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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ug 10. 2018

장난감 병정(2002)

Kalsavina 미니소설

나는 장난감 병정의 왼쪽 다리를 손으로 잡아 부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내 병정이 아니었다. 이 장난감 병정은 주인이 없었고, 그래서 수행해야 할 어떤 군사적인 임무도 없었다. 다만 어린 조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블록 장난감과 더불어 플라스틱 상자 속에 서른 아홉 명의 전우들과 함께 얌전히 整列(정렬)하고 있었을 뿐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속에 나오는 장난감 병정은 한쪽 다리가 없었다지만, 그는 아무리 보아도 다른 서른 아홉 명의 병정들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그의 전우들과 혼동하지 않고 쉽게도 그를 찾아낸다. 이유가 뭘까? 그의 눈은 그의 동료들과 다를 바 없이 기계로 박아넣은 둥글고 검고 조악한 플라스틱일 뿐인데.


아니, 그의 눈은 조악하지 않다. 적어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정교하다. 사실 말이지 내 오빠는 자기 아들에게 조잡한 싸구려 장난감 따위를 사 들고 오지는 않았다. 그것은 꽤 비쌌고 고급 재료와 고급 기술을 적절히 이용한 보기 드물게 훌륭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급 장난감이라는 사실은 그의 눈빛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의 눈빛은 그의 전우들과 다르다. 그는 어쩐지 슬퍼 보인다. 이것은 그의 주인인 내 어린 조카도 이미 눈치챘던 사실이었다. 어린 조카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모, 이 아저씨는 다른 아저씨들하고 틀려. 조금 이상해.


그 어린 조카는 불과 엿새 전에 병원에서 죽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장난감 병정에게 주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고, 또한 그의 다리를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부러뜨릴 수 있었다.


어린 조카가 병원에서 피를 흘리며 그 가느다란 다리를 덜덜 떨어야 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고모,즉 나다.

어머니는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했고 바보였던 나는 시키는 대로 그 남자와 헤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에게는 돈도 학위도 집안도 명예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사랑을 포기한 나는 분풀이삼아 핸들을 잡고 아스팔트 위에 쌓인 눈이 살얼음처럼 얼어붙은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바보같이 죄없는 조카를 옆에 태우고. 장난감 병정의 주인은 그 날도 내가 아니었다면 그의 부하들과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조카가 숨을 거둔 순간 그의 떨리는 다리는 장난감 병정의 검은 군복 속에 감추어진 다리보다 그리 굵지도 않았다.   

나를 책망한 사람은 없다. 꼭 한 사람, 어린 조카의 엄마, 새끼를 잃은 어미만이 증오를 가득 담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을 뿐.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아도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집어든 장난감 병정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에요.

그 이유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니까.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대는 모를 거요.

사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되풀이하는 단어인가. 그리고 이제는 한갓 장난감에 불과한 너마저 그런 흔해빠진 단어를 입에 올려야 한다니. 한심하고도 한심한 금속제 젊은이여.

“금속이든 장난감이든 난 남자고 어엿한 장교야! 그러니까 내게도 여자를 사랑할 권리쯤은 있어!”


그게 그의 눈빛이 그의 동료들과 다른 이유였다. 그리고 사실 그는 어엿한 독일군 장교였다. 검은 철모와 검은 군복으로 무장하고 SS의 견장을 두른. 어째서 내 오빠는 그 따위 장난감을 내 어린 조카에게 선물했을까? 단순히 휘황찬란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니다. 내 어린 조카는 장난감 카탈로그 속의 그 장난감 병정들에게 한 눈에 반했고, 그래서 제 아버지에게 그들을 “사 달라”고 졸라댔다.


어째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사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럽소?

그는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는 한숨을 쉰다. 사랑은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어요. 내가 장난감이고 당신이 사람이라는 정도의 차이는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오. 당신이 나의 주인을 죽였으니 당신은 나를 해방시켰어요. 자, 이제는 결혼식을. 이제는 결혼식을.


미쳤다. 이 장난감은 미친 게 분명하다.

나는 이 장난감이 당당하고 어엿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당당한 모습에 흠집을 내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무슨 짓입니까! 이건?”

다리가 꺾여져 나간 장난감 병정은 고통스러워한다기보다는 어이없어한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고 그 슬픈 눈빛으로 내게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는 불쾌해한다.



“나의 사랑에 이렇게 유별난 방식으로 보답하다니. 과연 당신은 재미있는 여자야. 오로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삶은 고통스러운 법이지. 난 당신을 통해 내가 느끼는 정신적인 통증을 치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로 통증을 가중시키는군.”

진정한 사나이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다리 하나쯤이야 충분히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그는 거듭 주장한다. 그는 여전히 당당하다. 그의 팔을 최소한 두 개는 더 부러뜨려야 할 것 같다. 아니, 그에게는 팔이 두 개밖에 없다. 내게 팔이 두 개밖에 없는 것처럼.    


“우린 공범이 아니오? 당신의 어린 조카, 허약한 나의 주인을 죽이고 당신의 오빠와 당신의 오빠의 아내와 당신의 오빠의 아내의 옛 애인이었다는 당신의 약혼자까지. 이제 누가 남았지? 당신 뿐이야. 당신은 당신 자신까지 죽이려고 그러지? 하지만 그것만은 막을 거야. 내가 막아 주겠어.”


 마티카라는 여가수는 마약 중독으로 죽어간 오빠의 모습을 장난감 병정에 비유해 토이 솔져(toy soldier)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내가 아는 장난감 병정은 웬만한 헤로인이나 코카인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한 마약을 흡입하고 질척한 환각에 빠졌다.


나는 그를 없애기로 작심하고, 그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내가 빼앗아야 할 것은 그의 체면이 아니라 그의 목숨인가 보다. 그의 목 속에 생선 가시같은 뼈가 자리잡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부러뜨리기가 과히 쉽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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