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lsavina Jan 19. 2019

왼손잡이 바텐더

Kalsavina 단편연작소설

왼손잡이 바텐더



장소: 2005. 그렉스 바. (도쿄. 롯폰기)

나레이터: 미라벨 초이



2005년의 추운 겨울날, 스물 한 살의 나는 도쿄의 롯폰기에 와 있었다. 에즈노 시온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주말이 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나로 하여금 평생에 걸쳐 그를 따라다니도록 만들었다.

내가 스페인 혼혈의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일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었다. 일어는 배우면 될 일이었고, 어머니의 스페인계 혈통이 보유한 유전자는 내게 여느 동양인 여성들이 갖지 못한 남다른 미모를 물려주지 않았던가.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그렉스 바(Greg's Bar)는 그 무렵 별로 알려지지 않은 롯폰기 구석의 조그마한 술집에 불과했다. 다만, 나 같은 외국인들이나 게이들이 종종 들르는 곳이다 보니, 철저하게 오리엔탈리즘을 배제하고 약간은 웨스턴 풍을 가미한 클래식 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메뉴판을 차지한 대부분의 주류가 미국식 칵테일이었고, 싸구려 위스키나 보드카 등이 메뉴판의 맨 아래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린차우를 알게 되었다.

잊혀질 만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두어 달 정도 일하다가 훌쩍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정 바텐더가 아니다 보니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내가 친해지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와 내가 감정적으로 서로를 건드릴 접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무렵 에즈노 시온에게 푹 빠져 다른 데 눈 돌릴 겨를이 없었고,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서, 아무리 예쁘다 한들 나같은 풋내기 여학생(그 무렵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다)에게 빠져들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가 사실상 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자신보다 분명 어렸으면 어렸지 결코 나이가 많지 않았을 나를 손님으로, 그리고 숙녀로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연치고는 꽤나 의미심장한 우연이 우리를 잇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와 나는 둘 다 왼손잡이였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어와 일어, 그리고 베이징어에 능통했다. 어려서부터 3개 국어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데다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3개 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번갈아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3개 국어를 모두 익혔다고 한다.

여자처럼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그의 억양은, 아주 심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 나라 말을 하든 다소 어색하게 뭉개지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의 회화를 구사하는 데다가, 정말 여자인 나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아우라를 지닌 그는 일하는 도중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린차우라는 이름대신 '왼손잡이 바텐더'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뜨내기 왼손잡이 바텐더는 제법 그 일대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에즈노 시온과 훈, 즉 정재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 남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포티쉐드, 좋아하나 보네?"

화들짝 놀란 나는, 언제나처럼 왼손으로 능숙하게 보드카에 토닉워터를 섞는 린차우의 가녀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사운드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음악을 좋아해요."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했던가?"

"네. 국적은 프랑스지만요. "

"좋은 이름이야. 예뻐."

"네?"

"네 이름 말이야. "

내 이름, 미라벨 초이.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급생들의 질시와 비웃음을 한 몸에 받게 했던 이름이다. 한국 이름은 최현정이지만, 실제로 그 이름을 쓸 일은 거의 없었다. 호적에 올라가 있는 이름이 '최 미라벨'이기 때문이다.

"부러워. "

"뭐가요?"

"영어를 잘하는 것도 그렇고, 그 미모도 그렇고.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타는 그 용기도 그렇고."

과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과히 싫지는 않다는 기분으로 또 한 잔의 술을 주문하기 위해, 나는 왼팔을 뻗어 저만치 바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오늘 밤에는 시온이 여기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가장 부러운 건, 네가 여자라는 사실이지만."

린차우가 찾아다니는 사람이 남자라는 걸 몰랐다면, 그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선뜻 파악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 린차우는 남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지만, 나처럼 한눈에 반해 버린 사람이거나, 혹은 과거에 사귀다가 헤어진 연인이 아닌 전혀 쌩뚱맞은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전생에서 연인이었던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 섬세하고 가냘픈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다만 혈우병 환자였을 뿐이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해 온 그에게 그런 얘기 따위 수군거릴 사람도 없으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가 미친놈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어 보였다. 어쨌든, 그는 '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이 전생에서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남자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진득하게 한 곳에서 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다 그 남자를 찾아다니느라 그런 거라고 했다.

.

.

.

"음악을 좋아하지. 그 쪽으로는 재주가 없어서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듣는 건 좋아해. 지금은 바빠서 못 가지만, 내가 너만할 때만 해도 라이브 클럽을 꽤나 돌아다녔었어."

"그러면서 혹시 여기 어딘가에 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맞받아친 나는 혀를 빼물고 웃어 보였다. 그 또한 쓸쓸해 보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윙크했다. 어딘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전혀 없었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한들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어, 키스 프롬 어 로즈(Kiss from a Rose)다."

씰(Seal)의 <키스 프롬 어 로즈>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였다.

"유스케 알죠? 시온의 친구 말이에요. 그 사람도 이걸 불렀어요."

"알아. 나도 들은 적 있어."

눈을 내리깔고, 힘없이 웃으며 린차우가 대답했다. 늘 어딘가가 아파 보이는 딱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술에 취한 한두 명의 게이가 찾아와 그런 그를 노려보기도 하고 그의 등을 토닥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를 유혹하는 대담한 용기까지 냈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예의 그 매혹적인 미소로 그들을 밀쳐냈었다.

그의 미소는, 확실히 남자들을 꿈쩍도 하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감미로운 곡을 들을 때면."

깨끗하게 삶은 행주로 컵을 닦으며 린차우가 중얼거렸다.

"유난히 관이 더 그리워져."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이 참에 그의 전생에 대해 조금쯤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도 시온은 여기에 오지 않을 모양이니까.

"혹시, 지난 주에 시온이 여기 왔었어요?"

"왔다 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나는 못 봤어. 그때 비번이었거든."

"아하. 오늘 올 가능성은 극히 적겠네요."

"용기를 내. 레브."

린차우는 나를 '레브'라고 불렀다. 내 풀 네임인 '미라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내가 극구 거부했기 때문이지만, 내 뜻을 받아들여 나를 '레브'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적어도 이 광막한 도쿄 시내에서는 린차우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래요. 이렇게 된 이상, 심심하니까, 당신의 전생에서의 사랑 이야기나 들으면서 시간을 때울 수 밖에 없겠네요."

린차우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어쩌면 화가 난 건지도 모른다. 그는 중국인이었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을 때조차도 웃음으로 그 분노를 감추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진짜로 듣고 싶어?"

"다시 없는 기회잖아요? 어차피 오늘 밤 시온은 여기 안 올 거고. 손님들도 별로 없고."

사실은, 저만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린차우를 쳐다보는 남자가 하나 있긴 했다. 딱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그는, 린차우와 내가 한국말로 주고받는 대화를(내 일본어가 서툴렀기 때문이다) 다 듣고 있었을 테지만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우리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봐서 꽤 낯이 익었다. 덩치가 크고,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여느 여자들의 취향에 걸맞게 잘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를 무시한 채 나는 린차우를 재촉했다.

"뭐, 아주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간단히만 들려줘요."

.

.

.

-나는, 자금성의 내관이었어. 너는 아마 믿지 않겠지만, 지금은 동치황제라고 불리는 소년 황제의 최측근이었지. 하지만 내 진짜 상관은 황제가 아니라 황태후였어. 역사책에서 '서태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그 황태후 말이야.

그 황태후의 숙적 중 하나가 공충친왕이었어. 내가 모시는 동치황제의 삼촌이었지. 그리고 관은, 그 황제의 삼촌인 공충친왕의 시위무사였어. 말하자면, 보디가드 말이야. 정말이지, 공친왕부에서 그를 처음 만난 순간,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내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그가 내게 말해 준 날, 들떠서 한숨도 자지 못했던 기억이 나. 나를 알게 된 이후로는, 여자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여자들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대신 그에게 주겠다고 결심했어. 실제로 그렇게 했고.

우리는 가끔 함께 손을 잡고 변장을 하고 자금성을 나와 북경의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어. 서로의 거처가 다르고 해야 할 일들이 달랐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함께 할 시간을 가져 보려고 애를 썼지. 다행히 얼마간은 우리에게 운이 따랐어. 황태후는 내게 아예 대놓고 공친왕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거든. 나는 내 권한을 이용해 관을 자금성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고. 관은 공친왕의 부하이기도 했지만 거의 수양아들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나를 위해 자신의 근무시간을 바꿀 수 있었어.

.

.

.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 해에 자금성 밖에서는 동치중흥(한시적으로 동치황제 치세에서 국세가 평온을 유지하던 시기)을 축하하는 의미로 불꽃축제를 열었고,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잡고 폭죽놀이를 보러 달려갔지. 하늘에서 종이꽃이 비처럼 떨어져내렸고, 나는 어린애처럼 팔짝거리며 좋아했어. 그런 나를, 관은 웃으면서 저만치에서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지. 내 팔을 잡고,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그 북경의 겨울날, 하늘에서는 눈과 함께 형형색색의 종이꽃이 떨어져내렸고, 서양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져왔다는 그 서양식 불꽃이 그야말로 황홀하게 하늘을 수놓고 있었어.

그 곳에서, 나는 관과 함께 있었어. 살며시 골목에 숨어서 그 팔에 안겨서, 그 입에 입을 맞추면서. 그렇게 밤새도록 우리는 북경의 저잣거리를 돌며 밤을 새웠지. 그런 날들이 있었어. 맹세코, 내 인생 최고였던 날들이었지.

.

.

.

솔직하게 말해서, 내게는 정신병자의 넋두리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여겨지는 이야기였다. 당연하다. 나보고 그런 허무맹랑하고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믿으란 말인가?

에즈노 시온과 결혼하고야 말겠다고 친구들에게 큰소리쳤을 때,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던 친구들의 눈빛이 생각났다. 그 중 하나가 대놓고 멸시에 찬 웃음을 입가에 내걸며 내게 퍼붓던 악담을 기억한다.

-미라벨 초이. 최 미라벨 씨. 헛소리 작작 좀 하시죠? 그 사람은, 애인 없대? 너 말고도 여자들이 줄을 지어 서서 그 사람의 하룻밤 상대가 되기 위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래, 재수 좋으면, 너도 그 대열에 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결혼? 너 결혼을 무슨 폭죽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거야?

폭죽놀이.

잠깐이지만,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터졌다가 떨어져내리는 폭죽 아래에서, 변발을 하고 뛰어다니는 린차우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린차우는 묘하게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하지만."

애달픈 미소를 띄우고 있던 린차우의 얼굴에 일순 싸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눈치더니, 저만치 구석진 곳에 앉았던 손님들이 나간 자리로 다가가 조용하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그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마침내 에즈노 시온이 그렉스 바에 나타났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섬세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머릿속에 담기 위해 애를 썼다. '족제비'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게 그는 무척 날카로운 생김새였지만, 나는 그런 류의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저버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여러 겹으로 층을 내어 커트한 머리를 진한 와인색으로 염색해 뒤로 그러모아 묶은 시온은, 뜻밖에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 항상 린차우를 지켜보던 그 사람의 곁에 가 앉았다.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연히 여자를 대동하고 왔거나 혹은 자신의 동료들(그 무렵 막 인기있는 밴드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그의 밴드)과 함께 왔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고, 더구나 린차우를 지켜보던 그 한국인 남자를 만나러 온 게 분명했다.

물론, 시온이 양성애자라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가 한국인 남자라니 곤란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들이 연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흐트러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한국인 남자와 마주앉은 시온의 옆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너무 가까이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 자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았다.  

두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어가 서투르긴 했지만 그럭저럭 조금은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으므로, 나는 되도록 그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며  주도면밀하게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들의 대화 도중 몇 번이나 '마코토'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마코토가 시온의 친구(아마도 학교 친구)의 이름이라는 것과 현재는 죽고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화의 내용으로 알게 되었다. 상대가 한국인임을 의식해서였는지, 시온은 바로 근처에 있는 나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쉬운 말로 한국인 남자에게 그 마코토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거군."

"그렇죠. "

"그리고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는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네. 맞아요."

"책과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이었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했죠.. 하지만 아마 가족들에게는 별로 그런 얘기를 안 했을 거예요. "

"어째서지?"

"일단,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게 불보듯 뻔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을 느끼고 있었고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말하자면 시온의 죽은 친구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마코토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런데 당신, 요전에 만났을 때는 마코토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그만뒀어."

"마코토에 대해 정말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당신, 녀석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걸 봐야 했거든. 그의 가족들도 그렇고, 그의 친구들도."

"똑똑한 녀석이었으니까요. 뭐랄까,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똑똑했어요. 물론 공부도 잘했지만요."

"그런 친구를 잃어서 그쪽도 많이 힘들었겠군."

"내 인생의 일부를 통째로 잃은 거죠. 한동안 얼마나 허탈했는지 몰라요."

"그를 죽인 범인을 찾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아, 왜 없겠어요? 잡아서 죽여 버리고 싶죠. 하지만. 물증이 없어요. 그날 마코토 녀석이 그 개자식과 함께 있었다는 물증 말이에요."

"그 개자식?"

"그 미남자요."

갑자기 시온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 혹시 넌 아는 거 없어?"

"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들고 있던 데킬라(맛보다는 이름이 들어 자주 주문했던)가 든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얼른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싸 쥐었다. 결국 시온에게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가 왼손잡이에게 심한 혐오감을 품고 있을 경우의 수를 심각하게 따져 보았지만 그래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뭐가요?"

"여기 가끔 일하러 오는 그 왼손잡이 바텐더 말이야."

린차우? 린차우를 말하는 건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국인 남자가 내게 친절하게도 시온의 말을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다.

"왼손잡이 바텐더에 대해 묻는 거야. 너 한국인이지? 전에 그 놈하고 한국어로 대화하는 거 몇 번 들었어."

"아아, 린차우요."

"응. 그 친구 말이야. 분명히 오늘 출근했을 텐데?"

"네, 하지만 오늘은 일찍 갔어요.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사실이었다. 린차우는 그날 출근하는가 싶더니 이내 창백해진 얼굴로 두 게이 손님의 부축을 받으며 퇴근해 버린 것이다. 그렉스 바의 사장인 시로구치는 이상하리만치 린차우에게는 너그러운 편이어서, 그런 식으로 조퇴하는 린차우를 말리지 않았다. 아마 그가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을 시로구치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한국인 남자에게 말했다.

"틀림없어요. 바로 그 바텐더에요. 마코토가 죽기살기로 쫓아다니던 그 미남자가, 여기에서 일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요."

.

.

.

"마코토."

내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린차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더 이상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기에 더는 추궁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그가 입을 열었다.

"불쌍한 녀석이지."

"역시, 그를 아는군요?"

"잘 알아. "

"시온이, 당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그 마코토라는 사람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그래? 아마 훈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을 테지."

"훈이요? "

"그래, 가끔 여기 나타나서 날 노려보는 그 한국인 남자 말이야."

"아 그 사람이 훈이었군요."

"응."

훈과 시온이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리자니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어째서인지 린차우에게 더 이상 캐물어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이라고 간단히 대답한 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린차우의 표정이 어쩐지 스산해 보였기 때문이다. 말 대신 섬세한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해오고 있었다. 더는 그에 관해, 그 마코토에 대해 묻지 말아 달라고.    

여느 때처럼 데킬라를 주문하자 린차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데킬라 선라이즈로 만들어 줄게. 그게 훨씬 맛있을 거야. 그리고 오늘은 술값 계산하지 마. 내가 살 테니까."

"어머나? 손님의 술값을 지불하는 바텐더라니? 이건 반칙이잖아요?"

"반칙 아니야. 날 지켜 준 사람한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내가 당신을 지켜줬다고요?"

"그럼, 네가 시온을 만나겠다고 여기 매일 죽치고 있어 준 덕분에, 훈이 날 어쩌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훈이라는 남자가 내내 린차우를 해치려고 벼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린차우가 정말로 그 시온의 친구인 마코토라는 남자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

.

시온의 약혼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되도록이면 한국어를 쓰지 않고 일본어를 쓰려고 노력한 탓에,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일본어를 무리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린차우와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편했다.

어느 날, 씰의 <키스 프롬 어 로즈>가 다시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던 날, 린차우와 나는 서로를 마주한 채 고요히 그 음악을 공들여 귀기울이며 들었다. 낡은 바를 사이에 두고, 린차우는 선 채로, 그리고 나는 앉아서 팔을 괸 채로. 지울 길 없는 각자의 사랑, 빈한한 영혼을 끈질지게 지탱하고 있는 그 애달픈 감정을 애써 추스리면서.

서서히 봄이 되돌아올 준비를 하는 늦은 겨울날이었다고 기억한다.

"관은, 누명을 쓰고 서거하신 선대 황제의 황릉으로 끌려갔어. 물론, 나도 따라 끌려갔지. 황제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를 쓰고 말이야."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황릉에서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서 그 황릉을 빠져나왔어. 그리고 지금까지 환생한 그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만으로 이제까지 살아왔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한참이나 린차우를 째려보아야 했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요?"

"뭐, 믿지 못하겠다면 할 말은 없고."

"그러니까, 관은 죽고 당신만 살아남았다는 거죠?"

"아니. 같이 죽었어. 하지만 나는 다시 살아났고, 내가 살아났을 때 관은 내 곁에 없었어."

"그리고 무덤을 빠져나와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체를 감춘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늙지도 않고, 다시 죽지도 않으면서."

"응."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하는 린차우가 정말로 미쳤나 싶어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렉스 바의 어둠침침한 조명이 그 순간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쯤은 더 선명한 린차우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 어두운 조명을 드리운 그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선명하게 눈에 와 닿지 않았다. 마치 안개처럼 흐릿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잠깐이나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그 순간의 덧없는 환상에서 건져올려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순진한 아가씨를 이런 식으로 놀리다니. 취미 한번 고약하군."

뒤를 돌아보니 그 한국인 남자가 내 등 뒤로 다가와 서 있었다. 이름이 훈이라고 했던가. 린차우는 그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끝을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당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한 모양이네요."

"아직은 아니야. 시간은 충분해. 그리고 넌, 아직까지는 내 앞에 있고."

아무래도 이 남자와 린차우 사이에는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말은 일러 줘야겠어서. 물론 물증은 없지만, 시온이 널 의심하는 눈치야. 당분간 일본에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충고 정도는 해서 나쁠 거 없겠지."

"글쎄.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

"한 가지는 분명해. 이런 시시한 바 따위에 처박혀서 어린 아가씨와 만담이나 하며 노닥거리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해서 관이 나타나진 않을 거라는 거."

순간, 린차우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늘 애달픈 미소를 띄운 채 반쯤 풀어져 있던 그 눈가에, 한순간 믿을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일본어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관은 내가 찾아낼 거야. "

"......."

"한 번만 그 입에서 관의 이름이 불려진다면, 그때는 세상 없어도 널 살인범으로 경찰에 신고해 버리겠어. 증거는 다 가지고 있으니까."

맙소사.

그러니까, 이 한국인 남자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고?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곤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못 들은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린차우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했다. 그 남자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직감했을 때, 그리고 그 직감이 맞았음이 밝혀졌을 때 내가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다름아닌 에즈노 시온이라는 한 남자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간에,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반증이었다.    

.

.

.

본의 아니게 듣고 만 살인범에 대한 정보를 두고 경찰에게 갈까 말까 망설였으나 결국 찾아가지 못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내가 들은 정보만으로는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로, 일부러 나서서 골치아픈 일에 말려들었다가 벌어질 일에 대한 뒷감당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연약한 미소의 소유자, 린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그 관이라는 사람을 그리워한 나머지 망상증에 빠져 살짝 맛이 간 게 분명했다. 그런 그가 지껄이는 헛소리들을 사실로 받아들여 가며 그를 곤란해지게 만들어서 내게 득될 것이 없었다. 나까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연인과 함께 죽었던 무덤에서 혼자 살아나와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환생한 그를 기다리며 살아왔다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껏 영화로 소설로 드라마로 수없이 되풀이해 온 흔해빠진 환타지 스토리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짓자면, 무덤에서 기어나와 백 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린차우의 말은 그냥 허언이다. 훈이라는 그 남자의 말대로, 나를 곯리려는 악의 없는 장난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그의 얼굴에서 보고 만 것은, 분명 백 년의 시간에 준하는 만큼의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관을 잃어야 했던 그 처절한 아픔, 백 년이라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옅어지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그의 내리깐 눈꺼풀이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불쌍한 린차우.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관을 찾아다닐 사람이었다. 정말로 그가 자신의 전생을 잊지 않고 태어났다면, 그가 들려 준 그 이야기가, 망상증 환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헛소리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그게 설령 망상증 환자의 헛소리라 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나는 린차우가, 그의 관을 반드시 찾아내기를, 그리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신에게 기도하기로 했다.

물론, 에즈노 시온을 사랑하는 나의 염원 또한 이뤄지기를 함께 기원하면서 말이다.

.

.

.

린차우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그가 사라진 시점에서 훈 역시 더 이상 그렉스 바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나의 그 해 겨울의 이야기이다. 철없이 어리고, 철없이 어리석었던 스물 하나 겨울의 끝자락과 스물 둘 봄의 시작을 잇는 매듭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을 그만두고, 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긁어모아 일본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린차우가 했던 그 일을 배우기 위해 사설 클래스에 등록한 후 바텐더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시온이 이끄는 밴드가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잠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에즈노 시온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가 그를 잘 알지 못했던 시기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린차우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왼손잡이였다.

도쿄의 웬만큼 유명한 칵테일 바를 다 돌아다니며 일했지만, 단 한 곳, 그렉스 바에는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만큼은 시온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차우를 이따금 고용하던 그렉스 바의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시온은 그렉스 바에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그를 보러 갈 수 있을 정도로 도쿄에서 자리를 잡았다. 오로지 에즈노 시온에 대한 집요한 사랑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

.

.

린차우가 떠난 후, 나는 그의 뒤를 이어 시부야와 롯본기 일대에서 소문난 미모의 왼손잡이 바텐더로 명성을 떨쳤다. 내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백인을 동경하는 일본인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내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때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던 내 이름, 미라벨 또한 이 곳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부러움을 사곤 했다. 물론 나를 '레브'라고 친근하게 불러 준 사람은 린차우 단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언젠가는, 시온 또한 나를 레브라고 부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린차우가 일하던 그렉스 바의 사장이 바뀌면서, 그렉스 바에서 린차우와 선후배 사이로 만나게 될 가능성은 전무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선배가 된 린차우와 함께 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린차우의 곁에,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연인 관이 꼭 함께하고 있기를.



  (A4-11)

매거진의 이전글 불면(sleeples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