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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an 23. 2019

왼손잡이 바텐더 2

kalsavina 단편연작소설

왼손잡이 바텐더 2



장소: 2010년. 마스티야 (요코하마. 이시카와초)

나레이터: 기쇼 히사코





땅거미가 낮게 깔리는 어스름한 일몰 무렵을 싫어한다. 하루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서미짱 또한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녀의 피를 타고 흐르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옭아매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역회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집 밖으로 뛰쳐나가면, 지체없이 그녀를 따라나가 뒤를 쫓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저녁도 굶어가며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그녀를 뒤따라 한바탕 거리를 헤매고 난 후에야, 그녀는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꼴로, 그렇게 그녀는 별 다른 이유 없이 집 밖을 뛰쳐나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해가 저물면서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어둠 속을 우리는 단 둘이 걷고 있었다.

마치, 갈 곳 없이 세상을 떠도는 미아들처럼 말이다.

만약 그 어스름한 어둠 속을 혼자 헤매고 다녀야 했다면, 아마도 서러워서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보듬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잡아야 할 손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할 존재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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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은 내 인생 전부를 통틀어 가장 잔혹한 여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사비나 작가님이 떠난 후, 젠 또한 그녀의 뒤를 쫓듯 자취를 감추었다. 칼 작가님과 더불어 내 머릿속에서 린차우의 존재를 잠시나마 몰아내는 데 기여했던 얼간이 친구들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만나지 못했다. 대개는 '바빠서'라는 흔한 이유가 붙었지만, 뭐니뭐니 해도 녀석들의 근거지는 도쿄였고 나는 어디까지나 요코하마에 와 있었던 탓이 크다.

서미짱은 집안 행사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거의 두 주 이상의 기간을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었다.

만약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린차우는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무료함을 달래자고 그를 부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노릇이었다. 이미 내가 그의 전생의 연인 관이 아닌, 기쇼 히사코로 살아가는 인생을 택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쓸쓸할 일몰이 한창 기세좋게 불타는 초여름의 열대야를 부채질하던 그 저녁,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스티야로 향했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마땅히 달리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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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카가미(사장)가 아니면 유키(부사장이자 카가미의 부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낯선 여자가 서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칵테일 메뉴를 오픈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혹시 유키가 고용한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인가 하고 추측했다. 일단 별로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커피를 주문한 후,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카가미와 유키의 행방을 물었다.

"카가미요? 지난 주에 입원했잖아요.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입원요?"

"네. 교통사고로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의사 말로는 족히 한 달은 입원해 있어야 할 거라던데요. 유키는 병간호를 해야 해서, 하는 수 없이 내가 한 달 정도만 봐주기로 했어요."

꽤나 이국적인 생김새를 한 그녀가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좁은 눈두덩과 또렷한 눈매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아무리 봐도 혼혈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눈짓해 오며 속삭였다.

"혹시, 기쇼 히사코?"

"아, 저를 아세요?"

"그럼, 알다마다요. 그쪽은 저를 못 알아보시는 모양이네요? 섭섭하게."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본 내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몰라봤어요. 미안합니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역시, 눈썰미가 좋은 편은 아니군요."

넉살좋게 응수하는 그 미모의 여성이 바로 도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 바텐더 중 하나인 미라벨 초이였다. 얼마 전 롯폰기에서 열렸던 파티에서 화려한 칵테일 쇼를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녀는, 소위 '왼손잡이 바텐더'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그녀가 도쿄 최고의 바텐더로 명성을 날리게 된 계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철없던 어린 여학생 시절, 다름아닌 에즈노 시온, 네이디 비케이의 리더에게 한눈에 반해 학교까지 팽개치고 홀홀단신 도쿄에 와서 바텐더로 일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얘기 말이다.

"그 귀여운 애인은 같이 안 왔어요?"

"서미짱요? 아뇨. 오늘은 혼자예요."

"이런, 유감이네요. 내가 레즈비언이었다면, 당신을 유혹할 수도 있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사실 서미짱도 레즈비언은 아니었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가 뭐 소용있으랴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는 솜씨좋게 커피 대신 15년산 글렌피딕을 따라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요령껏 내게 내밀었다.

"특별히 내가 살 테니까. 마음 놓고 마셔요. 단, 아직 술이 나올 시간은 아니니까, 주위에 안 들키게 조심해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한껏 올렸던 메탈 사운드의 볼륨을 약간 낮추었다. 그러고 보니, 여느 때의 마스티야와는 달리 꽤 시끄러운 음악이 아까부터 귀청을 찢어발길 기세로 울려퍼지는 것이 아무래도 거슬리던 차였다. 하지만 카가미 취향의 재즈는 도통 내 취향이 아니었고-세상에 재즈라는 장르의 음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딱히 이렇다 하게 선호하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듣고 있기로 했다.

"이거, 딱 네이디 비케이 스타일의 음악인데요."

"그렇죠. 시온이 좋아하는 뮤지션들 중 하나예요."

"웬일로 그 인간 취향인 곡 중에 제대로 된 곡이 있었네요. 가수하고 곡목, 혹시 알아요?"

"세이오신(Saosin), 컬랍스(Collapse)."

"좋네."

시온이 추천했던 뮤지션들 중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내 취향과는 정말이지 맞지 않았던 음악들이었고(죽은 마코토 오빠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 다시 시온에게 음악 따위를 추천해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 주자 그녀는 웃었다. 묘하게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화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애잔한 미소였다.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꼭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직도 시온을 좋아해요?"

"뭐, 그렇게 물어 온다면,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녀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행주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렇게 쉽게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나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열 시가 되어 커피숍 메뉴가 칵테일 바의 메뉴판으로 바뀌고, 손님들이 알콜 음료를 본격적으로 주문하기 시작하자 바삐 손을 놀리던 그녀는 잠시 주위가 조용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한 열정은 예전같지 않지만. 어쨌든 잊기 힘든 사람이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고 만 사람이니까."

"그 사람하고 얘기해 본 적 있어요?"

"몇 번은. 내가 일하는 바에 손님으로 찾아왔었거든. 심도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가벼운 대화는 몇 번 해 본 적이 있지."

"그 사람하고 대화해 봤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알았을 텐데요."

"응. 의외로 여자 취향이 꽤 까다로운 편이었어."

"그 사람, 당신이 자길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거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라야지?"

그렇게 되물어 오는 사이 다시 손님들의 주문이 이어졌고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끊어졌다.

.

.

.

서미짱의 빈 자리가 허전하게 다가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마스티야를 찾아갔다. 비가 을씨년스럽게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습한 데다가 무덥기까지 했지만 에어컨을 풀가동시켜 놓은 마스티야의 내부는 그런대로 쾌적했다.

만약 칼 작가님이 그대로 마스티야에 머물러 있었다면, 맥주라도 함께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적과 나이의 차이를 넘어서서, 그녀와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고, 많은 말을 나누지 않고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주곤 했다.

하지만 칼 작가님은 시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칼 작가님을 대신해 그녀의 빈자리를 메워 준 사람은 다름아닌 혼혈 한국인이었던 미라벨 초이라는 이름의 왼손잡이 바텐더였다. 나보다 한 살 위인 그녀는(그 나이에 벌써 그쪽 업계의 탑이라니 굉장하다! )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시원스럽고 쾌활했다. 칼 작가님에서 보이는 예리하거나 감성적인 면모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부담없는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이 노래,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인데."

"지금 나오는 곡 말이야?

"응. 옛날에 꽤 자주 들었었는데.......기억이 잘 안 나서......아, 맞다!"

"기억났어?"

"죽은 오빠가 좋아했던 곡이에요."

"죽은 오빠라면, 기쇼 마코토 말이지?"

"알고 있었어요?"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긴 하지만, 사실은 몇 년 전에......"

순간, 미라벨이 뭔가 말을 어물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자신이 하려던 말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온이 마코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네? 어디서요?"

"롯폰기에서. 몇 년 전에. 두 사람, 정말 친한 친구였나 보지?"

"중학교 3년을 내리 붙어다녔던 친구였거든요. 우리 집에 가끔 놀러오기도 해서, 잘 알죠. 그래서, 시온이 오빠에 대해 무슨 말을 했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했대. 너의 오빠."

"네? 우리 오빠가요?"

"응. 하지만 가족들은 아마 몰랐을 거라고 했어. 아버지가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게 뻔하니까. 그런 얘기를 가족들한테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단 말이죠. "

죽은 오빠는 나이에 비해 무척 어른스럽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분명하고도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타고난 기질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그런 아버지와의 충돌이 불가피했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오빠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결국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꿈 따위를 숨겼다 해서 그걸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던 거다.  

그건 그렇다 치고, 참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미라벨 초이에게서 오빠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시온이 아니었다면, 아마 네 오빠의 존재도 몰랐을 테지. 역시 에즈노 시온은, 여러 모로 나한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야. 저기, 히사."

"네?"

"오빠 일은, 안됐어. 진심이야."

그렇게 말하는 미라벨의 표정은 온화하고 진지했다. 진심어린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딱히 그녀의 진심어린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라벨과 나는 그 손님이 누군지를 알아본 순간 하얗게 질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한국 속담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비를 맞아 흠뻑 젖은 몰골을 한 시온이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런 시간에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 인간이구나.

.

.

.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줄 알았더니, 술이 내리고 있었나 봐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머리에 미라벨이 건네 준 수건을 덮어 쓴 시온을 보며 팔짱을 낀 나는 대놓고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이유는 하나다. 내리는 비를 피해 들어왔나 했더니, 어디서 퍼마셨는지 그렇게 취하고도 모자라 또 술을 마실 요량으로 들어온 것이다.

"잘 됐네요. 마침, 나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자신의 인생 행로를 예기치 않게 바꿔 버린 존재를 마주한 사람치고는 상당히 침착해 보이는 태도로 미라벨이 말했다. 좁은 눈두덩에 섹시한 활 모양의 입술, 짙은 눈썹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로 혼혈인 특유의 매력을 유감없이 한껏 발산하는 미모였다.

"이게 누구야? 미라벨 초이? 이런 데서 다 만나네?"

"그러게요. 카가미를 보러 온 거라면 미안하게 됐네요."

"아, 카가미가 아직 퇴원을 안 했나 보네."

"카가미를 만나러 온 거라면 병원으로 가 보세요. 우산 빌려 드릴까요?"

"아니, 그보다도."

술에 취한 시온이 할 말을 찾느라 애쓰는 동안, 나는 급히 빌린 메모지에 미라벨이 알려 준 그 곡-오빠가 좋아했던 곡-의 곡목과 그 곡을 부른 가수의 이름을 옮겨 적었다. 영어 철자가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얘기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는데, 당신 참 무모한 거 아니야?"

"뭐가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학교를 집어치우고 가족과 등 돌려가며 이 낯선 타국까지 올 생각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대단하다 싶어서."

그게 누구 때문인데.

자신이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로부터 이런 비아냥을 듣고도 미라벨은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행히 우리를 제외한 다른 손님은 거의 없었고, 저만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자신들만의 대화에 몰두중인 다소 나이가 든 게이 커플만이 있었을 뿐이다.

"뭐, 구태여 그쪽한테 책임지라는 말은 안 할게요.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었으니까."

"흥."

시온이 코웃음을 쳤다.

"히사, 이 친구한테 내가 어떤 머저리인지 좀 알려주지 않을래? 당장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불과 작년에 내가 저질렀던 그 짓거리에 대해서 말이야."

"그 짓거리라면, 이미 다들 알고 있는걸요 뭐."

시온과 젠 중 어느 쪽이 먼저 칼 작가님에게 눈독을 들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아는 대로라면, 칼 작가님을 먼저 만난 쪽도, 먼저 유혹한 쪽도 젠이었다. 말하자면 시온은 젠에게 선수를 빼앗긴 셈이었다. 생각보다 두 사람이 심각한 관계임을 알아버린 시점에서, 시온은 젠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는 여전히 젠을 잊지 못했고, 하필이면 자신이 반한 여자를 콕 점찍어 낚아챈 젠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서리치고 있었다. 결국은 그 일로 동료인 유스케와 싸우다가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했다고 한다. 유스케의 친구들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불쌍한 작가님이 그런 짓까지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성폭행,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은밀하게 중얼거렸던, 듣기만 해도 목이 움츠러드는 그 단어. 시온에게 너무나 심하게 당한 나머지 칼 작가님은 미쳐버린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루머까지 돌았다.

헛소문이야 어쨌든 칼 작가님이 시온에게 어떻게 짓밟혔을지는 그리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또 다른 진실이다. 시온이 파괴한 사람은 칼 작가님이 아닌 젠, 한때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젠이었다.

젠은 시온의 손가락을 자르고 홍콩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젠에게 잘린 그의 손가락은 무사히 접합 수술을 마쳤다. 그러나 그 후로 그는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작곡에만 전념했었다. 그토록 절친했던 유스케와도 등을 돌린 채로 말이다.

아마 상대가 젠이 아니었다면, 칼 작가님이 그렇게까지 심한 꼴을 당할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고, 미라벨 초이는 그 일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구태여 시온에게 그 사건을 들먹여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먼저 나서서 그 사건을 들먹일 줄은 몰랐다. 일이 난감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 마성의 레즈비언이, 당신이 마음에 두었던 여자를 유혹했고, 그 때문에 당신이 화가 나서 그 여자를 강간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 여자, 꽤 유명한 소설가였다고 하던데요."

"맞아. 다 사실이야."

"그렇군요."

의외로 미라벨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차분하게 수긍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새로운 사실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걸로 됐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손가락은, 이제 괜찮아요?"

"그럭저럭, 요즘 의학이 상당히 발전했더라고. 아니 최첨단이라고 해야 하나. 약간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어."

"연주는요?"

"연주야 뭐, 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는 거니까."

미라벨은 안주인 견과류와 구운 은행이 담긴 그릇을 왼손으로 시온에게 내밀었다. 시온은 무심결에 오른손을 들어 그릇을 받으려 했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심하게 부딪쳤다. 미라벨이 작게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견과류가 담긴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작은 땅콩이며 은행 껍질 등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행히도 친절한 게이들이 때마침 들어온 손님들과 합세해 뒷정리를 도와주었고, 그쯤 해서는 나 자신 구태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

.

.

-왜 이렇게 비를 맞고 다녀요?

-남이야 비를 맞든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여기, 우산 있어요. 제발 이러고 다니지 말아요. 츠구얼은, 서미짱은 어디 갔어요?

-한국으로 돌아갔어. 부모님이 불러서.

-그래서 이렇게 들짐승처럼 비를 맞고 다니고 있었던 거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서미짱은 곧 돌아올 테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여자가, 당신 없이 얼마나 견딜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대체 그 아이 없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

-이런 질문을 너한테 하고 있다니, 나 참 잔인하지 않아, 린차우?

.

.

.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날 현관문 앞에 고이 접힌 채로 얌전히 세워져 있는 우산을 보고서야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 어젯밤의 기억이 그토록 희미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린차우가 집 안까지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며칠 후, 나는 다시 마스티야를 찾았다. 역시 언제나 그렇듯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날 내가 애써 자리를 비켜 준 덕에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시온과 미라벨의 사이가 얼마만큼 진전을 보였을지가 궁금했다.

다행히 미라벨은 밤 늦게 모습을 드러냈고, 나의 악의없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줄 만큼의 여유 또한 보여 주었다. 데킬라에 블루 큐라소와 라임 주스를 섞어 블루 마가리타를 만들며 그녀는 눈웃음을 쳐 보였다.

"나, 시온하고 잤어."

"와우."

"그 사람, 여러 모로 버릇이 고약하더라. 아픈 거 참느라 혼났어."

"뭐,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스물 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품어왔던 숙원을 이뤘으니까. 나로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지."

"축하해요. 하지만 사람들한테는 얘기 안 하는 게 좋겠어요."

"하라고 해도 안 해. 딱 한 사람 얘기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아마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너한테밖에 얘기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나는 얼른 블루 마가리타를 들이키고는, 지난번에 내가 들었던 세이오신의 콜랍스를 신청곡으로 주문했다. 그리고는 마스티야의 어둑한 조명 아래로 엿보이는 그녀의 화려한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며 속삭였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을 이룬 사람의 표정치고는, 별로 밝지 않은데요?"

왼손잡이 바텐더는, 왼손에 쥔 머들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며 머들러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답지 않은, 아니 바텐더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결국 내가 스툴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머들러를 주워 든 것과 동시에 그녀가 대답했다.

"맞아. 정말이지 최악이었어."

"대체 뭘 기대했던 거예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 그래, 여성 편력이 심한 것, 변태 기질이 다분한 것, 그런 것쯤은 나도 얼마든지 봐 줄 수 있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기본적으로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야. 너무나 소심해서, 일단 누군가를 마음에 둔 시점에서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야.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그 자학이 극에 달한다고 할까."

"그의 그런 점이 언니를 화나게 했어요?"

"꼭 그것만은 아니야. 어쨌든, 그날 밤에 그가 보여 준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어. 천재이고 카리스마적이니까, 당연히 그 내면이 선량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터무니없이 악랄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왼손잡이 바텐더는, 내가 내미는 머들러를 왼손으로 받아들며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못난이."

"뭐라고요?"

"형편없는 못난이였어. 그 사람."

"......."

.

.

.

카가미는 생각보다 일찍 퇴원했다. 그의 부인이자 마스티야의 여주인인 유키는 그보다 훨씬 일찍 가게로 복귀해서, 카가미를 대신해 밤에 일하는 미라벨과 교대로 가게를 지켰다. 마침내 카가미가 완전히 가게로 복귀한 시점에서 미라벨은 더 이상 마스티야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지만, 사나흘을 그곳에 더 머무르면서 내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린차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이따금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말 못할 괴로움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온 때문이겠지.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내가 함께 그리고 각자 겪고 있는 감정의 혼선을 다스리는 데는, 무엇보다도 술과 음악이 필요했다.

그날 밤, 그녀가 선곡한 곡들은, 하필이면 서미가 좋아하는 몇몇 일본 아이돌 여가수들의 발랄한 노래였다. 그 뒤를 이어 칼 작가님이 좋아했던 음울한 발라드가 이어졌다. 밖에서는 과연 우산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간주 부분에서 스피커의 볼륨을 줄인 미라벨은, 뭔가 말 못할 비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 특유의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나, 시온하고 약혼했어."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물론 미라벨 초이가 에즈노 시온의 부인이 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급속도로 진전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을 뿐이다. 이렇게 간단히 미라벨을 받아들인 시온의 진의가 의심스러웠다.

"놀랐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라벨은 그렇게 되묻고는, 두 잔째의 예거마이스터를 하이볼 글라스에 따라서는 내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아마 믿기지 않겠지. 이해해. 나도 믿기지가 않으니까."

뭔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그 설명이라는 것이 구태여 내게 필요한 설명은 아닌 이상 더는 뭔가 캐물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소원성취한 거니까. 축하해요."

"맞아. 축하할 일이지."

"무슨 대답이 그래요?"  

무심결에 그렇게 반문하며 미라벨을 쳐다본 나는, 그녀의 표정에 드리워진 암울한 기색을 보고 나서야 그 약혼에 이면계약이 숨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내가 둔했던 걸까. 시온에게는 자신의 파괴욕을 제어할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 안전장치로 미라벨을 택한 거라면, 과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라벨이 힘없이 웃으며 마침내 내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 왔다.

"내가 훌륭한 여자라고 했어.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런 말을 듣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

그 순간, 잔인한 진실을 깨달았다.

에즈노 시온을 향해 그토록 오랫동안 품어 왔던, 미라벨 초이의 열망에 대한 잔인한 진실을.

"그 사람은, 이제서야 겨우 자기 자신과 타협하기로 한 거야. 그 타협을 결심한 순간에, 마침 그 옆에 내가 있었던 거지. 그게 전부야."

미라벨은 어깨를 치켜 올리며 그녀 스스로 내린 씁쓸한 결론에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는 매니큐어를 두텁게 바른 왼손을 들어 양쪽 눈꼬리를 번갈아 닦아냈다. 그 순간 그녀는 분명히 절망하고 있었다. 그 절망을 외면하는 것만이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담배 연기처럼 텁텁한 침묵이 그 후로 한동안 이어졌다.

.

.

.

-You remain my power, my pleasure, my pain!  

오빠가 즐겨 듣던 그 노래 중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소절의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니, 이대로 서미짱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울적해졌다. 그런 나를 마주한 왼손잡이 바텐더가 한숨을 내쉬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도 린차우가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건, 서미짱의 모습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를 온몸으로 막아서던 그 가냘픈 실루엣. 나로 하여금 돌아온 린차우를 포기하게 만든 꼬마 마녀.

"그렇게 불안해?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가끔은 나도 흔들릴 때가 있어서요. 오늘은 특히 더해요. 이제쯤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하기야, 기다림 그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기는 하지. 만약,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하고. 전화라도 해 보지 그랬어?"

"그냥 믿고 기다리는 거죠.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네 믿음이 헛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축하해. 히사. 이 불안한 여름이 드디어 널 놓아 주려나 본데?"

"그건 무슨 뜻?"

"나한테 네 뒤통수 좀 보여줘."

"네?"

"뒤 좀 돌아보라고."

뒤를 돌아보니, 작고 가냘프고 아담한 체구의 소유자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 작은 체구를 더욱 작아 보이게 하는 긴 치마에, 윤기 흐르는 검은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돌아왔는지, 약간은 토라진 표정을 한 서미짱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긴 했지만, 약하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온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 얹힌 빗방울들이 마스티야의 어둑한 조명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천사의 후광 대신 빗방울을 머리에 이고 돌아온 나의 새침떼기 천사는 립글로스를 잔뜩 바른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라벨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기껏 온 데가 여기였어?"

.

.

.

-Baby, I compare you to kiss from a rose on the gray.....

씰(Seal)의 <키스 프롬 어 로즈(Kiss from a rose)>.  마코토 오빠가 좋아했던, 그리고 내 감각이 간직하고 있던 익숙한 추억을 끄집어내는 그 곡을 비처럼 맞으며, 나는 돌아온 서미짱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서미짱이 비명을 지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파! 살살 좀 안아! 그보다 너, 또 내가 없다고 저 여자한테 한눈팔고 있었지?"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 기다렸잖아."

"겨우 두 주 지났거든? 보디가드 언니? 이거 놓고 사실대로 말해. 너, (미라벨 초이를 가리키며)저 여자랑 어디까지 갔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

그때 문이 열리며 카가미와 시온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서미짱에게 나의 결백을 해명하느라 밤새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시온을 부축해 들어온 카가미는 나와 서미짱을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피곤해 죽겠네. 퇴원한 지 며칠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들 사람을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야? 너네는 왜 또 하필 여기서 이러고 있고?"

"내버려둬요. 오랫만에 만났잖아요. 두 사람."

"오랫만이고 나발이고 간에, 애정행각은 내가 나가고 나서 해. 미라벨, 오늘까지만 여기 좀 부탁해. 부탁하는 김에 이 머저리, 네 약혼자도 좀 부탁하고."

구석진 자리에 자리잡은 소파 한켠에 시온을 던져넣듯 앉힌 카가미는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며 가게를 나가 집으로 가 버렸다.

그날 밤, 요코하마의 마스티야에서 레즈비언 경호원과 그녀의 피경호인인 꼬마 마녀는 밤새 딥 키스를 나누었지만 그들을 방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이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밤 마스티야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서미짱을 제외하고는 왼손잡이 바텐더와 그녀의 술 취한 약혼자-비 대신 술을 맞고 잠든-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외에도 누군가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외의 누군가가 과연 누구였는지는 내게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다.

(A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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