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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n 06. 2020

에세이) 애써 불행을 응시할 필요 없잖아?

어떤 단상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는 싫어하지만 하드코어 추리물을 즐기는  A, 김기덕의 영화를 혐오하지만 <킬빌>은 재미있게 보았다는 B, 인류의 멸망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Y, 그런 Y에게 동조하며 세상은 아직 괜찮다고 말하는 긍정주의자 M.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폭력을 가공했건 뭘 가공했건 <판타지 픽션>에는 거부감이 없으나 추악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포르노 판타지>에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떤 추악한 내용이 됐건 내 현실과의 접점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주어졌을 때만 마음놓고 즐긴다는 것인데,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토할 만큼 역겨운 현실을 그대로 다룬 <현실 포르노>를 선호할 사람은 별로 없다. (N번방이나 화장실 몰카 따위를 즐기는 쓰레기들은 논외로 한다. 나는 건실한 사회구성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두겁을 쓴 짐승만큼은 제외한 구성원들의 범주 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현실에 대한 섬뜩한 공포나 징조 혹은 경고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A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B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키우고 있다. Y는 최근에 갓 태어난 딸을 키우는 재미(물론 힘들긴 하겠지만)에 푹 빠져 있고 M은 아이가 없지만 남편과 고양이와 함께 안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행복이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명사 대신 "평온하고 안정적인" 보호막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어보라고 권했다가는 손사래를  치며 칠색팔색을 할 것이라는 걸 자신한다.



내가 정작으로 신기해하는 것은, 그들이 묘하게도 현실을 추악하게 다룬 훼이크 다큐나 그런 현실을 소재로 한 현실혐오 포르노 픽션에서 느끼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에서 그들의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 감정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아무리 취향이 별나도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그렇게 많을 리가).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의 울타리 안에 있는 그들의 "불편한 감정"에서 묘하게도 읽혀지는 불안감이랄까. 요컨대 그들이 불편해하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의 실제적인 현실을 침해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현실혐오 포르노를 접했을 때 보여주는 반응에서 어쩐지 내 현실을 침해당할 것 같은 불안감"을 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Y와 M의 경우는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그러나 A와 B의 경우는 내가 말한 그대로의 감정, 즉 현실을 침해당하는 듯한 느낌에 대한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A: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봐 싫어. B: 너무 현실을 끔찍하게 묘사한 게 불편합니다)



혐오스러운 현실을 다른 포르노나 훼이크 다큐나 논팍션같은 픽션 등등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그 불안이 내게는 상당히 의아하고도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내 경우는 그런 현실혐오성 포르노에 과다하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대체로 불쾌감이나 불편함 혹은 불안감보다는 "그래 저게 현실이지"학고 수긍하고 끝내 버리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포르노들 중에서도 그런 대로 높은 점수를 주는 경우는 "어쨌거나 인간의 추악함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쉽지 않은 시도"라는 관점에서의 점수인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인간이 추악한 존재인 건 나도 다 알거든? 그걸 왜 구태여 내 앞에 들먹여?" 라는 반응이다. 다만 그 추악한 양상을 굳이 예술로 포장해서 사실상 상업화 즉 돈 버는 게 목적이라면?" 하는 B의 반론 앞에서는 나도 할 말을 잠시 잊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1984년, 동물농장)를 팔아 돈을 버는 장사를 했다고는 믿기 싫고, 김기덕이 <나쁜 남자>나 <사마리아>나 <피에타>를 "떼돈 벌 거라는" 확신 하에 제작했다고는 믿기 싫었는데, 김기덕의 경우는 그 자신의 도덕성이 도마에 올라 강제 퇴장한 상황이니 여기에서 역시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건가"라는 의문이 들어 서글프기도 했다. 서로의 기분만 상하는 무의미한 논쟁을 싫어하는  나는 논쟁은 그 정도로 하고 적당히 "현실포르노에 대한 불쾌감"은 당연한 것, 이라는 두루뭉술한 결론을 내리고 말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가 결국 이 쓰잘데기 없이 긴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은 것은;

당신들이 다 아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현실임에도, 당신들을 불쾌하게 하는 현실임에도, 불행과 고통을 팔아가며 돈을 버는 현실임에도, 그런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들이 설령 시대착오적이고 판단착오적이며 사이비 종교 집회에서나 먹힐 법한 싸구려 경고를 휘날린다 하더라도. <위선에 대한 고발>을 어쩔 수 없이 다루어야 하는 불쾌함을 감수하고 만들어진 것들을 마냥 외면하는 게 온당하냐는 질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족속(내가 언급한 네 분)과 그렇지 못한 족속(내가 포함된) 사이의 간극이다.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답은 이 간극을 좁히거나 타협점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이 간극 자체를 그대로 두고 인정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의문을 모처럼 정리하면서 내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 사람들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내부에 깃든 악랄한 면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내가 생각보다 많아 배배 꼬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행복을 깨뜨리지 마"가 아니라 "애써 불행을 응시할 필요 없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연약한 선량함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도대체 인간의 더러운 면을 얼마나 봐댔길래 이렇게까지 사람이 꼬여버린 건지.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너무 늦기 전에 세상과 화해하는 것.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나의 숙제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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