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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an 17. 2020

처음 만난 보라색

처음 만난 보라색



1

“너, 안경 어떻게 한 거야? 왜 안경 안 끼고 나왔어?”


당연히 그 안경을 끼고 나왔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반대로, 준호는 안경을 끼지 않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준호는 내 사촌남동생이었고, 중증의 색각이상자로 분류되는 색맹이었으나 얼마 전, 미국에서 개발한 색각이상 교정용 안경을 선물받았다. 그의 스물다섯 살 생일을 두어 달 정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 선물이 그를 난생 처음 보는 다채로운 색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뒤늦게 녀석의 생일을 다시 축하하고자 녀석이 좋아하는 O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그를 불러냈다. 녀석은 그 레스토랑의 폭립 스테이크와 투움바 파스타를 좋아했다. 그에게 근사한 점심을 사줄 요량이었던 나는, 당연히 그가 그 멋진 안경을 끼고 약속 장소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고,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누나 오래 기다렸어?”

그렇게 말하며 엷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안경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안경, 어떻게 했느냐고. 혹시, 안경 고장났어? 아니면 망가진 거야?”

“아니야. 집에 잘 모셔두고 있어.”

“혹시 아껴두느라 안 끼고 나온 거야.”

“그런 거지 뭐. 일단 점심이나 먹자.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


2

내가 그토록 그의 색각이상 교정안경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준호는 색맹치고도 꽤나 상태가 심각한 색각이상 증세를 타고난 아이였다. 무슨 뜻이냐 하면, 녀석의 눈에 비친 세계는 거의 무채색의 세계라 해도 좋을 만큼 색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명도는 구분할 줄 알아도 채도는 거의 구분하지 못했던 그에게 있어 색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저 ‘밝은 색’과 ‘어두운 색’ 혹은 ‘짙은 색’ 이 정도의 구분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그는 거대한 흑백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자신이 속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신이 공평했던 건지, 그는 이공계 쪽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고, 수학도 어지간히 잘했던 덕분에 꽤 우수한 명문대로 알려진 대학에 진학해 장학금으로 몇 번이나 타 가며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바르고 나온 립스틱의 빨간색을 보고도 빨간색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여자친구의 입술을 수줍게 점거한 ‘빨간색’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를 위해, 미국에서 임상테스트를 통과한 후 성공적으로 상용화된 그 색각이상 안경을 최선을 다해 공수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몇 가지의 색, 그 중에서도 밝은 노란색과 초록색, 그리고 보라색의 실체를 그에게 어떻든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보통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보는 그림책을 내게 들고 와서는 여러 가지 컬러가 덧입혀진 삽화를 가리켜 보이며 내게 지겹도록 질문하곤 했다.

“누나, 이건 무슨 색이야?”

“노란 색.”

“노란 색은 어떤 색이야?”

무슨 색이냐는 질문에 어떤 색이라고 대답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노란색은 어떤 색이야?’ 라고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곤혹스러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곤혹스러움은 마침내 어떤 향수 케이스에 덧입혀져 있던 선명한 보라색으로 인해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이 냄새, 참 좋다.”

약간의 머스크 향이 나는 그 향수의 향이 아닌게아니라 꽤 근사해서,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흐뭇하게 웃으며 뻐드렁니로 난 아랫니빨을 슬쩍 드러내 보이고는, 곧이어 보라색의 향수 케이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무슨 색이야?”

“보라색이야.”

“이것도 보라색이야?”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보라색 케이스에 한동안 눈길을 주었다. 그런 그를 내버려준 채 나는 읽던 책을 마저 읽는 데 열중했지만 어째서인지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그 무렵 녀석이 보라색으로 칠해진 물건들을 유독 자주 내게 가져와서 그 색상을 물었고, 그때마다 내가 매번 ‘보라색’이라고 대답했던 게 생각났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아마 보라색은, 이런 냄새가 나는 색일 거야. ”

나도 모르게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케이스에 적힌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색깔이 어떤 색인지 진짜 궁금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색하고 달라서, 어떤 색인지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테니까.”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색각이상 교정용 안경을 선물하기 위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마침내 나는 그와 나의 공통의 혈육들이었던 우리 사촌형제들과 더불어 그에게 색각이상 교정용 안경이라는 획기적인 선물을 안겨주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생일은 두어 달 정도 남아 있었지만,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우리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근사한 구실이 있었으니까.


-구글에서 발췌한 색각이상에 대한 설명 중 일부


<......색각 이상은 유전적 선천성의 여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후천성 색각이상은 시각과 관련된 신체 장기의 손상이나 특정 화학약품 등에 의해 유발된다......선천성 색각이상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단색형 색각이상은 단색시, 혹은 전(全)색맹이라고도 한다. 색상을 구분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경우이며, 원추세포의 이상이나 결핍으로 인해 발생한다.....간상체 단색시는 추상세포의 결핍이나 이상으로 색상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매우 드물게 발견되며, 비진행성이다......추상체 단색시는 드물게 발견되는 종류의 단색시로서.... 색상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비해 그 외의 시각 능력이나 망막전도, 안구전도 등은 비교적 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빛에 대한 과민증상(광선공포증), 무의식적인 안구 진동 증상(안구진탕), 낮은 시력 등이 함께 관찰된다.....>  


그러니까, 준호의 경우는 색각이상 중에서도 선천성 추상체 단색시에 속하는 케이스 중에서도 아주 희귀한 케이스의 경우였다. 빛에 대한 과민증상이나 안구 진동, 저시력 등은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시각장애인에 준하는 정도의 도움을 주위로부터 받아가며 생활해야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옆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그들이 움직이면 그들과 보조를 맞춰 길을 건너곤 했다. 미술 시간을 포함해 색을 구분하는 작업을 필요로 하는 수업을 할 때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의 책이나 교재가 겉표지만 컬러이고 속은 흑백으로 구성된 글자라는 사실만큼 그에게 다행스러운 사실은 없었다. 간혹 황갈색이나 암홍색 같은 몹시 드문 종류의 색깔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그가 아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명도만 존재할 뿐 채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버지 내외는 준호를 훌륭하게 뒷바라지하셨고 그 덕에 그들의  외아들은 명문대를 졸업했다. 색각이상자라는 처지 덕분에 취업은 고전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지만, 인복이 있었는지 주위의 친구들과 선배의 도움으로 선배의 지인이 경영하는 소규모 컨설팅 회사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었다.

평범하지만 귀여운, 주위로부터 ‘참하다’라는 칭찬을 제법 듣는 여자친구와도 말썽 없이 몇 년째 사귀는 중이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결핍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혹은, 그가 가진 결핍의 기억을 나눠갖지 못한다. 설령 그가 자신이 가진 결핍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나눠준다 해도,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그걸 나눠가질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3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색각이상 교정용 안경을 꼈다.

안경을 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 형제들이 그를 위해 일부러 안경과 함께 선물한 밝은 노란색 머플러와 선명한 초록색 마우스 패드의 색을 번갈아 확인한 것이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지 스물다섯 해가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는 그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그 색상들을 마침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를 위로하듯 밝고 깜찍하게 빛나는 노란색과 초록색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마침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경알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그의 눈시울이 축축하게 붉어져 오고 있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무지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보다 못한 그의 사촌 형(나의 친동생이기도 한) 준우가 한 마디 되물었다.

“어때, 끝내주지?”

“응.”

그는 한참 만에 목이 메어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내가 입은 핫핑크색 니트 블라우스를 본 그는 내 블라우스를 가리키며 경이에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게 보라색이야?”

“아니, 핑크색이야. 분홍색.”

“그렇구나. 이게, 이게 분홍색이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멋진 색깔이야.”

“이제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색깔을 확인할 차례지? 보라색 말이야.”

나는 큰 소리로 준호의 여자친구를 불렀고 일부러 숨어있던 준호의 여자친구가 내 부름에 맞춰 예쁜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모습으로 준호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선명한 보라색으로 빛나는 클러치 백을 들고 있었다. 채도가 없는 흑백의 스크린을 빠져나온, 다채로운 색상의 세계에 나타난 그녀를 본 준호는 정말로 말을 잇지 못했다. 떨리는 그의 손을 보고서야 그가 얼마나 감격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보라색이야.”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여자친구의 어깨와 팔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는 처음 만나는 보라색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맞아. 그게 보라색이야.”

“이게 밝은 보라색이야. 그리고 이제, 진짜 보라색이지. 더 어두운 보라색도 있어.”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친구의 입술을 본 그는 환하게 웃었다.

“이게 빨간색이구나.”

“응. 이게 빨간색이야.”

그는 물러서서 여자친구의 원피스, 아니 그녀가 든 클러치백, 아니 그녀의 클러치백을 점거한 보라색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이게 보라색이야.”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보라색이라고 말하는 색깔이 어떤 색인지,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

“어때? 실제로 보라색을 본 기분이?”

“나는......”

“사랑스러운 색깔이지?”

“그 이상이야. 정말,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난 정말.......”

 몇 번이나 메어오는 목을 어쩌지 못해 그는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에 맞춰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4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지겹게 보면서도 무심히 지나쳐가는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열망했던 경이로움일 수 있다는.

우리가 아는 그 진부하고도 익숙한 세계가,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믿을 수 없는 환희와 찬탄으로 빛나는 세계일 수 있다는 그 사실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난 다음 날, 나는 술을 조금 마셨고, 조금 울었다.

진한 적자주색으로 빛나는, 결코 준호에게 설명해 줄 수 없었던 그 화려한 색채의 부산물이 담긴 올드 패션 글라스는 싸구려 유리 탁자 위에서 눈부신 광택을 내며 빛을 발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다시금 초라해진 창문 너머로 환영받을 때를 놓친 불청객처럼 휘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가족들은 모두 제각기 자신의 약속을 챙기느라 집을 비웠고, 남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홀로 멍청히 무릎에 놓인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아주 오래된 일렉트릭 테크노 밴드의 콘서트를 담은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던 스마트폰의 전원은 이미 한참 전부터 꺼져 있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을 어느 누군가에게 들켜 난처해 할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이 나는 혼자였다.

준호에게 묻고 싶었다.

네게 선사했던 그리고 네가 선물받은 이 세상이, 그토록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색채로 둘러싸인 이 세상이, 왜 내게는 이토록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이혼할 무렵 7살이었던 딸아이는 어느덧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대인기피증에 걸려 한동안 외출을 기피했던 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멀지 않은 집 근처를 나다니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준호에게 근사한 선물을 했다는 뿌듯함에 차서,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모처럼 많은 친척들과 만끽하고 돌아온 다음 날. 그 감격을 오래 되씹을 여유도 없이, 나는 떠올린다.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인, 그의 앞에 펼쳐진 바로 그 경이로운 세계를.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드는 동안에도, 여자친구를 장식한 보라색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준호의 입을 가렸던 그의 두 손을 나는 어째서인지 오래오래 떠올리고 있었다.      


5

"진짜 한 사흘 정도는, 거의 눈만 뜨면 그 안경부터 찾아서 꼈던 것 같아.“

서둘지 않고, 특유의 차분한 손놀림으로 투움바 파스타를 포크에 감아 올리며 준호가 말했다.

진짜  같았어. 믿을 수가 없었지. 스물 다섯  동안 줄곧 열망해온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이었으니까.”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뭔가는 반전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신호를 보내왔지만 나는 애써 다음 말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보라색을 확인하던 그 순간을. ”

“다행이다.”

“뭐가?”

“난, 내가 너한테 했던 선물이 아주 보람없는 선물이 될까 봐 걱정했었거든.”

“설마 그럴 리가.”

“너 어릴 때, 틈만 나면 이게 무슨 색이냐고 묻던 네 질문에 답하느라 진저리를 쳤던 기억 때문에 그걸 선물한 건 절대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감격하지 마.”

“누나도 참.”

잠시 후 그는 스물 다섯 살짜리 청년답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늘 누나한테 미안했어. 누나를 힘들게 했던 거 알아.”

그런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뭔가를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색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는, 경쾌하게 거리낌없이 대답해주곤 했지. 하지만, 그게 어떤 색이냐고 물으면, 누나는 얼굴이 어두워져서 입을 다물거나 신경질을 냈지. 그게 무슨 색인지를 설명해주는 게 힘들었던 거야. 나중에는 나도, 누나한테 어떤 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걸 포기했고. 뭔가 비유할 만한 사물이나 감촉이나 소리가 있었다면 더 알기 쉬웠을 텐데. ”

“......”

“하지만 보라색은 달랐어. 보라색의 기억은, 그 멋진 향수 냄새 덕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거든. 그리고 생각을 했지.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색깔을 보라색으로 부르기로 약속했던 거구나. 그리고 그 색깔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색을 보라색으로 부르는 거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약속해서 정한 그 규칙을, 나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거구나, 하고.”

“......”

“너무너무 화가 났었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정한 그 약속의 울타리 안에 내가 없는 걸까. 다른 색깔은 젖혀두고라도, 그 보라색이라는 향기로운 색이 내게 그런 분노를 불러 일으킨 거야. 그때부터 피아노와 수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거야. 그 두 가지는, 내가 나 자신을 화나게 할 필요없이 사람들이 정해놓은 약속에 동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커피, 여기서 마실래? 아니면 나가서 다른 데 가서 마실래?”

그렇게 말을 끊어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겁이 나서, 였던 것 같다. 준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겁이 났다. 그러나 준호가 하는 말이 어째서 나를 겁나게 하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여기 커피 괜찮은 걸로 아는데? 누나 또 돈 쓰잖아?”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별다방(스타벅스의 별칭) 갈래?”

“됐어. 별다방 커피 별로야.”

“맛도 없지만 논란의 여지도 없는 곳이지.”

“맞아.”


6

반이나 남은 스테이크를 준호의 앞으로 들이밀고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드디어 아까부터 줄곧 준호에게 묻지 못한 질문을 꺼냈다.

“민희랑은, 언제 헤어진 거니?”

“아마 이제 한 달 정도 지났나.”

날짜를 계산해 보니, 준호가 스물 다섯 해 만에 색채를 되찾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헤어진 셈이다. 벌써 몇 년 동안 말없이 사귀던 애들이 헤어졌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딱히 이유를 묻는 것도 배려는 아니다 싶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점심을 산 것은, 졸지에 싱글에 된 준호에 대한 일종의 위로이기도 했다.

색채가 없던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잘 지냈으면서. 설마 그 안경이 문제가 된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애써 불안을 억눌렀다. 마침내 날라져 온 뜨거운 커피를 입으로 후후 불면서 준호가 말했다.

“누나, 아까 나한테 왜 안경 두고 나왔냐고 물었었지.”

“응.”

“처음에는,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어. 내가 이제까지 이런 색들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분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눈이 그 색채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한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그 안경을 집어들 때마다 마음 속에서 올라오던 그 간지럽고 행복한 느낌이 더는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그때서야 알았지. 내 눈이 이 멋진 색채들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순간, 이 색채들은 내게 더 이상 경이롭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찬란하다거나 하는 느낌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걸.”

“그랬구나.”

“그래서, 결국 안경을 서랍 깊숙이 집어넣었어. 그리고는 늘 하던 대로 민희랑 데이트를 하러 나갔지. 안경을 안 끼고 나간 날 보더니 민희가 꽤 당황하더라구. 아까 누나가 여기 들어오는 날 보고 당황한 것처럼. 긴 설명을 못하겠어서, 그냥 귀 쪽이 안 맞아서 조금 아파서 넣어뒀다고 둘러댔어. 민희는 그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날 이후로는 틈만 나면, 이 옷 색깔이 어떠냐, 내게 어떤 색이 어울리냐, 널 생각해서 이런 색을 골랐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런 걸 쉼없이 물어댔어. 안경을 잠깐이라고 가지고 나와서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며 화를 내기도 했어. 그 전에는 색깔 얘기 말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더 많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럭저럭 참았지만, 민희는 뭔가 나한테서 그 전에는 못 느겼던 걸 느꼈나 봐. 전에 누가 그랬지.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르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줄 안다고.”

“그렇지.”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은, 확실히 여자들 쪽이 남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다.

“헤어지자길래 그러자고 했어.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고. 헤어지기로 하고 돌아온 날, 가만히 그 안경을 꺼내서 써 봤어. 여전히 그 보라색은, 정말 아름답더라. 하지만, 그 보라색에 익숙해져 버리는 상상을 한 순간, 갑자기 소름이 끼치더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준호는 ‘익숙해진다는 것의 무서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그 자신보다 무려 열네 살이나 위인 사촌누나에게. 이미 익숙해진다는 것의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를 몸서리가 쳐지도록 잘 알고 있는 나에게.

“내가 그 아름다운 색깔에 익숙해지는 걸 상상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더라고. 몇 년을 무채색의 세계에서만 만나왔던 민희처럼 그렇게 무감각한 익숙함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 안경을 도로 서랍에 집어넣은 거야. 하지만 민희는, 몇 년을 익숙한 무채색의 세계에서만 봐 왔던 그애가, 그렇게 눈부시게 예쁘다는 걸 확인한 그 순간에, 그 애는 날 떠났어. 무채색의 익숙함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떠나지 않았던 그 애는, 나한테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를 내게 알려주고는 떠나가 버린 거야.”

“화나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누나는 내가 화났을 거라 생각했어? 민희한테?”

“글쎄, 조금, 쯤은?”

“화나진 않았어. 이상하지? 이유라면 아마,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한테 소중한 존재였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붙잡을 수는 없었어. 사실은 붙잡아 보려고도 했는데, 그 순간에, 그 신비로운 색깔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버리고 말았지 뭐야. 그 보라색 말이야.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잠깐이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

“무채색인 동안에만 내 곁에 머물러 줬다가, 내게 있어 색채를 지닌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후에 나를 떠나버린 거지. 그건 그애 잘못이 아니야. 그럼 뭐가 잘못된 걸까? 집에 와서 곰곰이 혼자 생각해 보다가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른 거야. 그래서 그 안경을 쓰고, 처음 만난 그때 그 느낌 그대로 내가 만난 보라색을 찬찬히 들여다봤어. 아마 내가 이 색채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내가 더 이상 이 보라색을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포기한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정말이지 그 보라색만큼은, 내게 있어서 절대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색이었거든.”


7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현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비참하게 전락하고 만다. 꿈은 꿈으로 남아 있을 때 아름답다는 말은, 결코 꿈을 이루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허황된 말이 아니다.

그에게 먼셀색상표를 이용해 만든 컬러트리 소품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내 계획을, 나는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민희가 마음에 들었었는데. ”

“다들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세상에 여자가 민희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건 내가 너한테 했어야 할 말 같은데? 뭔가 대사가 좀 꼬인 것 같다?”

“누나도 참. 우리가 뭐 드라마 찍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괜찮아. 당분간은, 이대로 혼자인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장담하는데, 너 오래 혼자 있지는 않을 거야. 아마 곧 새 여자친구가 생길 걸.”

“그러면 더 좋고. 아, 이 아스파라거스, 아마 초록색이겠지?”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고 지겨운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일 수 있다. 예기치 않게 자신에게 찾아든 그 환희를 자신도 모르게 잃어가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다니.

괜찮다.

아직 그는 나에 비하면 턱없이 어리다. 그에게는 아직도 그를 찾아올 황홀한 순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새로운 여자친구, 결혼을 하면 아이도 태어날 테고. 그러나 그가 살면서 맛보게 될 그 어떤 기쁨도, 그가 처음 만난 보라색이 그에게 선사했던 기쁨을 주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준호가 내게 고마워하고 있을지, 아니면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가 문득 궁금해졌지만 그런 질문은 애써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괜찮다면.”

커피를 다 마시고 난 준호가 빈 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두 번째 커피는 리필하지 말고 누나가 좋아하는 별다방 가서 마시자. 마침 친구 녀석이 선물한 모바일 쿠폰이 있거든. 아직 내가 민희랑 헤어진 걸 모르는 녀석이라, 커플 세트 쿠폰을 보내왔지 뭐야. 오늘 같은 날 쓰기엔 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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