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형 Part 2
종이인형 PART 2- 내 목소리 들려요?
나는 종이인형입니다.
그러나 마분지에 공업용 물감을 인쇄해서 만들어낸 그런 종이인형이 아니랍니다. 나는 완벽한 수제 종이인형입니다. 나의 주인인 소녀―소녀의 이름은 수이입니다―의 언니가 동생을 위해 켄트지에 유성펜으로 정성껏 그리고 손으로 물감을 칠한 후 직접 가위로 오려내어 만든 종이 인형입니다. 가늘게 오려낸 목이 달아날까봐 목 뒤에는 이쑤시개로 부목까지 만들어 붙였답니다. 그만큼 정성껏 만들어진 인형이라는 뜻이죠.
비밀 얘기를 하나 해 드릴게요.
사람들은 대부분, 인형 따위가 무슨 사랑을 알겠느냐고 장난처럼 되묻습니다. 그것도 저처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 얘기를 한 사람을 바보 취급할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인형에 관한 얘기가 그렇게 드물지는 않다고, 수이의 언니가 얘기하는 걸 저는 들었답니다.
수이에게는 언니뿐 아니라 오빠와 남동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칠고 장난기가 심해서 걸핏하면 수이의 장난감을 망가뜨리곤 했기 때문에 수이는 되도록 오빠나 남동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수이의 언니는 수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수이의 인형인 나와 나의 드레스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수이와 함께 놀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이는 늘 나와 둘이서만 놀았고, 그래서 늘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늘 우울했어요. 바로 그 날, 수이의 남자친구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수이의 남자친구는 수이보다 두 살 많았는데요. 수이의 남자 형제들처럼 거칠지 않았어요.
하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천사처럼 웃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저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저는 종이인형이었고, 그 애는 수이의 남자친구였어요. 민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애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저를 집어들고는 몇 번이나 예쁘다고 감탄했습니다.
동화책의 책갈피 사이사이에 숨겨둔 친구들과 드레스를 꺼내자 민우는 재미있어하며 수이를 칭찬했습니다.
“보물찾기 하는 거 같아.”
민우는 마치 여자아이들처럼 수이와 사이좋게 놀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민우가 돌아갈 무렵, 어김없이 수이를 곯려주려 들어온 수이의 오빠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수이의 오빠는 장난감 로봇을 가져와 수이와 민우 사이에 끼어들었어요.
“같이 놀자.”
“싫어. 오빠는 화가 나면 내 인형을 찢어 버리잖아.”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로봇에겐 나쁜 악당이 필요하다고. 자, 그 인형 이리 줘.”
“싫어!”
“할 수 없지. 그러면 이거라도.”
수이의 오빠는 내 드레스를 가져다가 로봇으로 마구 내려찧기 시작했습니다. 수이가 말렸지만 수이의 오빠는 듣지 않았어요. 오빠에게서 종이 드레스를 빼앗으려던 수이는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바닥에 놓아 두었던 물컵을 실수로 내 드레스에 엎질러 버렸지 뭐예요!
나처럼 종이로 만들어진 내 드레스는 물에 젖어 우글쭈글해지고 말았습니다.
수이는 내 드레스를 망친 게 분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 역시 울었죠. 그건 수이뿐 아니라 나 역시 아끼는 드레스였거든요. 그러나 민우는 수이를 달랬어요.
“버리지 않아도 돼. 방법이 있을 거야. ”
민우는 수이 언니의 방에서 헤어 드라이기를 가져와 내 옷을 말렸습니다. 드레스가 마르자 수이는 기뻐했습니다.
“처음보다 훨씬 예뻐졌어. 이 색깔 좀 봐.”
“물감이 번져서 그렇게 된 거야.”
정말로 내 핑크색 드레스는 물감이 번지는 통에 훨씬 예쁜 색깔로 물들었습니다. 완전히 마른 내 드레스는 약간 우그러지긴 했지만 그런대로 다시 입을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민우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에게 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인형, 남자친구는 없어?”
민우가 수이의 언니에게 어른스럽게 물었어요.
“남자친구?”
“그래, 종이인형이라도 남자친구는 있어야 하잖아.수이가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애는 아직 어려서 몰라. 남자아이들은 다 내 동생들 같다고만 생각하니까. 자기 인형도 자기와 똑같이 남자 따위 필요없다고 생각할 거야?”
“흐음 그래?”
민우는 자상한 소년이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상할 필요는 없는데, 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난 남자친구 따위 필요하지 않아. 네가 있잖아! 나는 널 수이와 사이좋게 공유할 수 있는데!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구. 제발, 내 목소리 들려요?
“그거, 설마 네 생각은 아니겠지? 남자 따위 필요없다는 거 말이야?”
더 이상은 들을 수가 없었어요. 민우가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거든요.
민우가 돌아간 후에도 나는 책갈피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그 애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 애는 저와 결혼하지 못하겠죠. 그 애는 수이의 남자친구니까요.
수이는 남자친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언니에게 가서 저의 남자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수이의 언니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요. 그래서, 얼마 후 결국 내게도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그 남자친구는 나와 마찬가지로 수이의 언니가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가위로 오려진 종이인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새로운 남자친구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여러분도 당연히 아시겠죠? 새로운 남자친구는 민우를 꽤 많이 닮았지만, 그래도 민우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남자친구는 그런 나를 비웃었습니다.
―인형 따위가 사람을 좋아해서 어쩌자는 거야?
―안 될 이유는 없잖아. 나 혼자 좋아하는 것조차 막을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어.
―그러지 말고 용기내어 가서 고백하는 건 어때?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내게는 목소리가 없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인형에게 무슨 목소리가 있을 수 있겠어요? 종이로 된 남자친구가 잔인하게 말했습니다.
―어디 그 인어공주인가 하는 멍청이처럼 마녀를 찾아가서 협상이라도 해 보시든지.
수이가 좋아하는 그 동화책에 나오는 멍청이 공주들이라면 나도 다 알고 있었어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물론 인어공주도 말이죠. 하지만 내게는 목소리도 없었고, 찾아가서 협상할 수 있는 마녀 또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비극은 항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납니다.
나는 항상, 나나 내 남자친구의 목숨을 빼앗아갈 사람이 수이의 오빠나 남동생일 거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수이의 친구가 놀러온 날, 남자친구는 어이없게도 그 친구에게 당해 그만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어요. 따지고 보면 날 지키려다 죽은 거죠. 가엾은 남자친구.
수이의 친구는 심술궂은 계집애였어요.
대체로 어린 여자애들에게는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이유 없는 심술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계집애 역시 딱히 자신이 왜 심술을 부리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여자아이들이 있게 마련이죠. 남자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로봇을 좋아하는 수아의 남자 형제들 같은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아와 함께 기꺼이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하며 노는 민우 같은 애들도 있는 법이구요.
수이는 그 계집애에게 자기가 아끼는 푸들 인형과 곱슬머리 여왕 인형을 다 양보했지만, 그 계집애는 나를 호시탐탐 노렸어요. 하지만 수이는 찢어지기 쉬운 종이로 만들어진 나만은 절대로 그 계집애에게 양보하려 들지 않았어요.
마침내 수이가 쿠키와 주스를 가지러 갔을 때, 나는 그 애가 나를 해칠 거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 애의 손이 나를 잡으러 다가오자 나는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어요.
그 때, 남자친구가 얼른 내 앞을 가로막았죠. 그 애는 나를 집어들려다 내 앞에 날아온 남자친구를 먼저 집어들었어요.
“그래, 너부터 찢어줘야겠다.”
남자친구의 목이 뎅겅 잘려나간 그 순간에 수이가 들이닥쳤어요.
남자친구의 찢어진 목을 확인한 수이는 당장 그 계집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고 곧 큰 소동이 일어났어요. 비명과 고성이 오갔고 수이의 언니와 엄마가 달려왔어요. 수이는 저 못된 계집애가 내 인형을 찢었다며 발악을 했고 그 벌로 수이의 엄마는 수이의 뺨을 때렸어요.
그리고 수이의 언니 역시 수이의 엄마에게 면박을 당했죠.
―다시는 저 따위 종이인형 같은 거 만들어주지 마! 네가 애 버릇을 다 버려놨어!
솔직히 말해서, 남자친구의 죽음은 저에겐 비극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는 내 아름다운 드레스들과 함께 책갈피 사이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죠. 마법의 탑에 유폐된 공주처럼 말이죠.
바로 그게 비극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영 내가 좋아하는 그 소년, 수이의 남자친구를 만날 수가 없잖아요?
그날 밤, 혼자 남아 훌쩍이며 울던 제 앞에 죽은 남자친구의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인형의 유령이라니, 너무 웃기죠? 하지만 인형 역시 꿈을 꾸고, 인형의 유령 역시 존재한다는 걸 믿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울 것까지는 없잖아?
남자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는 달아난 목 뒤에 스카치테이프로 된 부목을 대어 간신히 목과 몸통을 연결시킨 상태였죠.
―그렇게 울라고 너를 구하고 죽은 게 아닌데.
―어째서? 민우는 수이를 사랑하고 수이와 결혼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아니야.
―민우는 수이를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그는 나를 달래는 투로 이렇게 말했죠.
―내 말 믿지 못할 테지만, 민우는 널 사랑하게 될 거야. 물론 수이를 좋아하지만, 수이를 사랑하지는 않아. 지금으로도 충분해. 설마, 너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울면서 외쳤습니다. 종이로 된 남자친구, 아니 종이인형의 유령은 전 여자친구였던 나를 달래며 물었습니다.
―네가 선택해. 사람이 되어서 민우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종이인형인 채로 남아서 민우의 사랑을 받든지.
―사람이 될 거야.
―후회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상관없어.
―좋아.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채로 남자친구 종이인형의 유령이 말했습니다.
―넌 이제부터 수이가 될 거야. 네가 수이의 인생을 사는 동안, 수이가 너 대신 네 종이인형의 몸에 갇히게 되겠지만 할 수 없지. 명심해. 절대로 종이인형이 된 수이를 찢거나 물에 빠뜨리면 안 돼. 그러면 너도 죽는 거야. 넌 결국 종이인형일 뿐이지. 진짜 수이는 아니니까.
남자친구의 말대로 잠들었던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살아 있는 살과 피를 가진 수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때 내 기쁨이 어땠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수이로 변하고 난 후, 나는 민우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민우는 걸핏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했지만, 나는 입원한 그 애를 찾아가 정성껏 놀아주었습니다. 물론, 종이로 된 내 안에 갇힌 수이를 데리고 가서 놀아주는 걸 잊지 않았죠.
결국 민우는 건강을 되찾았고, 그애와 나는 함께 자랐습니다.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민우를 사랑했습니다. 민우는 언제나 내게 다정했죠. 그리고 나는 민우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다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흡족해했습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늘게 뜬 눈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젊은 청년과 아가씨로 성장하는 동안에도, 나는 항상 민우가 나를 사랑한다고만 믿었답니다.
물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에 언뜻 내비치는 씁쓸한 기색에 대해서는, 약간 불안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불안은 불안으로 끝날 뿐이었어요. 다행히 민우는 본래의 나였던, 종이인형이 된 수이를 보여주면 금방 다시 미소를 지으며 기운을 되찾곤 했습니다.
나는 본래 내 몸이었던 종이인형을, 그리고 드레스들을 정성껏 관리했습니다. 전처럼 책갈피 사이에 끼워두지 않고 반드시 두꺼운 마분지로 된 상자에 넣어 제습제와 함께 넣어두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종이인형으로 다시 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어요.
우리 약혼하는 그 날까지 종이인형으로 변한 수이는 무사했습니다.
마침내 약혼을 앞둔 어느 날, 민우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갑자기 수이(종이인형이 된)를 꺼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이가 담긴 상자를 민우에게 건넸고 민우는 수이를 꺼내 든 채 한동안 말없이 수이를 들여다보았죠.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민우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민우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내게 이렇게 물어 왔습니다.
“이 인형도 우리와 함께 살아야겠지?”
물론 나는 그 인형을 가져갈 생각이었어요. 그 인형은 본래의 나니까요. 하지만 민우의 심각한 태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내저었어요.
“싫어. 누가 종이인형 따위와 같이 산대? ”
그러자 민우는 내가 깜짝 놀랄 만큼 화를 냈어요.
“그렇다면, 나 너하고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종이인형 따위 가져가지 않는다고 나랑 결혼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나는 울면서 외쳤죠. 그러자 민우가 냉정한 목소리로, 내가 믿을 수 없는 고백을 해왔습니다.
“내가 사랑한 건 네가 아니라 저 종이인형이야. ”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 순간, 오래 전 목이 찢어져 죽은 전 남자친구 종이인형의 말이 홀연히 떠올랐어요.
―내 말 믿지 않겠지만, 민우는 널 사랑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민우는, 자신의 오랜 여자친구였던 수이가 아니라, 종이인형이었던 나를 사랑했던 거예요. 난 그것도 모르고 수이가 되어 민우와 결혼하려 했던 거죠.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민우의 고백은 더욱 잔인했습니다.
“그 종이인형과 헤어질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너와 죽 함께해 왔어. 그리고 이제 그 인형을 갖기 위해서 너와 결혼할 생각이야.”
그날 밤, 나는 살그머니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다시 나타난, 종이인형 남자친구의 유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남자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내저으며 나를 책망했습니다.
―그것 봐. 후회할 거라고 내가 말했지. 넌 민우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
그랬어요. 사람이 되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언제나 함께하는 그 시간에 도취되어 그랬던 걸까요.
―아직도 수이로 남아 있고 싶어?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있을까?
종이인형 남자친구는 답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민우는 수이가 된 나를 바라봐주지 않고 언제나 본래의 나였던 종이인형만을 들여다보았으니까요. 종이인형의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고, 종이인형과 밥을 먹고, 종이인형에게 말을 걸고.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어느 날 밤 살그머니 일어나 종이인형을 집어들었습니다. 목을 찢을까, 물에 적실까를 두고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수이를 물에 담갔죠. 그렇게도 오랫동안 애지중지 해왔던 수이를. 아니 나 자신을 말이죠.
그렇게 되면 죽는 건 수이가 아니라 나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나 역시 민우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채로는 살고 싶지 않았어요.
수이가 되면, 민우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받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정신을 잃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게 나의 죽음이라는 걸 직감하면서요.
얼굴 위로 세차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난 깨어났습니다. 나는 다시 종이인형으로 되돌아와 있었죠.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내가 다시 종이인형이 된 거예요. 민우가 헤어 드라이어로 나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민우의 사랑을 받는 종이인형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하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민우의 눈에 깃든 냉담한 표정이 나를 당황하게 했어요. 민우는 지금까지 내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나를 내려다보았죠. 그때 어딘가에서 수이의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침내 사람으로 되돌아온 수이가, 이제는 아가씨가 된 수이가 긴 의자에 누워 있었어요. 수이는 민우를 향해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나, 악몽을 꿨어.”
민우는 부드러운 눈길로 수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소름이 끼쳤어요. 민우는 나를 다시 종이인형으로 변하게 하려고 내게 거짓말을 했던 걸까요? 수이로 변했던 내게? 사람으로 되돌아온 수이를 민우의 부드러운 눈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악몽?”
“내가, 내가 종이인형 안에 갇히는 꿈을 꾸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악몽이 아니야.”
민우가 수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넌 진짜로 종이 인형 안에 갇혀 있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수이는 미소지었지만 나는 미소지을 수 없었습니다. 민우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종이인형 안에 갇힌 널 구해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
수이는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수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민우가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
“응?”
“오래 전에 민우라는 아이가 있었어.”
“응.”
“민우에게는 수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친구의 종이인형을 사랑했대.”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수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까르르 웃었을 뿐이죠. 나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민우는 원래 몸이 아팠어. 많이 아파서, 어느 날, 민우의 영혼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몸에서 빠져나왔지. 그리고 민우 대신 종이인형의 영혼이 민우의 몸 속으로 들어갔고.”
“정말?”
수이는 민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애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민우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종이인형은 자기 여자친구 대신 목이 달아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거든. 그 이기적인 여자친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그 종이인형을 불쌍하게 여긴 신이 그 종이인형에게 사람의 영혼을 주셨어.”
“정말 재미있다. 자기 동화작가 해도 되겠어.”
까르르 웃는 수이의 이마에 민우가 입맞추는 모습을 보며, 나는 민우가 하는 말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던 민우는 진짜 민우가 아닌 죽은 내 남자친구 종이인형이었던 거죠.
모든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비참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내 몸은 보기 흉하게 우그러졌지만, 민우 아니 전 남자친구의 정성어린 손길 덕에 많이 회복된 상태였죠.
그리고 마침내 전 남자친구의 영혼이 종이인형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그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날 속이다니!
―누가 속였다는 거야?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오래 전, 처음으로 반했던 그 목소리의 울림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거든요.
―잘 생각해 봐.
―뭘 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민우는 결국 널 사랑하게 될 거라고. 네가 수이가 되어 민우와 결혼하게 되면, 너는 결국 민우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아니야.
나는 울며 되물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민우는 진짜 민우가 아니야.
―그래, 그 애가 진짜가 아니라면, 잘 생각해 봐. 진짜 민우는 어디로 갔을까?
물에 젖어 우그러진 나는, 나는 목 뒤에 부목을 대 몸과 몸통을 억지로 연결한 내 전 남자친구 종이인형을 쳐다보았어요. 그는 민우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비밀 이야기랍니다.
내 대신 목을 찢겨 죽은 내 전 남자친구 종이인형은, 민우라는 소년으로 변해 어른이 된 후 소꿉동무였던 수이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민우라는 소년을 사랑했던 종이인형인 나는, 민우의 영혼이 깃든 내 남자친구인 종이인형과 살고 있습니다. 나는 물에 젖어 우글쭈글하게 변했고 민우는 분리된 몸과 몸통을 연결하기 위해 스카치테이프로 된 부목을 대고 있죠. 우리는 사이좋게 망가진 한 쌍의 근사한 종이인형 커플입니다.
우리는 책갈피 속에서 함께 손을 마주잡고 파란 하늘과 녹색의 나무숲을 꿈꿉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네가 사랑한 건 너하고 똑같은 종이인형일 뿐이잖아? 라고 사람들은 되물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가 진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영혼이 깃든 종이인형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