌의 불을 켠 다음 나는 그녀가 내미는 코트를 받아들어 부엌에 있는 의자 팔걸이에 걸쳤다. 현지는 들어올 때의 사뭇 겁먹은 표정을 차츰 거두고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가스렌지에 불을 켜고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우리 두 사람 다 새벽의 음습한 침묵이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마냥 말을 하지 않았다. 물이 끓을 때까지 현지는 이따금 커튼 사이로 보이는 새벽하늘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따뜻한 두 잔의 커피가 식탁 위에 놓이자 나는 손짓으로 현지를 불렀고 현지는 부엌으로 들어와 가스렌지를 등지고 앉은 나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미안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허공을 뚫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는 내 질문이었고 ‘미안해’는 현지의 대답이었다.

“너 새벽잠 많은 거 내가 아는데......정말 미안하게 됐어. ”

“너야 원래부터 내가 제일 만만했잖아. 빨리 불어. 뭣 때문에 이 꼭두새벽에 대구까지 왔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내 마음대로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남편하고 싸웠구나.”

현지의 젖은 몸은 조용하다. 습기가 그녀의 입을 봉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면서도 우리 둘 다 새벽 냉기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일러를 가동시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전기난로를 생각해내고 거실로 가서 전기난로 콘센트를 꽂은 후 나직하게 현지를 불렀다. 조금은 분주한 내 몸놀림을 바라보는 현지의 눈은 약간 젖어 있었다. 슬픔보다는 두려움에 찬 눈이었다.

“말해 봐. 무슨 일 있었는지.”

“아무 일 없었어.”

조금만 다급한 어조로 대답하는 그녀는 아무래도 말을 하기 싫은 눈치다. 그렇다면 대답을 굳이 독촉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내가 거짓말 여부를 추궁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아니야.......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서 나도 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이렇게 되면 분명히, 분명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서 너한테 온 거야. 나, 나 말이야. 죽고 싶어졌어.”

그럴 테지. 이 나약한 것아. 건실하고 능력있고 허우대좋은 사내와 결혼해 신접살림 차린 지 어언 반 년이 다 지난 지금에 와서 느닷없이 죽고 싶다고 하면 잘도 놀라거나 동정해 주갰구나. 나는 냉담하게 반문했다.

“그러지 말고 현실적인 문제를 말해봐. 내가 볼 때 너 분명히 네 남편하고 트러블 생겨서 오밤중에 가출한 거 맞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잖아.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하면서 느닷없이 죽고 싶다 그러면 그걸 나보고 알아들으라는 거야?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딱 네 말이 그래. 그거 알아?”

현지는 입술을 깨물며 커피잔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알아, 아는데......그이랑 싸운 건 아니야......그이랑 싸웠다면 한밤중에 도망나오지 않았을 거야. 죽더라도 집에서 죽었을 거야........그런데 이상해. 자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이야......나도 내가 무섭단 말이야.”

참으로 너다운 발상이로구나. 그러나 현지와 어떤 주제로든 논쟁을 벌이기에는 머리가 너무 무거운 상태였다. 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한 시간 정도는 눈을 붙여도 될 만한 시간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자라.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하겠다. 나 아침에는 출근해야 되니까 오래는 못 자거든. 급한 일 없으면 오늘은 여기 있다가 가라. 퇴근하고 나서 역에 같이 가자.”

“저기, 정화야. 나, 서울에서 방금 내려온 거 아니야. 사실은, 그저께 오후에 대구에 와 있었어. 이모 집에 있어. 그이한테 말하고 왔어. 지금도 이모집에서 오는 길이야.”

하지만 왜 하필이면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한밤중도 아니고,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나 다름없었던 새벽녘에 여길 와야 했단 말인가? 문득 내가 그녀의 숨겨놓은 애인이라면 상당히 로맨틱한 상황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레즈비언이 아니고 현지에게는 하늘같은 서방님이 있었다. 내게도 왕년에는 서방님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확실히 나는 로맨틱한 상황을 기대했었나 보다. 새벽녘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현지가 아닌 오래 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가슴 설레일 추억 속의 애인조차 없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줘야 되겠니?”

“조금만 있다가 갈게. 그냥 옆에만 있어 줘. 아무 말 안해도 되고, 피곤하면 자도 돼. 그냥 옆에 좀 있게 해 줘. 아침에는 괜찮아질 거야. ”

아침에는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관자놀이를 치고 지나갔다. 그럼 지금은 괜찮지 않다는 말인가? 딴은 그런 뜻이 되겠군. 나는 쿠션을 가져와 아직도 몸을 조금씩 떠는 현지 옆에 드러누웠다. 전기난로의 열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등이 바닥에 닿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지만, 생각대로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고 여드름이 송송 난 현지의 턱을 한동안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새벽에 문 좀 열어달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난 나는 분명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 왜 그래? 그 많은 낮시간 밤시간 다 제쳐두고 왜 새벽에 온다는 거야? 그것도 며칠씩이나. 너 혹시 나 출퇴근 시간 걱정하느라 그러니? 그러려면 차라리 저녁에 와. 6시 이후로는 괜찮단 말이야. 왜 하필 꼭두새벽이야......”

그러나 현지의 낙심하는 표정을 보느니 차라리 새벽잠을 설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지는 보기보다 내 성격을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매몰찬 인간이 못된다는 것쯤은 확실하게 파악한 친구였다.

“너한테는, 너한테는 진짜 미안해. 미안한데.......모르겠어. 나중에는, 이 신세 꼭 갚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신세는 무슨 신세야. 난 지금 너 하는 게 하도 수상해서 그러는 거야? 이모 집에 있을 형편이 못 되는 거야? 그럼 그냥 여기 와 있어.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방님 혼자 놔두고 석달열흘 여기서 눌러붙어있지는 않겠지. 그래, 새벽마다 너 문 따 주느니 그게 낫겠다. 빨리 이모 집 가서 짐 챙겨 와.”

“정화야. 제발 그러지 마. 며칠만, 단 며칠만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해 줘. 응? ”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커튼을 열어 젖히자 빗방울로 보기 흉하게 얼룩진 유리창이 회색 하늘을 보여주었다. 곧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니 방해받은 새벽에 대한 불쾌감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이렇게 새벽잠을 방해받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한테 줄 게 있어.”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는 나를 지켜보던 현지가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핸드백을 가져왔다. 핸드백이라고는 하지만 중학교 때 들고 다니던 화판을 연상케 하는 못생긴 모조 루이비통 가방이었다. 그녀는 지퍼를 열고 빨간 천에 싸인 길죽한 것을 꺼냈다.

“이게 뭐야?”

빨간 천을 묶고 있던 노란 고무줄을 풀자 그 안에서 젓가락이 나왔다. 튀김요리를 할 때 쓰는 젓가락보다는 조금 작지만 보통의 젓가락보다는 큰, 다소 어정쩡한 길이의 나무젓가락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흐르는 흑갈색의 젓가락 손잡이 부분에는 모란이 새겨져 있었다.

“웬 젓가락이야?”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대. 사촌 오빠가 중국 여행갔다가 사 가지고 와서 나한테 선물한 거야.”

나는 젓가락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우리나라의 여느 젓가락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싸구려 젓가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지 자신이 한동안 사용했던 모양인지 손잡이에 새겨진 모란이 여기저기 조금씩 닳아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귀티가 나는 젓가락이었다. 한 마디로 늙었지만 품위있는 골동품을 연상케 했다.

“오빠 말로는, 그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입맛이 돋아서 밥이 맛있어진대. 그래서 사실은 나도 오랫동안 썼었는데, 정말로 그 젓가락으로 먹으니까 밥이 맛있더라.”

“그래?”

일종의 자기최면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쓰던 걸 왜 갑자기 가져왔어?”

“갑자기 주고 싶어졌어. 사실은, 며칠 전까지도 계속 이 젓가락을 썼었어. 쓰다 보니까 점점 이 젓가락에 길이 들어서인지 자꾸 이 젓가락만 쓰게 되더라구. 그런데 며칠 전에 이걸로 밥을 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이 젓가락을 쓰는 동안, 적어도 나한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라구. 내 병도 많이 나았고, 좋은 사람하고 결혼도 했고.....”

확실히 요 몇 년간 그녀에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좋은 일만 일어난 거야. 이 젓가락이 나를 지켜줬나 봐. ”

“그런데 왜 이걸 갑자기 날 주냐구.”

“주고 싶으니까. 이제 나한테는 없어도 될 물건 같아서 말이야.”

사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쓰던 것을 선물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물은 반드시 새것이어야만 한다는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소 망설이기는 했지만 못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수상한 선물이 아니라 그 선물을 내미는 현지의 수상한 언동이었다.

“너 꼭.......어디 먼 데 가려는 사람처럼 말한다? 진짜 왜 그래? 느닷없이 새벽에 와서는 죽고 싶다고 말하질 않나, 쓰던 젓가락을 선물하질 않나? 너 네가 지금 정상이 아닌 건 알고 있는 거니?”

“알아, 아는데.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가 자살 같은 거 할 사람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거. 이 젓가락은 정말로 이제 내 손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는 젓가락이고, 누구보다도 너한테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젓가락이 문제가 아니야. 네 말이 이상하잖아. 꼭 다시 못 볼 사람한테 유품 남기는 듯한 네 태도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건 그냥 가져. 차차 말해 줄게. ”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섰고 나는 회사로, 그리고 현지는 자신의 이모집으로 각각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 앞 4차선 도로에서 우리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뒤돌아서는 현지가 쓴 우산을 보니 살이 하나 빠져 둥글게 펼쳐진 육각형 윤곽의 한쪽이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가여워졌다. 살이 빠지거나 망가진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처량함이란 매우 독특해서,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넘어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슴에 품게 만든다. 나는 나 자신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에 눈에 비춰지길 원치 않았다. 나는 말짱하고 깜찍한 내 우산을 의식하며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본래 몸도 마음도 허약했던 현지였지만, 그렇다고 신경정신과를 찾아야 할 만큼의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동안 집안 문제를 혼자 처리하고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얼마간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 인연은 생각도 못한 시기에 찾아오는 것인지 그녀는 병원에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고 얼마 후 결혼했다. 그 때 이미 나는 남편과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신혼여행 갔다오고 나서도 별 문제는 없었어. 아니 아주 좋았어. 그이는 성실했고 자상했거든. 지금도 그래. 정말 더 이상 바란다는 게 죄스러울 정도야. 그런데, 두 달쯤 전이었을 거야. 낮에 청소기를 돌리다가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소파에 누워서 조금 잤거든. 그런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기에 그이가 이렇게 일찍 퇴근했을 리 없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그냥 누워 있었어. 아니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못 일어나겠더라구. 곧 어떤 남자가 방에 들어왔는데,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끊은 현지는 느닷없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왜 나한테 미안한 일이야. 하긴 네 남편한테는 좀 미안하겠다. 그거 꿈이었지?”

“.....그는, 들어오더니 곧장 내 옷을 벗겼어. 정말 아무 저항도 못 하고 꼼짝없이 당했어. ”

꿈 얘기를 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무리 현지가 현관문 단속을 허술히 한다고 쳐도(실제로 허술하게 할 애도 아니지만) 경비가 삼엄한 아파트에서 대낮에 낯선 사람이 침입해 가정주부를 강간한다? 뭐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상식적으로 쉽게 믿기지 않는 얘기다. 아니 뭐야. 꼭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잖아.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닌데.

“......깨 보니까 꿈이더라. 그런데 그날 저녁때 그이가 갑자기 밥을 먹다가 화를 내는 거야. 당신 낮에 현관문 제대로 안 잠그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아파트라지만 들어오고 나갈 때 문 꼭꼭 잠그라고. 아파트 사는 자기 동료가 실수로 현관문을 안 잠그고 나갔다가 도둑을 맞았다나. 그이는 내가 한두 번 현관문을 잊고 안 잠근 걸 눈여겨 봐뒀나 봐.”

“그래서, 그것 때문에 널 때리기라도 하던? 아니면 두고두고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던?”

“그렇지는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저이는 어쩌면 내가 낮에 꾼 꿈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관문 자물쇠를 감시하듯 날 감시하고, 현관문 단속하듯 날 단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간단히 말해서, 너 공상과다에 결벽증이다.”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날 이후로 계속 새벽에 잠을 깨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계속 새벽에 그가 꿈에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곤 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었는데도 새벽에 자꾸 잠을 깨는 거야. 별다른 이유도 없이. 너 새벽에 불이 완전히 꺼진 방에서 혼자 깼을 때의 두려움이란 정말 묘한 거야. 목이 졸리는 것 같고, 사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자꾸 쳐들어. 그이를 깨우고 싶었지만 그이는 잠들면 시체거든.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야. 아무리 불안하고 아무리 무서워도 그이를 깨울 수가 없었어. 그러다가 네 생각이 났어. 갑자기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찾아온 거야. ”

“날 찾는다고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 처음에는 악몽을 꾸다가 나중에는 안 꾸게 되더라며? 아마 조금만 더 참으면 새벽에 깨지도 않게 될 걸. 그런 걸 가지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오다니 너 정말 웃긴다. 하기야 날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 그건 감격할 일이다만.”

내 말을 조용히 듣던 현지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전 남편, 요즘 연락 오니? ”

“연락할 일도 없지만 하려고 해도 못할 거야. 아마 지금도 미국인지 브라질인지 호주인지를 여행하고 있을 테니.”

바로 그 역마살 때문에 같이 살 수가 없었단 말이다. 일단은 그걸로 내 복잡한 이혼 사유를 간단히 일축하도록 한다. 현지는 잠시 후 음악을 틀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새벽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 서울에서 그이하고 자다가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 무섭기만 했는데......”

전기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피오나 애플의 <First Taste>를 듣는 현지를 보다가 퍼뜩 깨달았다. 현지의 꿈 속에 나타난 남자는, 아마도 현지의 옛 애인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증상을 겪고 있는 거야. 나 자신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녀를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나흘을 함께 보내고 나니, 그렇게 새벽잠이 많던 나 자신도 어렵지 않게 새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생활패턴이 규칙적이 되면서 컨디션이 좋아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나 자신에게는 득이 되었다. 현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언제까지 그녀가 새벽 방문을 계속할지가 의문이었다. 틈날 때마다 서울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그녀는 별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닷새째였을 것이다. 그때까지 비는 단 한 시간도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TV를 틀면 여기저기서 어느 도로가 침수되었으니 어느 강이 범람 위기를 맞았느니 하는 우울한 뉴스가 잇달아 튀어나왔지만 대구는 비교적 호우에 강한 지역이라 이렇다 할 만한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길에 구두와 옷을 적셔놓은 비 때문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새벽 4시쯤에 잠에서 깬 나는 여유롭게 현지를 기다렸고 곧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내가 문을 열어 주기로 한 후로는 현지는 초인종 대신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것으로 초인종을 대신했기 때문에 나는 약간 의아해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현지의 남편이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현지일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그의 출현에 앞서 우선 내 파자마 차림에 당황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허겁지겁 면바지와 울 스웨터를 걸쳐 입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초조한 얼굴로 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현지가 여기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나는 수선을 떨지 않고 그를 소파에 앉힌 후 녹차를 끓였다.

그는 키가 크고 훤칠했으며, 미남은 아니었으나 호남이었다. 안경을 꼈지만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약간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 탓인지 그리 학구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하늘색의 얇은 잠바를 입은 그는 흡사 군대를 제대해서 갓 복학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내가 그를 본 것은 딱 한 번, 현지의 결혼식장에서였으니 내가 아무런 인사 없이 그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는 것도 어찌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잊혀지는 평범한 부류의 외모를 가진 사나이는 아니었다. 언뜻 내 전남편의 햇볕에 탄 까무잡잡하고 넓적한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들은 무의식중에도 남의 남자와 자신의 남자를 비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전남편은 어디까지나 전남편일 뿐 내 남자는 아니다. 나로서는 단지 현지의 남편과 비교 대조할 다른 남자가 없어서 그를 떠올린 것이다.  

“잠바는 저 주세요. 옷걸이에 걸게요.”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혹시 그랬다가는 집사람이 도망갈까 봐......”

“현지는 여기 없어요. 이모 집에 있는 걸요?”

그러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 하지만 이모님 댁에 찾아갔더니 집사람이 친구 집에 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저는 대구에 남아 있는 집사람 친구가 정화씨 말고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현지는 두 사람을 사이좋게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지난 며칠 동안의 현지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고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언뜻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정화 씨 말대로라면, 지금 이 사람이 와야 할 시간 아닙니까?”

“그러게요. 안 오네요. 무슨 일이지? 걱정되네요.”

“이모 집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면 도대체 어디서 잔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자기 처신도 잘 못하는 그런 애 아니에요. 얼마 전에 수성구 쪽에 살던 현지 친한 친구가 미국 갔다가 귀국했다 그러던데, 제 생각에는 거기 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내 거짓말이다. 그는 초조해하며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가 이빨로 입술을 긁다가를 반복했는데, 그게 그의 버릇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어쩔 줄 몰라하며 뒷머리를 손으로 긁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정말. 새벽마다 집사람이 찾아왔단 말이지요? 이거 정화씨도 그렇지만 부군께 폐를 끼쳐 드린 거나 아닌지......쓸데없는 오해나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부군요?”

“예. 그러니까 정화씨 바깥분......지금 주무시고 계실 테니 일부러 깨우실 필요는 없겠지만......”

“현지가 아무 말 안 했나 보군요. 저는 남편이 없답니다.”

“예?”

“이혼했거든요. 얼마 전에. 아, 현지 전화인가 봐요.”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를 든 내 귀에 예상대로 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꿔 달라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팔을 뻗어 그만두라는 신호를 한 후 캐묻다시피 현지를 추궁했다.

“너 지금 어디야? 너 이모 집 아니지? 왜 안 왔어? 지금 어디 있어?”

“미안해. 사실은 여기, 여관이야.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내일은 꼭 갈게. 내일 만나서 얘기해.”

일단 전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을 한 나는 현지가 전화를 끊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후 현지의 남편에게 현지가 내일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그가 여기 온 사실을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한 후 내일 새벽에 그녀를 데리러 오라고 말했다. 그는 난처하다는 기색을 온 얼굴에 드러내 보이며 연신 뒷머리를 긁었다. 딴은 그럴 만도 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내려오기 전에 그런 말을 하긴 하더군요. 새벽에 자꾸 잠을 깬다고. 하지만 그게 가출할 이유가 됩니까?”

“신고하고 나갔으니 가출이라고는 할 수 없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지는 정학씨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달리 부를 호칭이 없어 이름 뒤에 ‘씨’자를 붙였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히 싸운 적도 없고,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어느 쪽이 화를 낸 적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워낙이 마음이 약해서 그저 사소한 주의만 줘도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애니까요. 정학 씨가 그저 간단한 불만을 토로했을 때라고 해도.....아니지, 죄송합니다. 이건 아무래도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야 그도 나도 작금의 미묘한 상황, 서로의 배우자 없이 꼭두새벽에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상황을 인식했다. 커튼을 걷어보니 젖은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오늘도 어김없는 녹회색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뭔가 싶어 엉겁결에 따라들어가니 그는 가스렌지 불을 끈 참이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물 끓는 소리가 나길래......집에서 하던 게 버릇이 되어서요. ”

세상에. 아내에게 커피를 타 주는 남자라니. 내가 아는 부부들 중 커피 심부름을 남편 쪽이 하는 부부가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새삼 달리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현지 계집애, 복이 넘쳐나서 쓰잘 데 없는 억지를 부리는 데 불과한 거야.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현지를 단단히 야단칠 터이니 꼭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수저통 쪽으로 눈을 돌린 그가 젓가락을 집었다.

“이건.......제가 집사람한테 선물한 것과 똑같군요. 이런 게 또 있었다니.......”




“사과 사 왔어.”

현지의 남편, 듬직하고 자상한 손정학 씨가 채 마르지도 않은 밤색 우산을 집어들고 나간 지 스물 두 시간 만에 현지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파란 우산을 접으며 불룩한 까만 봉지를 들고 뽀얀 얼굴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찾아든 날의 그 창백하고 우울한 표정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표정이었다. 혹 여기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애가 못 돼. 설령 다른 남자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남편의 의심까지 받아가며 대구까지 내려와서 며칠씩 같이 지낼 만큼 담이 큰 애가 못 되지. 그보다는 오히려 대구의 공기가 서울의 공기보다 그녀의 체질에 더 적합하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웬 사과야?”

  아마도 곧 손정학 씨가 들이닥칠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 아내를 잘 달래어 데리고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현지가 순순히 그를 따라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어쩐지 그렇게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 걱정스럽다.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내쫓아 버려야지. 아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어버린 지금에 와서 어떻게 그녀에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나. 아니 더할 나위없이 조심스러워진다. 현지는 깨끗이 씻어 쟁반에 담은 사과를 가지고 와서는 통통한 사과 꼭지를 약간 아래로 비껴난 자리를 과도로 톡톡 친 후 칼날을 밀어넣어 깎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 먼저 스위치를 올린 사람은 나였다. 내 등짝에 길게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 그 손은 분명 유혹의 손길이 아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까. 나는 뜨거운 주전자를 잡느라 장갑을 끼고 있어서 등에 손을 댈 수 없었고, 그는 머리카락을 떼도 되겠냐고 내게 양해까지 구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게다가 그 뜨거운 녹차를 라면 국물 마시듯 훌훌 들이마시고는 이만 가 보겠다며 현관으로 가 우산까지 잡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의 손을 붙들어 방으로 끌어들인 건 다름아닌 나이고 보면 나도 참 알 수 없는 인간이다. 아니 생각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너, 왜 이모집도 안 가고 여기도 안 오고 이제껏 여관에 있었어?”

“페끼치기 싫어서. ”

“그럼 어제는 왜 안 왔는데?”

“이모부한테 갔었어. 이모부 간경화로 병원에 계시다고 내가 그랬잖아. ”

현지는 사과를 베어 물었다. 잠시 후 현지는 생각났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일은, 서울에 올라가려구.”

“잘 생각했어.”

“언제까지 그이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이거 맛있다. 너도 먹어 봐. 썰어 줄까? 아니면 그냥 들고 먹을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 ‘현지한테 말 안하는 게 좋겠죠?’였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하긴 했지만, 벽에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던 그 말이 아니더라도 현지를 보며 움츠러드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한순간 현지의 손에 들린 과도가 유난히 번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열심히 사과 깎기에만 몰두하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왜 어제는 오지 못했던 걸까? 혹, 들어오려다가 아파트 현관에서 눈에 익은 남편의 우산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지나 않았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계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손 하나 쓸 필요 없이 완전범죄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설마하니 자신의 남편이 나와 엮이기를 바라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 죄책감이 의혹으로, 의혹이 공포로 바뀌는 동안 현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 가슴을 치고 지나간 섬뜩함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아야야!”

“왜 그래?”

 현지의 손가락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흰 사과 위로 불그레한 피가 번졌다. 그것은 백설공주의 독사과를 떠올리게 했다. 현지와 나, 어느 쪽이 백설공주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칼 좀 놓아 봐. 손 좀 보자.”

 그저 베인 것치고는 피가 좀 많이 나는 것 같다. 그러나 현지는 사과를 살짝 물들인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칼도 사과도 놓을 줄 모른다. 칼을 빼앗으려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어느 순간에 저 칼이 나를 향할 것인가. 아냐 말도 안 돼. 소설도 이런 소설이 어디 있나. 나는 일어나 대일밴드가 들어 있는 서랍장 쪽으로 향했다.             

“저기, 정화야.”

“왜?”

등 뒤에서 들려오는 현지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리고 있는 것 같다.

“너.......후회한 적 없니?”

“뭘?”

 대일밴드는 빈 통만 남아 있었다. 뭘 하다가 다 쓴 걸까? 대일밴드 대신 빨간 소독약을 찾아냈지만 돌아서서 현지에게로 가려니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이혼한 거.”

난 또 뭐라고. 나는 재빨리 소독약을 들고 현지의 옆으로 가 다가앉았다.

“이 칼 빼. 어디 봐. 이게 뭐야. 너 깊게 베인 것 같다? 일단 이거 좀 발라 봐. ”

“대답.......하기 싫어?”

“얘가 남의 과거지사는 왜 자꾸 캐물어........후회 안 한다. 그래, 확실히 돈 많이 벌어 주는 건 좋더라. 그런데, 한 2년쯤 살아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아니 그걸 살았다고 말해야 되나? 기다렸다고 말해야 할 거야. 하여간 기다려보니까 그게 아니었어. 돈 많이 벌면 뭐해. 같이 살아줘야지......돈만 벌어주면 그게 남편이냐......몰라 몰라. 여하간 너도 정신 차리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 올라가라. 난 이렇게 됐지만 넌 잘 살아야지.”

“저기, 정화야.”

“응?”

 문 여는 소리가 났지만 현지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제 손정학 씨가 나가기 전, 오늘 새벽에 미리 문을 열어두겠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내 말을 잊지 않았는지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소리없이 마루로 올라왔다. 하늘색 잠바의 어깨 언저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앞머리에서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어서 우산 사이로 비가 몰아친 걸까.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고 손에 빨간 약을 바른 그의 아내는 그를 돌아다보았다.

 현지는 남편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소파로 걸어가 쓰러지듯 쿠션 위로 주저앉았다. 체념한 걸까. 안심하고 그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는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사실은 네 남편하고 같이 잤었어. 두 번이나. 네 남편이 너랑 이혼하기 전에 말이야. 난 네가 그 일을 알고, 그래서 이혼한 줄 알았어.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 끝까지 너한테 말 안 했나 보구나. 너 정말, 몰랐구나.......”  

 자연스레 시선이 손정학 씨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보다가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침묵을 지키는 현지를 내버려 둔 채 그와 나는 꽤 오랫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제각기 살이 하나씩 빠진 두 개의 우산이 접혀진 후, 채 밝지 않은 밤의 싸늘하고 축축한 공기를 뚫고 현지를 태운 그의 차가 사라진 후에도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식탁 앞에 앉아, 구석에 밀쳐놓은 수저통을 끌어당겨 모란이 새겨진 흑갈색의 윤기나는 나무젓가락을 꺼냈다. 두 개의 매끈한 막대기는 시들고 탄력을 잃은 내 손에 쥐어진 채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사촌오빠요? 그 사람한테는 사촌오빠가 없습니다. 그 젓가락은 결혼 전에 제가 선물한 겁니다. 집사람이랑 사귀기 전에 중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사 왔죠. 정확히 어디였더라?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상하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길에 잡다한 골동품을 늘어놓고 팔던 노파한테서 샀죠. 이상하게 그 젓가락이 마음을 끌더군요. 그래서 값을 물어보았더니 그 노파, 이상하게 뚱한 표정을 짓더군요. 다른 것은 이것저것 권하면서 그 젓가락만은 이상하게 팔기 싫은 눈치였어요. 그래도 달라는 돈의 두 배를 주고 샀죠. 그 노파 말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젓가락을 선물하면 그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여기서도 그런 말은 많잖습니까. 뭐 행운목이라든가 복조리라든가 그 외에도......아니, 꼭 그런 말 때문에 이걸 산 것은 아닙니다. 그 노파 말로는 그 젓가락은 만들어진 지 천 년이 넘었다지만, 믿을 말은 아니죠. 어지간히 단단한 나무라도 몇 백년 이상 가면 대개는 썩고 말 텐데요. 하지만 대단히 오래 된 건 분명합니다. 이 모란이 닳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아무튼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한테 이걸 주면서, 평생 같이 살자고 했죠. 사랑하니까요. 예, 지금도 그렇습니다. 집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짓을 하든, 저는 집사람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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