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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Sep 10. 2018

밀레니엄피테쿠스(2001)

원제 -나는 진화하고 싶다. 

밀레니엄피테쿠스  

 (원제: 나는 진화하고 싶다)



나는 진화하고 싶다.



 [뉴욕의 마천루이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110층짜리 미국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들이 제각기 하나는 소형 세스나 비행기와, 또 하나는 보잉 767기와 충돌하면서 불과 두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차례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세계 유수 언론들이 한결같이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는 멘트를 연이어 내보내고 있는 동안,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어느 소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K대학 도서관에서는 지하 로비에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던 쌍둥이 커피 자판기가 (밝혀지지 않은 종류의) 액체 폭탄을 적재한 볼펜 비행기와 충돌하여 폭발한 후 졸지에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180개의 종이컵이 졸지에 쓰레기가 되고 6리터의 커피가 흘러나오는 사상 초유의 참사가 있었다.     ]



 재구가 써서 건넨 이 어처구니 없는 글을 읽었을 때, 우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우선, K대학 도서관 볼펜 테러는 누가 읽어도 며칠 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참사를 패러디한 것이 틀림없었다. 두 번째로, K대학 도서관에 쌍둥이 커피 자판기 따위는 없었다. 세 번째로, 액체 폭탄을 적재한 볼펜 비행기 역시 실제로 있을 리 만무했다. 네 번째로. 180개의 종이컵과 6리터의 커피를 못 쓰게 된 것을 두고 사상 초유의 대참사라니, 이런 황당한 말장난이 또 있을까? 만약 이 글을 건넨 사람이 재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는 아마 그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라이,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일어난 지 며칠 됐다고 그새 그걸 걸고 넘어지냐?”

 우의 질책 아닌 질책에도 불구하고 재구는 은근히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우는 어이가 없긴 했지만 재구의 발상에 약간은 탄복했다는 뜻을 쓴웃음으로 보여 주었다. 소설가 지망생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재구에게는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결합시킬 줄 아는 특이한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능을 인정하는 사람은 적어도 재구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우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우가 끝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항간에 떠돌고 있는 볼펜 폭탄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래, 진짜 볼펜 폭탄은 아직도 못 구했냐?”

“아니, 하지만 이제 곧 구할 수 있을 거야.”

 재구는 자신의 글에 나오는 볼펜 비행기가 요즘 항간에 떠돌고 있는 볼펜 폭탄에 대한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역시 그 볼펜 폭탄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우와는 달리 그는 그 볼펜 폭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데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래서 우에게 볼펜 폭탄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신빙성있는 근거를 수집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었다. 다행히도 우는 친구들이 인정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답게 볼펜 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무기 내지는 불확실한 소문에 따른 가공의 장난감에 대해 원시인다운 순진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스러운 호기심일 뿐이었다. 

“알겠냐? 믿을 만한 내 친구가, 그 볼펜 폭탄 제조 기술자를 나한테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 때 가서도 그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겠어. 이봐, 우! 갑자기 왜 그래?”

 왜 느릿느릿 복도를 걸어가던 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는지 그 이유를 재구가 알아차리는 데는 2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 새 법학과 교수들의 연구실이 모여 있는 2층 막다른 통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우는 틀림없이 오른쪽 끝에서 세 번째 연구실, 이미 텅 비어버린 채 ‘현우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문패조차 떨어져나가고 없을 그 연구실에 눈을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는 우를 재촉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발걸음이 이리로 향했단 말인가? 

‘진화하지 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우는 자신도 모르게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죽은 현우진 교수의 목소리가 귀를 후볐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 화요일, 9월 12일 뉴욕 시간 아침 8시 45분에 소형 세스나 비행기가 뉴욕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2호 빌딩 84층에 처박혔다는 속보가 TV에 떴을 때만 해도 우는 그게 테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후 1호 빌딩에 아메리칸 에어라인 소속 보잉 767 여객기가 날아와 육십 몇 층인가를 관통한 후 언론은 사고라는 보도를 철회하고 미 대통령 조지 부시가 ‘명백한 테러’라고 규정했음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로부터 불과 5분도 안 되어 미 국방성 펜타곤이 역시 비행기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을 때는 이미 전 세계가 경악하며 입을 벌리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 역시 TV모니터를 통해 미국 테러 대참사의 전말을 지켜보았다. 또한 완전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 보는 것 같다고, 거의 모든 사람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소감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지만, 우는 자신들에게 미칠 악영향만을 생각하며 제3자 특유의 얼마쯤은 속 편한 태도로 이 참사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물론 미국인이 아니며 뉴욕에 아는 사람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심정과는 확연히 다른 관심을 가지고 틈만 나면 TV나 인터넷 등으로 사태의 추이를 주시했다. 물론 그 자신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고, 그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사활이 걸린 사건이니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해명할 뿐이었다. 

 그런데, 재구의 황당한 헛소리가 실제로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미국 테러 대참사가 일어난 그 주를 전후하여 우의 주위에서 미국 대참사와는 어림 반푼어치의 연관성도 없는 볼펜 폭탄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챦게 나돌기 시작했다. 물론 볼펜 폭탄에 관한 소문은 지난 학기 때부터 한두 마디씩 들려오던 바였는데, 아무래도 미국 테러 대참사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그 여파를 타고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는 모양이었다.

“너도 들었냐? 사회대 2층에 있는 자판기들이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음료수 샘플 들어있던  앞 유리창이 다 깨졌다는 얘기?”

“그거 볼펜 폭탄으로 한 거라며? ”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는 볼펜 폭탄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아주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어문학부 단대 2픙에 있는 PC실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돌리며 뒷 자리에 앉은 녀석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해서 손에 넣게 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마약처럼 무슨 비밀 조직망 같은 게 있어서 암거래를 한다고 들었어.”

 볼펜 폭탄을 만드는 원리는 대략 이러했다. 우선, 폭탄으로서 적격인 볼펜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볼펜이었으며 지금도 100원에 팔리는 그 ‘M’ 볼펜인데, 사실상 그 볼펜이 아닌 다른 종류의 볼펜으로 폭탄을 만들면 그 성능이 두 배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 볼펜의 심을 빼낸 후 잉크를 뽑아내는 게 첫 번째 작업인데, 어차피 다 쓴 M 볼펜을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이 작업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잉크를 뽑은 심에 서로 섞이면 폭발을 일으키는 a와 b라는 어떤 두 가지 종류의 화공약품 중 a를 넣은 후, 이번에는 볼펜 심의 머리 부분과 맞닿는 볼펜 몸통의 머리 부분에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어 다른 종류의 화공약품 b를 적신 스폰지를 넣고 두 화공약품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조립한 후 미세한 바늘장치를 이용해 손으로 볼펜 꼭지를 눌러 심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두 화학품이 섞이도록 한다. 이 두 화학품이 서로 혼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 시간을 화학품의 양과 농도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시한폭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볼펜 꼭지를 누구든 쉽게 누를 수 있기 때문에 생기게 될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볼펜 꼭지에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다는데, 대개 비밀번호를 달아 그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안전장치를 풀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보편적이라고 했다. 

 볼펜 폭탄의 원리에 대해서는 우 역시 익히 재구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가 기억하기로는, 볼펜 폭탄의 실재를 맹신하는 재구의 가슴을 무엇보다 두근거리게 하는 소문은 따로 있었다. 그 볼펜 폭탄을 제조할 줄 아는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는 딱 네 사람 밖에 없다는 것과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그들이 다니는 학교, 즉 k대학 근처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볼펜 폭탄을 믿지 않는 우는 그런 소문 역시 그저 재미있는 뜬소문으로만 여겼을 뿐이었지만.

 우의 뒷 자리에 앉은 녀석들은 잠시 후 자리를 떴다. 우는 잘 미끄러지지 않는 마우스를 다시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만에 하나 재구가 정말로 볼펜 폭탄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주어 준다면, 자신에게 그 볼펜 폭탄이 필요할 것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대답은 예스(YES)다. 그렇다면, 왜? 마침 모니터에서 보잉 767기가 관통한 후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세계무역센터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뜨면서 스피커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났다. 우는 땀이 밴 손으로 마우스를 꽉 쥐었다. 그에게 볼펜 폭탄이 있다면, 그는 현우진 교수를 죽인 놈들의 가슴에 볼펜 폭탄을 꽂고 싶었다. 

 모니터 중앙에 뜬 전체화면의 3/1 사이즈의 동영상은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차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저렇게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합니까’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아니 누가 보아도 명백할 만큼 동영상은 그렇게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알아듣지도 못할 영어 방송은 애진작에 제껴 두었다. 그는 마우스를 눌러 동영상을 지워 버린 후,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으면서 현우진 교수가 죽은 이후 자신을 강하게 사로잡았던 오로지 단 하나의 열망, 애매하고 추상적이지만 강렬한 그 열망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진화하고 싶다........’




 우는 현우진 교수의 네모난 안경과 쌍꺼풀이 진 큼지막한 눈과 톡 불거진 양쪽 턱의 윤곽을 떠올렸다. 몸집이 작고 마른 현 교수는 만화 영화 ‘개구장이 스머프’에 나오는 ‘똘똘이’라는 캐릭터를 닮았다. 그래서 모두들 현 교수를 ‘똘똘이 교수’라고 불렀다. 

실제로 현 교수는 외모만큼이나 머리도 똘똘한 사람이었다. 96년 총장이 본관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총장 직선제 폐지를 선포했을 때, 혼자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제 2의 유신 쿠데타’를 외쳤던 현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 학생은 적어도 우의 친구들 중에서는 없었다. 한국공법학회를 비롯한 각종 법학 세미나에서 현 교수는 뛰어난 헌법학자 겸 교육법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학교 안에서는 급진적인 총장 반대파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친총장파가 득세하는 교내에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많았을지언정, 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물론 우는 친구들 때문에 현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지난 해 봄, 우는 무작정 현 교수의 <헌법학 개론>강의를 수강신청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어떻게 그런 희한한 생각이 났는지는 그 자신으로서도 도통 모를 일이었다. 현 교수는 영문과라는, 법학과는 사돈네 팔촌네 상관도 없어 보이는 학과에서 온 우를 흥미 깊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우의 간단한 자기 소개를 듣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우는 현 교수의 톤이 낮고 또렷하며 적당히 건조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뭐하냐?”

 재구의 목소리 덕분에 현 교수는 일단 우의 머릿속에서 철수했다. 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취직이나 학점보다는 원시의 세계를 헤매기를 더 좋아하는 이 친구를 좋아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재구의 훼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 테러 대참사 보고 있었다.”

“아, 그거? 그 보잉 767기 건물 관통할 때 너무 멋있지 않았냐? 진짜 현실이 영화보다 두 배는 더 드라마틱하다는 걸 새삼 실감하겠더라야. 그런데 그 쌍둥이 빌딩 붕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오늘 밤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게 될 거다. 너, 오늘 밤에 학교 올 수 있냐?”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재구는 실눈을 뜨고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나, 볼펜 폭탄 구했다.”

 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구를 쳐다보았다. 늘 하던 방식으로 농담을 하고 있는 걸까. 한 3초쯤 기다렸다가 뒤통수를 툭 치면서 ‘쨔샤, 그걸 믿냐?’하고 외치며 웃어댈지도 모른다. 3초가 지났지만 재구는 우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았다. 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냐? 진짜 볼펜 폭탄을 구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오늘 밤에 시험해 볼 참이야. 관심 있으면, 11시에 사회대 2층 복사실 맞은편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어.”      



 우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별명을 얻기 전까지 그의 별명은 황소였다. 최초로 두 발로 서서 걸어다녔다는 원시인의 학명을 별명으로 얻게 된 것은 대학 입학 직후 처음으로 나간 미팅 자리에서 한 여학생이 우를 향해 깔깔 웃으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애’하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우는 키도 그리 크지 않았고 살도 찐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관이 유달리 굵직하고 턱이 넓은데다 얼굴 생김생김이 거칠고 촌스러워서 늘상 친구들로부터 원시인이라느니 미개인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 온 터였다. 여기에는 이발을 잘 하지 않는 우의 덥수룩한 머리카락 역시 한 몫을 했다. 그 길고도 복잡한 학명을 우의 별명으로 붙여준 여학생은 매우 똑똑한 여학생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별칭이 원시인의 학명으로 통용되는 것이 은근히 기분 나빴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친구들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진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임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현우진 교수를 찾아가 그의 연구실에서 사립학교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현 교수는 우의 별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우로서는 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 자네는 좋은 별명을 얻었어. 자네는 진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야. ”

 현 교수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녹차를 마시며 현행 사립학교법이 개 같은 법이라고 욕하는 그에게서 진한 외로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현 교수를 가리켜 고지식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우는 현 교수가 고독하고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한 현 교수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민총선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한 일과 관련하여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어느 날, 그는 연구실에서 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그러지. 법학과 교수가 법을 어기면 어떡하느냐고. 그러면 난 ‘내가 소크라테스도 아닌데 악법을 법이라고 따르는 건 싫다’고 대답하지. 그러면 그들은 ‘뭘 믿고 그렇게 겁이 없냐’ 고 되묻지. 사실 난 믿는 건 없고 겁은 많은 사람이야. 먼 옛날, 인간이 진화하기 전에는 법, 정치, 학문, 전쟁, 테러, 살육, 협상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 난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 다윈의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가정 하에서, 인간이 진화한 건 인간 스스로를 위해서 잘 된 일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야. 물론 인간이 진화를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지. 소위 뭘 안다는 것들이 더 나쁜 짓을 하는 걸 보면, 난 원시인이 되고 싶어져.”

 재구를 만나러 사회대 2층 복사실 맞은편으로 오기 전, 우는 현 교수가 죽은 후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는 현 교수의 연구실 쪽을 돌아보았다. 현 교수가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쓰고 있던 빌라 3층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은 6월 13일이었다. 미국 세계무역센터빌딩 두 채가 비행기와의 충돌로 붕괴된 것은 9월 12일이었다. 정확히 석달 하고도 하루의 시간 간격이 있었던 셈이다.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90층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본 우는 현 교수 역시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저렇게 뛰어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시를 조금 넘겼을 때 재구가 나타났다. 그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여느 볼펜과 조금이라도 색다르게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M 볼펜을 꺼내 들었다. 복사실 옆에 걸려 있는 대형 시계가 12시를 넘기자 모든 불이 꺼지면서 어둠이 그들을 감쌌다. 재구와 우는 행여 손전등을 든 직원이 느닷없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숨을 졸였다.

“이걸로 저 자판기를 폭파시킬 수 있어.”

 우는 한순간이나마 왜 내가 원시인답게 집에서 잠이나 자지 않고 이 원시인에서 외계인으로 갑자기 진화한 친구가 정신병자나 시도할 법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 동참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냥 노트 필기할 때 쓰는 볼펜을 들고 와서 장난치는 거라면, 다시는 볼펜 폭탄의 볼 자도 꺼내지 못하도록 흠씬 패주겠다고 다짐했다. 우는 다시 한 번 현 교수의 연구실이 있던 통로 쪽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외계인의 테러를 방관하고 있습니다.’

 재구와 우는 캔커피며 콜라, 사이다 따위가 든 자판기 쪽으로 다가갔다. 꽤 멀리 떨어진 맞은편 벽에 붙은 커다란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빼고는 어둠을 밝힐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구가 야광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우가 지켜보는 가운데 볼펜 뒤꼭지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내가 이걸 동전 반환구 안에 집어넣을 테니까, 넌 저기 벽에 붙어서서 지켜보고 있어. 가까이 있으면 다칠 테니까. 일단 자판기가 터지면 그 뒤에는 1층 106호 강의실 창문을 하나 열어 놨으니까 그리로 도망가면 돼. ”

 우는 시키는 대로 벽 쪽으로 걸어갔고 재구는 볼펜의 뒤꼭지를 누른 뒤 동전 반환구 안에 집어넣고는 쏜살같이 그 자리를 피해 우가 있는 쪽으로 왔다. 우의 핸드폰 액정으로 시간을 재며 기다린 지 약 3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우가 재구의 귀를 꼬집으며 볼멘 목소리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강재구. 너 혼자 맛이 가는 건 아무 말 안 하겠다만, 이제는 나까지 바보 만들기로 한 거냐? 내가 널 제정신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냐?”

“아야, 야 자식아 이거 놔. 저거 분명히 진짜 폭탄이야. 뭐가 잘못됐는지는 몰라도 불발로 끝난 거라구.”

“불발 좋아하시네. 짜식아. 날 밝는 대로 정신과 의사한테나 가 봐. 자식이 돌아도 한참 돌아서 말이야. 쌍둥이 커피 자판기에 볼펜 비행기에 액체 폭탄 적재 어쩌고 알아봤어 내가. 짜식아. 네가 저기 집어넣은 게 폭탄인지 아닌지 내가 확인해 주랴?”

 투덜거리며 자판기 쪽으로 걸어간 우가 자판기 반경 2미터 안으로 들어온 순간 ,자판기가 폭발했다. 

“뻥!”

 폭발음이 울림과 동시에 동전반환구에서 불꽃이 튀어오르면서 여러 개의 일직선으로 갈라졌다.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오며 바닥에 구른 우의 뺨에 딱딱한 플라스틱 파편이 날아와 박혔다. 뭔가 요란하게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매캐한 연기가 우의 콧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범으로 지목하고,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 대통령답게 테러의 씨를 말릴 강력한 응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K대학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음료 자판기 폭발 사건은 어찌 되었느냐 하면, 일단 죽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큰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처럼 여객기가 일고 여덟대씩 납치된 것도 아니었고 테러라는 증거 역시 희박했으므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판기가 혼자 열받아 폭발한 것이라고 흐지부지 단정을 내린 후, 폭발한 자판기를 철거하고 새 자판기를 설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물론, 한동안 학생들의 입에서 볼펜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다닌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대 106호 강의실 창문으로 무사히 탈출한 후, 재구와 우는 자신들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우가 그날 이후로 그 이전보다 일곱 배는 더 멍청해지고 원시인다워졌다는 것이 재구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자판기 폭발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일까? 재구로서는 우의 섣부른 판단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자기 때문에 친구가 다친 것은 자기 책임이었고, 자칫하면 우가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할 수가 없었다. 정작 우는 재구에게는 무관심했다.

“오스트랄로.....아니, 우야. 밥 먹으러 가자.”

 얼굴에 플라스틱 파편을 맞아 상처를 입은 우가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옛날 학생들이 화염병 들고 데모할 때 이런 상처 많이 치료했었지요’라고 말했고, 우는 ‘그럼 지금은 이런 상처를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우는 그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얼굴을 들어 재구를 쳐다보았다.

“하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끝까지 해야지 왜 하다가 마냐. ”

 식당에서 재구의 돈으로 계산한 칼국수를 젓가락으로 입에 밀어넣으며 우는 재구에게 물었다.

“그 볼펜 폭탄,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냐?”

“그걸 어디다 쓰려고?”

 우는 젓가락과 칼국수를 동시에 입에 문 채 멍하니 그릇을 쳐다보다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진화하는 데 쓰려고.”

  ‘뼈와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는 미 테러 대참사 이후의 세게무역센터 붕괴 현장에 대한 기사를 읽고, 우는 현 교수가 지금 살아 있어서 이번 참사에 대한 그의 격렬한 논평을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살아 생전 사람들에게 ‘시민 운동가’로 통했던 똘똘이 교수는 사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우로 하여금 그가 본업인 헌법학 연구는 뒷전으로 미루어두고 사회 정의 구현에만 골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제 2의 유신 쿠데타 손가락질 사건’으로 총장의 눈 밖에 난 이후 그는 사회대 2층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조차 도청감지장치를 설치해야 했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있는 돈을 다 털어 용산동에 있는 빌라에 개인 연구실을 마련해 가족들과 따로 떨어져 살기 시작한 것이 죽기 불과 두 달 전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시민운동가 의문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우가 아는 사람들 중 똘똘이 교수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보도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총장의 감시는 그렇다치고라도, 시민총선연대 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활동 덕분에 똘똘이 교수의 주위에 적이 많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가 민주노총에 관계하고 있었으며 조폭들의 협박을 받고 있었다는 소식도 그가 죽기 전부터 어렴풋이 들려오던 소식이었다. 게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면 세상에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있단 말인가? 그가 죽기 얼마 전 우는 현 교수의 연구실에서 술을 마셨고, 매우 지쳐 있던 똘똘이 교수는 취해서 이렇게 지껄였다.

“나도 이제는 사회 활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쉬고 싶단 말이야. 스벌, 근데 왜 날 가만 못 내버려둬서 안달이냔 말이야. 그래, 난 고지식하고 깐깐해서, 잘못된 걸 그냥 구렁이 담 넘듯 못 넘기는 사람이야.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해........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제 갓 두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한 원시인. 너 정말 부럽다. 내가 지금 퇴화해서, 아니 퇴화라는 말은 좀 안 맞군. 내가 지금 역(逆)진화해서 네놈 같은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우는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어째서 제가 원시인이고, 어째서 제가 부러우신 겁니까?’하고.

“넌 생긴 것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생겼잖아!”

현 교수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사람을 볼 줄 알아. 내가 지금 이렇게 인간에게 배신을 당하고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도 그래서인지 몰라. 내가 아는 넌 내가 그런 것처럼 고독한 놈이지만, 넌 세상이라는 황야에서 먼 옛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그랬던 것처럼 풀뿌리를 씹고 공룡 고기 뜯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놈이거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진화할 대로 진화하고, 세상도 따라 진화하는 이 좆같은 세상에서,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감추려고 하지 않으면서.....스벌, 사실 난, 우리 마누라랑 잔 지도 꽤 오래 됐거든. 그런데 마누라보고 같이 자자고 하려니 통 입이 떨어져야 말이지.”

한동안 똘똘이 현 교수는 입을 열지 않았고, 우 역시 침묵을 지켰다. 멍하니 손톱으로 오징어만 잘게 뜯으며 자신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드니 똘똘이 교수의 네모난 안경 속 쌍꺼풀 진 눈이 취하지 않았을 때처럼, 강의실에서 열변을 토할 때처럼 명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화하지 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그의 그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그의 눈빛과 똑같이 또렷하고 명료했던지 우의 가슴이 다 섬뜩할 지경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는 비록 자신이 현 교수에게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할지라도, 진화하지 마라고 말했을 때 그의 당부에는 자신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현 교수가 11층에서 뛰어내리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가 죽었을 때, 우는 무작정 현 교수의 연구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그 후 자신이 그를 구해냈어야 했는데도 구해내지 못했다고 느꼈다. 이유는 자신이 원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진화하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진화했었다면, 진화한 인간들만이 가지는 힘을 이용해서 그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한결같이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우는 알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부터 그는 이상해졌다. 뭐가 어떻게 이상해졌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현 교수가 죽은 후, 그는 현 교수를 만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심한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는 게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고, 직장이며 학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적인 격한 슬픔은 그 다음에 찾아온 지루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야말로 원시인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찾았다는 듯 철저하게 원시인처럼 생활했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뒤가 무거우면 화장실 가서 싸는 게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현 교수의 의문사가 여름 방학이 막 시작하던 무렵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그는 미치도록 진화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한창 살인 더위가 설치는 7월 말, 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베낀 듯한 한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가짜 히말라야 설인이 나오는 영상을 보았고, 처음으로 진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적 공허감은 ‘진화하고 싶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으로 바뀌었다. 일단 진화한 다음에는,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A학점을 따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외국계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필요한 시험을 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진화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유는 자신이 진화할 수 없는 피를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진화하고 싶어했다. 똘똘이 교수님,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진화하고 싶습니다!




 재구는 우에게 자기가 볼펜 폭탄을 구해 주는 대신 직접 볼펜 폭탄 제조업자를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공격을 선언한 날, 타학부 수강과목으로 듣고 있던 정치학 강의 시간에 학생들은 두 파로 갈라졌다. 다수의 친미파와 소수의 반미파가 보복 공격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두고 싸우게 된 것이었다. 세계무역센터 붕괴 이후 발생한 6천명 이상의 사상자들이 억울하다는 주장에 반미파들의 의견은 설득력을 차츰 잃어갔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한 학생은 끝까지 완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저는 테러 옹호론자는 아닙니다만, 하고 그 학생은 말했다. 빈 라덴이 한 말 중 하나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우리 땅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을 몰아낼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미국이 세계의 약소국가 국민들을 상대로 한 테러보다 더 은밀하고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는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번 테러의 진범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수수께끼였고, 보복 공격을 해 봐야 무고한 사상자가 배로 늘어날 뿐이라는 그 학생의 의견에 반대하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론은 또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테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친미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PC 모니터를 통해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복구 현장을 보면서, 우는 석 달 전 자신을 경악하게 한 비극이 스케일만 달라진 채 재차 일어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300미터 상공에서 화염을 피해 속수무책으로 뛰어내린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은 바로 열 명이 넘는 똘똘이 교수였다고 생각했다. 

 똘똘이 교수가 죽던 날, 8시 뉴스에서는 똘똘이 교수의 피가 고인 현관 빌라 바닥을 보여 주었다. 미 테러 대참사가 일어난 날, YTN 뉴스에서는 비행기 관통하고 지나간 84층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며 구원을 청하는 사람을 보여 주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똘똘이 교수를 구하지 못했고, 경찰이며 소방대원들은 생존자들을 구하기는커녕 붕괴된 건물에 깔려 같이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그다지 미워지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셈인지 몰랐다. 정치학 수업 시간에 미국을 비난하던 그 학생은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정책이 아랍 세력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하다면서 미국이 당한 참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업자득이었다고 했다. 물론 많은 친미파들과 ‘희생자 애도’파들의 공격이 있었다. 우는 그 학생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테러 행위가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현 교수 역시 일종의 테러를 당했으리라고 우는 결론짓고 있었으니까. 

 우가 아는 현 교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인삼주 병만 바닥에 나뒹굴게 한 채 ‘잘 있어라 막간 세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유서를 남기고 무작정 발코니에서 뛰어내릴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발코니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부엌 베란다에 붙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우는 현 교수가 마지막으로 썼다는 그 유서가 현 교수의 마지막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에게 있어 현 교수의 유언은 따로 있었다.

“진화하지 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자신의 죽음을 예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날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 그처럼 슬퍼 보였을까. 우는 현 교수의 유언을 받드는 대신 그 유언을 거스르려는 참이었다. 미국을 테러했다는 아랍 세력에 대해서는 악감정이 없었지만, 똘똘이 교수를 테러한 모종의 세력에 대해서만큼은 진화를 해서라도 보복 공격을 감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종의 세력을 알 도리가 없었고, 그것이 우를 미치게 만들었다. 똘똘이 교수를 테러한 놈들은 아랍 놈들보다 열 배는 주도면밀했다.

“학교 동문으로 나가서 207번 버스를 타고 용산동 쪽으로 가. 용산지하도 지나 두 코스 가서 내리면 정류장 맞은편에 롯데리아가 보이거든. 롯데리아 옆골목으로 200미터쯤 들어가면 주택가가 있는데, 검은 대문에 M 볼펜 일고여덟 개를 매달아 놓은 집이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진화한 인간들끼리 치고 받고 싸울 때, 죽어나간 것은 죄없는 원시인이었다. 우는 동족을 잃은 것이 아니라 동족보다 더 가까이 지냈던 진화한 인간을 잃었지만, 누가 똘똘이 교수를 죽였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하나, 진화하는 일이었다. 

재구의 말대로 M볼펜이 여러 개 달린 검은 대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온전한 M 볼펜이 아니라 분해한 볼펜의 하얀 몸통 부분만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문 대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간 후 놋쇠 손잡이만 달린 철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잘 정리된 작업실 같은 방이 우의 눈앞에 드러났다. 가구라고는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그리고 책장 하나가 전부인 그 방은 몹시 좁았다. 이름도 용도도 모를 온갖 도구들이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깡마른 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부지런히 뭔가를 손질하고 있었다. 남자가 그 또래의 젊은이임을 안 우는 내심 놀랐다.  자세히 보니 작은 주사기 같은 것으로 M볼펜심에 뭔가를 넣고 있었다.

“볼펜 폭탄을 만들고 있군요.”

우는 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깡마른 남자는 우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처음 찾아오시는 분 같은데, 볼펜 폭탄을 잘 아시는 분 같습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보아하니 처음 찾아와?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며 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친구가 가져온 볼펜 폭탄 덕분에 다치기까지 했으니까요. 얼마면 살 수 있겠습니까?”

깡마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우의 앞에 가져다 놓고 평평한 두껑 위에 방석을 얹었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우가 고개를 내젓자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더럽지는 않은데......제가 앉아 있던 의자라도 드릴까요? 됐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볼펜 폭탄은 왜 필요하신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진화하는 데 필요합니다.”

순간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남자는 미소를 띠었다. 

“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씨였군요. 마지막으로 찾아온 고객이 자기 원시인 친구에게 볼펜 폭탄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볼펜 폭탄을 가져갔는데, 그 분에게 8만원을 받았었죠. 그 분의 원시인 친구분이셨군요.”

자판기 하나 터뜨리는 데 8만원씩이나 썼군. 재구 이 등신같은 자식.

“얼마 드리면 되겠습니까?”

남자는 볼이 움푹 들어간 초췌한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그는 우를 위해 만든 쓰레기통 의자 위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왜 진화하시고 싶어하시는지, 그리고 진화하는데 볼펜 폭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우는 처음부터 볼펜 폭탄을 거저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떨어 볼펜 폭탄 대금으로 가져온 터였다. 재구가 정확한 가격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폭탄이니까 비쌀 것이라고 나름대로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진화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돈 대신 지불하라니? 우는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존경하던 교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신문에는 자살이라고 났지만 저는 그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게 진화하지 말라고 했지만, 전 진화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죽게 한 정체도 모르는 놈들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더구나 이번 미국 테러 대참사가 일어난 뒤로는 진화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는 진화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우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화하면, 언젠가는 그 놈들을 찾아내서 보복 공격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볼펜 폭탄 제조자는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로 옮겨 앉더니, 책상 위에 있던 볼펜 심을 집어들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우는 쓰레기통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있던 폭탄 재료용 M볼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교수님을 잊어버리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

순간 우의 가슴 속에 작은 보잉 767기가 날아와 박혔지만, 우는 붕괴 위험을 안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자신의 가슴을 그냥 방관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님의 진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존중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을 잊어버리든, 아니면 복수를 하든 그건 님의 선택이겠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도 진화하시는 편이 본인을 위해서는 좋을 것 같군요. 그럼 대답을 안 하신 부분에 대해 묻지요. 그 볼펜 폭탄을 진화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시려고요?”

이 질문이야말로, 우의 스물 여섯 인생을 통틀어 가장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이었다. 한참 후 그는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그냥........볼펜 폭탄은 돌도끼보다 진화한 무기니까.......”

그 순간 볼펜 폭탄 제조자의 입에서 폭발한 웃음 폭탄은 우에게 있어 볼펜 폭탄보다 위력이 두 배는 센 것이었다.

“그러니까, 진화한 무기를 쓰면, 진화할 수 있으시다 이거죠? 와하하하하하하......정말 놀랍습니다. 요는 돌도끼를 볼펜 폭탄으로 바꾸자는 거군요.”

우 역시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돌도끼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도 못한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지? 볼펜 제조자는 우와 함께 키득거리다가 이윽고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거저 드리겠습니다. 볼펜 폭탄을 한 번 겪어 보셨다니까 아시겠지만, 뒤꼭지가 너무 쉽게 눌리면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뒤꼭지가 눌리지 않도록 안전 장치를 내장한 폭탄을 드리겠습니다. 레버 형으로 드릴까요? 비밀 번호 형으로 드릴까요?”

“아무 거나 주세요.”

볼펜 폭탄 제조자는 비밀번호 형을 내주었다. 그의 설명인즉슨 비밀번호 형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속히 진화하기를 바란다는 볼펜 폭탄 제조자와 악수를 나눈 후, 우는 검은 대문을 빠져나왔다.

우의 왼손에 매끄러운 M볼펜이 들려 있었다. 비밀번호를 맞추어 안전장치를 열 수 있도록 한 조그마한 번호들이 몸통에 달려 있지 않았다면 누가 보아도 평범한 필기구형 볼펜으로 여길 터였다. 안전장치를 닫아 놓은 탓에 아무리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뒤꼭지를 손으로 눌러 보면서, 우는 언젠가는 똘똘이 교수를 죽인 놈들에게 이 볼펜 폭탄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설령 복수하지 못한다 해도, 진화한 후에는 똘똘이 교수를 잊어버릴 수 있을 테고, 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더 이상 외롭고 지루하지 않은 진짜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볼펜 폭탄을 언제 어디에 쓰게 될 지는 그로서도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볼펜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우는 볼펜 폭탄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면서, 이제는 정말로 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슴 뿌듯한 희망을 실로 오랜만에 품어 보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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