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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an 25. 2019

왼손잡이 바텐더 3

Kalsavina단편연작소설(완결)

왼손잡이 바텐더 3



장소 : 2015. 데카당스 (홍콩. 셩완)

나레이터: 김현종




이따금 드럭스토어라고 부르는 곳, 사사(SASA, 홍콩의 유명 드럭스토어)라든지 왓슨즈(WATSONS)라든지 하는 곳을 들어가 이것 저것 둘러보곤 할 때가 더러 있다. 딱히 뭘 살려는 목적으로 들어간 건 물론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한 두 가지를 손에 쥐고 계산대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어째서 여자들에게는 이렇게도 잡다한 물건들이 많이도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탄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정말이지 별별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다 있고,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여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여자들과 함께하는 남자들에게도 말이다.

아내와 이혼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그럭저럭 잘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그 아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가끔 혼자 드럭스토어 따위에 들어와 아내가 고르던 물건들을 둘러보며 은밀히 한숨을 내쉬는 버릇 또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비타민 캔디, 유명한 스웨덴 제과점의 이름이 새겨진 비스킷(커피와 먹으면 그렇게도 맛있다는), 화장솜과 면봉과 다이어트 보조식품과 영양제, 머리카락에 바르는 로션, 발바닥의 각질을 효과적으로 제거해준다는 팩과 눈썹을 다듬는 데 쓰는 칼까지, 실로 여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물건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내와 나는 십대 시절부터 학교를 함께 다녔고, 스물 두 살에 결혼했다. 꽃 같은 청춘 시절을 오롯이 서로에게 바치고 나서야 마침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었다. 법원에 제출하기 위한 서류에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도장을 찍는 나를 본 그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 도장 정도는 오른손으로 찍는 게 어때?"

아무리 왼손잡이라고 해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지막 도장 정도는 오른손으로 찍었어야 했나 싶었다. 즉 그 말은, 내가 글자 쓰기와 용변 후 뒤처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철저한 왼손잡이였고, 심지어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아내와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기념비적인 도장조차 오른손으로 찍지 못했다.

.

.

.

데카당스는, 비록 외관은 클래식 바와 흡사하지만 사실상 라이브 클럽이나 진배없는 곳이다. 라이브가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단골들이 신청한 음악을 틀어 놓는다. 누군가는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음악에 심취한 채 자신만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내곤 한다.

데카당스는 그런 곳이다.

데카당스가 다른 여타의 바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남자들의 출입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남성출입금지구역은 아니지만, 이따금 여자친구를 찾으러 오는 남자들을 제외하면 남자 손님은 거의 없다. 사실상 여성전용구역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란콰이퐁과 셩완 사이의 어정쩡하게 돌아진 길목에 자리잡은 뮤직 바 <데카당스>의 유일한 남자 직원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 유명한 여류 소설가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는 훨씬 덜 화려하고 덜 아름다운 모습으로 싱가폴 슬링과 나를 마주한 채 넋없이 앉아 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 곳 홍콩에 눌러앉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젠의 친구인 사와에 상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젠과 싸운다고 한다. 하지만 젠은 별로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라, 젠의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일이기도 하다. 나와 사와에 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젠은 몇 번이나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투덜거렸다. 소설가와 산다는 건 피곤한 노릇이야. 상상을 초월한다니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유명한 여류 작가는 젠에게 반항할 때면 고함을 지르는 대신 시아(Sia)의 셀로판(Cellophane)의 후렴구를 목청 높여 부른다고 한다. 내가 손수 그 노래를 찾아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젠은 귀를 막으며 머리를 싸안았고 주위에서 한바탕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제가인 '렛잇고(Let it go)'를 부르는 것보다는 천만 배 낫다는 나의 의견에 다수가 동의한 바 있다.

그토록 독특한 센스를 가진, 그리고 젠에게는 절대적인 위력을 행사하는 이 난해한 존재는 지금 울적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다. 젠은 아니다. 물론 밤늦게 젠이 도착해서 이 우울한 여인을 잡아끌고 돌아가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녀를 위해, 소설가 칼사비나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포티쉐드(Portishead)의 발라드(그녀의 표정만큼 울적한)를 연속으로 틀어주었지만 별반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사비나 님."

사람들은 그녀를 칼 작가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에서 뒷부분을 떼어낸 '사비나'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

"오늘 만나기로 하신 분은, 어떤 분이세요?"

처음에는 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꿔 볼 목적으로 질문을 건넸을 뿐이지만, 해 놓고 보니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싶어 오히려 내 쪽에서 마음이 불편해질 판이었다. 다행히도 사비나 작가는 부드럽게 웃으며 선선히 내 질문에 대답했다.

"김 실장님하고 잘 어울릴 만한 미인이에요."

그녀는 언제나 나를 '김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닥 마음에 드는 호칭은 아니었지만, 홍콩 토박이 여인네들이 부르는 '왼손잡이 바텐더'라는 별명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한다.

"여기 드나드시는 분들 중에 미인이 아닌 분들이 있습니까?"

"특별히 더 아름다운 분이에요."

그 대답에 이렇다 하게 응수할 말이 없어서 우리의 어설픈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아니, 잠시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칼 작가가 느닷없이 다른 질문을 해 왔다.

"혹시, 일본의 록 밴드 네이디 비케이를 아세요?"

네이디 비케이라면, 당연히 안다. 이혼한 아내가 한때 죽자사자 좋아했던 그룹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한때였을 뿐이지만.

"그럼요. 잘 압니다."

"그 네이디 비케이의 기타리스트는 모르시죠?"

"아, 기타리스트라면.......유스케요?"

"아뇨. 에즈노 시온요."

"아, 에즈노 시온."

"그 사람의 약혼녀였던 사람이에요."

"아 그렇군요. 잠깐만요. 에즈노 시온이라면.......혹시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은 그 사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맞아요. 그 사람하고 약혼했던 사람이에요. 시온이 죽을 때 옆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아아, 맙소사.

그런 사람이 오늘 저녁에 여기로 오게 되어 있단 말인가.

.

.

.

마침내 그 '특별한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나는 농담삼아 사비나 작가에게 '이 곳을 드나드는 손님은 모두 미인'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 농담은 그 특별한 손님 앞에서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그 특별한 손님의 미모 앞에서 다른 여성들의 미모는 그야말로 죽을 쑤는 지경이라고 할 정도로 퇴색해 버렸다는 뜻이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는 천만다행히도 사비나 작가와 마주앉을 수 있는 창가 자리가 아닌, 나를 앞에 둔 바 쪽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할 의사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자, 서로 인사하세요. 이 쪽은 김현종 실장님, 속칭 '왼손잡이 바텐더'로 이 일대에서 유명하신 분이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은 미라벨 초이. 실장님과 마찬가지로 왼손잡이 바텐더로 유명하신 분이죠. 물론 활동 무대는 달랐지만요."

"아, 이분이 그 롯폰기의 유명한 미녀 바텐더......"

당황한 나는 그녀를 향해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그 에즈노 시온의 약혼녀였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정말 우연이네요."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 따위는 건너뛴 채 그녀가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아는 남자 왼손잡이 바텐더는 그 사람 하나뿐일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라뇨?"

"절 바텐더의 길로 인도한 사람이죠. 물론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기로 해요."

그 또 다른 '왼손잡이 바텐더'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어렵지 않게 짚이는 데가 있었다. 꽤 오래 전, 도쿄에서 한때 소문이 자자했던 아주 아름답고 가냘픈 미남자에 관해 들은 바가 있다. 왼손잡이여서 모두들 그를 이름 대신 '왼손잡이 바텐더'로 칭하는 통에 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들 한다. 어느 날인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들리는 말로는 저 유명한 경호업체 장남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프로인 나는 내 특기인 여러 가지 기술(물론 왼손을 이용한)을 능숙하게 시전하며 숙녀들에게 대접할 칵테일을 정성껏 만들었다. 미라벨 초이는 예거 밤을 주문했고 사비나 작가는 두 잔째 힙노틱 토닉을 주문했다.

"시온의 그 유명한 약혼녀가 저일 거라고는 아마 생각을 못하셨겠죠."

"응. 일본을 떠나온 후로는 그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관심을 끊고 지냈으니까. 시온의 약혼녀가 한국인이었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어."

"절반만 한국인이죠. 어머니는 프랑스 국적을 가진 스페인 사람이거든요."

"내 사촌여동생 효선이랑 동갑이라고 했던가?"

"네."

"그러면 나보다 한 살 어리네.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궁금했어요. 시온이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에요."

아아, 그렇게 된 거였나?

되도록 손님들 간에 오가는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만은 막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래 전에 죽은 그 뮤지션에 대한 숨겨진 진실에 대한 폭로전이 이런 자리에서 터질 줄은 정말 몰랐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면서, 또 다른 여자와 약혼을 했었다고? 그래 놓고는 그 다른 여자를 세상에 남겨 둔 채 어이없이 죽었다고?

.

.

.

"그 사람을 처음 보자마자, 의심 없이 내 사람이 될 남자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사람이 나타난다는 바에 거의 매일 진을 치고 앉아 있었죠. "

"학교를 휴학했다면, 그 당시 여대생이었다는 뜻이네?"

"네. 다행히도 집은 부자였으니까요. 게다가 부모님은,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막을 의지가 없으신 분들이었죠. 내가 삼합회 두목과 결혼해 집을 떠난다고 해도 '그래? 난 너를 응원해'라고 하실 분들이었어요."

"젠의 부모님 같은 분들이었구나."

"아마도요. 어쨌든, 그렇게 그를 만나러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버린 거죠.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어요."

"내가 요코하마에 체류하고 있을 때는 어땠어? 너하고 시온, 두 사람 어떤 관계였어?"

"아, 그때는 그저 서로 만나면 인사나 하고 간단한 대화만 나누는 정도였어요.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에 정식으로 교제를 하게 되었죠."

"그 사람이 순순히 너하고 약혼할 마음을 먹었다는 게 놀랍네."

듣고 있자니 상당히 실례되는 질문이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사비나 작가의 그 말이 미라벨 초이, 전설적인 여류 왼손잡이 바텐더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내가 그 사람의 약혼녀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 사람이 여자와 결혼을 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거지. 너도 알시다시피, 그가 결혼까지 강행해가며 사랑했던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언니였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죠?"

"물론 아니지."

"하지만,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언니를 생각했어요."

"그건, 사랑해서가 아니라 회한 때문이겠지. 그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건, 나 때문이 아니었거든. 그가 진짜 죽을 정도로 사랑한 다른 사람 때문이었지."

"그게 누군데요?"

순간, 여류 소설가의 그 완고해 보이는 얼굴에 짜증 섞인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

.

.

그날, 이미 고인이 된 에즈노 시온이 죽기 전까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알고 충격을 받은 사람은 미라벨 초이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의심없이 그 존재가 사비나 작가라고만 생각했을 뿐, 다른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며칠을 두고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나 작가가 미라벨 초이에게 했던 말들에 대한 진실성이 의심스러웠다.

소설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쟁이들이 흔히 그렇듯, 사비나 작가는 그런 류의 거짓말에 아주 서투른 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라벨 초이 또한 그녀의 그 어수룩한 거짓말에 호락호락 속아 넘어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데카당스에 나타나 나를 마주한 자리에 나란히 앉았을 때, 미라벨 초이의 얼굴은 분노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젠을 불러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가 겁이 나서 언니를 불러낸 거였는데, 차라리 젠을 불러낼 걸 그랬어요. 그 사람이었다면, 최소한 거짓말은 안 했을 텐데."

"젠 대신 날 만난 건 잘한 거야. 그 애한테서는 시온에 대해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걸."

"왜요? 언니 때문에 그 사람 손가락을 자른 사람이라서?"

"대체 뭘 알고 싶어?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잖아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보고 싶어한 사람은 젠이 아니라 당신이었다고요! "

"뭐, 날 다시 만나고 싶기야 했겠지. 그래서?"

"시온이 자신의 전 부인인 젠에게 말도 못하게 집착했던 건 본인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본 시점에서, 그 집착의 대상은 이미 당신에게로 넘어간 거였는데."

"그게 말이지. 미라벨. 널 만난 시점에서, 아마 그 사람의 마음은 너한테로 넘어갔을 걸."

"아니에요!"

미라벨 초이는 한 살 위인(내 생각에는 사실상 동갑내기인) 사비나 작가의 주장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어떤 여자하고도 약혼할 남자가 아니었어. 네가 그 약혼을 강요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은 정말 널 사랑한 거라고."

"이봐요. 작가님. 당신이 소설가라는 건 잘 알아요. 쓸데없는 위로는, 고맙지만 사양할래요. 이제 진실을 알려 드릴게요. 풋내기 여학생이 한 남자를 위해 타국에 와서 몇 년에 걸쳐 지난한 고생을 한 건, 순전히 그 여학생의 의지였고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에요. 하지만, 몇 년 후 시온이 내가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거죠. 되돌아올 수 없이 멀리 말이에요. 그때쯤 해서는, 더 이상 시온의 여자가 되는 것 따위는 원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운명이란 게 기가 막혀요. 내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그와 나는 서로 약혼한 사이가 되어 있었거든요."

죽은 에즈노 시온이 들었다면 무덤을 박차고 뛰쳐나왔을 법한 얘기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나는 다만, 궁금했어요. 내 생각과는 너무나 판이했던, 그 나약해 빠진, 그 삐뚤어진 어린애 같던 남자가 죽기 직전까지 다시 만나고 싶어했던 그 여자가 어떤 여자였는지 말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보니 어때?"

완연한 패배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사비나 작가가 되물었다. 아마도 솔직한 대답을 원하고 있을 터였다. 다행히도, 아름다운 미라벨은 쓸데없이 잔인한 거짓말로 이 똑똑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외모는,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하에요. 하지만."

"......."

"왜 시온이 당신을 잃고 그렇게 절망에 빠졌는지는 이해할 것 같네요. "

"......."

"다들 그가 당신을 강간한 걸 문제삼았지만, 사실은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죠. 애시당초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을 마음에 둔 거예요.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던 거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한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속앓이하다가 죽는 얘기는 정말 흔해빠진......"

"미라벨."

"네?"

"시온이 마지막까지 날 잊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널 가짜로 사랑한 건 아니야. "

"......."

"그 사람은, 그냥 날 못 이겨서 자존심이 상한 거고, 그걸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화가 난 거야. 젠과 나를 갈라놓으려고 그런 짓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젠과 내가 더 애절한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분했겠어. 너도 그 사람하고 약혼까지 했던 사람이니까, 나보다 더 잘 알 거잖아? 그 소심한 머저리. 뭐든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비뚤어진 어리광쟁이 같은 사람."  

"......."

"네가 뒤늦게 시온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난 건, 확실히 비극이긴 하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는데, 네 눈을 보니 그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더 마음아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김 실장님."

"네?"

"라프로익 있죠? 전에 젠이 킵해 두었던."

"12년산 쿼터 캐스크 말씀이시죠?"

"네. 그거요. 병째로 주세요."

.

.

.

두 숙녀들을 제대로 취하게 했다가는, 뒤늦게 나타날 젠으로부터 무슨 타박을 들을지 알 수가 없어서 일부러 위스키에 얼음을 잔뜩 넣었다. 다행히 젠이 도착했을 때 칼 작가는 취하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무사히 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미라벨 초이였다.

거의 실신했다는 표현해도 될 정도로 취해 버린 미라벨 초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결국 내 집으로 그녀를 데려오고야 만 것이다.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의 주소조차 대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작 나 자신은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음을 밝혀 둔다.

아침에 깨어난 그녀가 놀랄까 봐 미리 냉장고 문짝에 이런저런 쪽지들을 붙여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건이 어디 있다든지, 칫솔은 어떤 것을 쓰면 되는지, 그리고 아내가 쓰던 여성용품이 서랍장의 몇 번째 서랍에 있는지 등등을 써 두고 마지막으로 내 휴대폰 번호를 남겨두었다.

.

.

.

그로부터 약 일주일 가량, 미라벨 초이와 사비나 작가는 약속이나 한 듯 잠잠했다.

그러나 그 주의 주말, 모처럼 찾아든 손님들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던 나는 손님들 틈에서 미라벨 초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당황한 나머지 그만 왼손에 들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미라벨 초이가 얼른 왼팔을 뻗어 내가 떨어뜨릴 뻔한 컵을 잽싸게 잡지 않았다면 컵은 결국 바닥에 떨어져 깨졌을 것이다.

"김현종 실장님, 왜 이러세요? 아마추어같이."

그녀의 경쾌한 힐난에도 나는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내 앞에 다가와 나를 마주한 자리에 앉은 그녀는 맨해튼 한 잔을 주문하고는 침착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집에 여자들 물건이 이것저것 많은 걸로 봐서는, 여자친구가 있었나 보죠?"

"아내가 있었습니다."

"있었다,라고 과거형을 쓰시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

"네."

"어디 여행이라도 가셨나요?"

"이혼했습니다. 작년에."

"아아."

미라벨 초이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아야 했다.

"이혼은, 여기 홍콩에서 하신 건가요?"

"아니요. 함께 한국에 건너가서, 수속 밟아 합의해 주고는 저만 홍콩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아."

미라벨 초이는 다시 과장된 고갯짓을 해 보였지만, 어쩐지 아까보다는 힘이 없어 보였다.

"이혼 사유를 여쭤보는 건 실례겠죠."

"글쎄요."

실례되는 질문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아름다운 왼손잡이 바텐더 아니 한때 잘나가는 바텐더였던 여신에게는 모든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면 저도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먼저 그 쪽의 질문을 듣기로 하죠?"

"더 이상 바텐더로 활동하지 않으시는 걸로 아는데, 뭔가 이유가 있습니까?"

미라벨 초이는 대답 대신 왼손을 들어 보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왜 저걸 진작 보지 못했을까. 왼손 약지가 가운데마디까지 달아난 상태였다. 뿌리에 붙은 마지막 마디만이 애처롭게 그러나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람을 떠나보낸 그 교통사고 덕분에 이 꼴이 되었죠. "

에즈노 시온이 그녀의 손가락을 가져갔을 줄은 몰랐다. 이 여자는 영원한 나의 약혼녀라는 증거라도 남겨두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저승길 말동무로 데려가려다 실패하고 손가락 하나로 만족하며 저 세상으로 쓸쓸히 떠나가야 했던 걸까.

"그날, 당신 집까지 날 데려갔으면서 이걸 못 봤군요."

"만취한 숙녀의 손가락을 살피는 법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당황했거나, 아니면 화가 났거나.

"좋아요. 이제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차례네요. 왜 이혼하신 거죠?'

"글쎄요."

나는 웃음을 참으며 잠시 딴청을 피웠다. 뭔가 도전적이기도 하고 저돌적이기도 한 그녀의 태도가 묘하게도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에즈노 시온이 죽으면서 가져간 건 어디까지나 미라벨 초이의 손가락이지 미라벨 초이는 아니다.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댓가를 치른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에즈노 시온이 자신의 약혼녀를 데려가지 않은 건, 어쩌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대답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젓가락질을 왼손으로 하는 거 정도?"

"네에?"

"농담이고요. 아이가 안 생겨서 병원을 갔는데, 무정자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아."

이번에는 미라벨이 정말로 당황할 차례였다.

"결혼생활은,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열 다섯 살에 처음 만나서, 스물 두 살엔가 세 살엔가 결혼했고, 서른 둘에 이혼했으니까......"

"맙소사."

"왜요?"

"청춘을 다 바친 분과 이별하신 거네요?"

"그건 미라벨 초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레브라고 불러 주세요."

"네?"

"레브라고 불러 달라고요."

"아, 네. 아무튼 레브. 청춘을 다 바친 사람과의 이별은, 저만의 사연이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아, 네 좋아요."

레브는 손을 내저으며 짐짓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지난 번에, 댁에서 잤을 때 실수로 스타킹을 두고 나왔는데 말이죠.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에 가지러 가도 될까요?"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실은, 그날 주무시고 가신 이후로 청소를 한 번도 안 했거든요."

"청소를 전혀 안 했다고요?"

"전혀 안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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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당스는 라이브 클럽을 지향하는 바이고, 비록 외관은 클래식 바이긴 하지만 절대로 음악이 빠져서는 안 되는 장소이다. 물론, 혼자 가만히 숨어들듯이 찾아와서는 술을 홀짝이며 우울해하는 사비나 작가 같은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달랐다.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두 여자는, 즉 죽은 남자로 인해 친구가 되어버린 두 여자는 함께 신청하기로 한 신청곡을 두고 어느 때보다 신나게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스팅의 광팬이었는데, 미라벨 아니 레브는 <Desert Rose>를 들어야 한다고 우겼고, 사비나 작가는 <English man in new york>을 듣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참 하찮은 일로도 잘도 싸운다고 생각하며 혀를 차고 있는데 젠이 들어왔다. 젠을 본 레브가 대뜸 사비나 작가, 아니 칼에게 물었다.

"자, 저기 젠이 왔으니까. 까놓고 물어보자고. 젠한테 화낼 때 시아의 <셀로판>을 부른다는 게 사실이야?"

"겨울왕국의 <렛잇고>를 부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 노래가 낫다던데?"

"사실이었어? 와 끔찍하다. 젠이 불쌍해."

"그래서 말인데, 나도 까놓고 물어보자. 너, 그날 김현종 실장 꼬시려고 일부러 취한 척 하고 김 실장 집에 간 거 맞지?"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듣고 있는 건가.

"재워 달라고는 안 했어. 그냥 호텔 주소가 생각이 안 났을 뿐이야."

"거짓말하지 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너 그날 그렇게 취하지 않았거든? 스타킹도 일부러 두고 나온 거 맞지? 세상에 두고 나올 게 그렇게도 없었니?"

"그러면 뭘 두고 나왔어야 했을까? 브래지어? 팬티?"

젠이 배를 쥐고 웃는 것을 본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만큼은 그들의 언쟁에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국 그날의 신청곡을 고른 사람은 젠이었다.

씰(Seal)의 <키스 프롬 어 로즈(Kiss from a rose)>였다.

다행히도 젠과 나는 여자에 대한 취향은 전혀 달랐지만, 음악에 대한 취향은 비슷했다. 내가 싫어하지 않는 곡이라 다행이었다. <키스 프롬 어 로즈>를 라이브로 듣는 동안 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칼과 레브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깜박 잊고 있었네. 너희들한테 전해 줄 말이 있었는데."

"뭔데?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일 수도 있고, 나쁜 소식일 수도 있고."

"일단 듣고 판단하자. 뭔데?"

"조금 있다가, 여기 유스케가 온대."

"뭐어?"

레브는 반색을 했지만, 칼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난 집에 갈래. 유스케 볼 면목 없어."

"왜 그래? 유스케가 효선하고 이혼한 게 네 책임도 아닌데."

"하지만, 효선이 나빴어. 그건 누가 뭐라 해도 유스케한테 할 말이 없어."

"그래, 좀 있다가 유스케가 오면, 그 말을 직접 들려 주라고."

"안 돼! 그 재수없는 면상에 대고 그런 오글거리는 위로를 해 주라고?"

그렇게 티격태격거리는 여자들을 보며 실없이 웃던 어느 순간, 등 뒤로 다가드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간 정도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여자처럼 가냘프고 화사한 얼굴을 한 미남자였다. 갸름한 턱선과 얇은 입술로 미루어 보건대, 선량해 보이지 않았지만 엷은 미소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분명 손님들이 있는 쪽에서 바 안으로 들어왔다면 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감쪽같이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내 앞에 있던 쉐이커를 집어들더니 한 손으로 날렵하게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가 다시 사뿐히 받아들었다. 가벼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새로 온 바텐더인가 싶어 의아해하는 나를 외면한 채 딴청을 피우던 그는, 저만치에서 칼 작가를 상대로 뭔가를 열심히 떠들어대는 레브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톤이 낮고 가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저 풋내기가 벌써 저렇게 어엿한 요조숙녀가 되다니. 세월이 무심한데."

"레브를 아십니까?"

"응. 미라벨 초이를 레브라고 부른 사람은, 아마 지금껏 나밖에 없었을 걸? 물론 그쪽은 빼고."

"하지만, 시온은요?"

"시온? 에즈노 시온 말이야? 내가 아는 대로라면, 시온은 미라벨을 레브라 부른 적이 없어."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글쎄. 레브에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 내가 누군지."

그렇게 대답한 남자는 아연해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싱긋이 웃었다. 그 때 서너 명의 손님들이 한꺼번에 보드카 토닉과 레몬 드랍을 주문했다. 뒤늦게 그를 떠올리고 고개를 들렸을 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새 <Kiss from a Rose>가 끝나고 필 콜린스(Phil Collins)의 <어게인스트 올 오즈(Against all odds)>가 울려퍼질 때쯤, 나는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를 깨달았다. 구태여 레브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날렵하게 쉐이커를 집어들어 공중으로 던져 올리던 그의 손이 왼손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낸 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A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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