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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l 04. 2020

단편)기초생활수급자

타인의 존엄성

기초생활수급자 



1

한 동사무소 여직원이 밤늦게 귀가하던 도중 둔기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숨졌다. 이 사건은 이내 전국의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대담한 범행 수법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여직원은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바로 직행하지 않고 근처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친구들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귀가하던 도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이 자정을 넘긴 시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평소 다니던 길이 그렇게 한적하고 외진 길도 아니었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었다. 물론 도로변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오가는 차들만이 연신 속력을 내고 있었을 시간이기는 했다. 몹시 재수없게도, 그녀는 CCTV의 감시망을 용케도 벗어난 지점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 지점은 고급 아파트 단지로 둘러싼 고급 조경용 가로수에 가려진, 아파트 단지 안으로 통하는 샛길의 입구였다. 

솔직히 말해서, CCTV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 사건이 자칫하면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범인은 아주 싱겁게도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자수했다. 그리고 나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한 형사의 동료 겸 부하인 김 경위로부터 전화를 통해 범인이 자수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김 경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범인도 확인할 겸 경찰서를 찾아가려던 차에 마침 김 경위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그렇쟎아도 가 보려고 했다는 내 말에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갓 잡힌 범인의 신상명세를 알려 왔다. 

-작가님, 혹시 유서랑이라는 연극배우 아세요?

-알지. 김 경위 넌 아마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꽤 인기 많았어. 나도 한때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분이야. 그런데 그 분이 왜?”

“그 분이 지금 경찰서에 와 있어요.”

“뭐? 그 분이 왜? 혹시 유가족이야?”

“아뇨. 범인이래요.”



2

다행히 사건을 맡은 담당형사가 사정을 봐 준 덕에(물론 김 경위의 요청이 주효했지만) 유가족이 도착하기 전 십여 분 정도 유마담(그것이 그녀의 별칭이었다)과 이야기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녀가 나와 한 동네에 살고 있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연극계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어언 십사오 년이 훌쩍 넘었다. 한때 재능과 열정이 넘쳤던 미모의 연극배우였지만,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었다고 들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한 후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다시 재혼해 그럭저럭 잘 산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사람을 쏘아보는 그녀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그녀가 진범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일단 전후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내게는 큰누나 뻘 되는 유마담이 내 이웃주민이었음을 몰랐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했다. 

“이렇게 가까이 와 계시면서 왜 연락을 안 주셨어요?”

“연락하면 뭐하냐? 네가 달리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을 텐데.”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가 옳았기에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사는 곳은 그녀의 거주지와 행정구역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꽤 멀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침착한 눈길로 나를 쏘아보며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겠지?”

“네.”

그 가냘픈 손모가지로 여자를 내리쳐 죽일 수 있을 만큼 둔중한 흉기를 휘두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의혹을 저만치 머릿속에 접어두고,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걸 여쭤보려고 했어요. 왜 그러셨는지.”

유마담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당장 이 동네를 떠나라잖아.”

“네?”

“그 빌어먹을 년이 말이야. 나보고 이 동네를 뜨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래. 정부에서 마땅히 나한테 줘야 할 돈을 나한테 주기 싫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러면서 왜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느냐는 식으로 빈정거리더라고.”

그러니까, 그녀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래도 참았어. 어쨌든 일을 못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하지만, 그 발칙한 년이 나보고 이사가라 마라 할 권리는 없는 거거든?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확 나꿔채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어.”

“성질 많이 죽으셨네요.”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거지. 집에 돌아와서 엄청 후회했어. 차라리 그때 사람들이 보든말든 머리채라도 확 나꿔채 버렸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그 재수없는 년도 머리카락은 한 뭉탱이 뽑혔을지언정 목숨보전은 했을 텐데. 아깝게 됐어.”

다시 한숨을 내쉬는 유마담의 얼굴에 드리워진 씁쓸한 표정을 보며, 그녀가 그쯤에서 더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응당 그녀에게 해야 할 질문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누가 그랬어요?

순간 유마담이 그 날카로운 눈을 치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그런 짓 하실 분 아닌 거 알아요. 그럴 힘도 없으시잖아요. 대체 누구 대신 누명을 쓰시려는 거냐고요?”

안타깝게도 유가족이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경찰서에 달려왔고, 곧이어 울부짖는 소리와 욕설과 고함 소리로 경찰서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마담이 유가족들에게 당할 수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지만 일단은 그 자리를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유마담은 무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한때 그녀의 지인이자 팬이었던 나로서는 피하는 것, 그래서 그녀의 수치를 구경할 눈을 한 쌍이라도 더 줄여주는 것만이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예의였다. 



유서랑. 54세. 전직 연극배우. 일명 유마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열 아홉 살 때부터 연극을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렵지 않았던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생계형 배우로 일하는 고달픔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얼마간의 무명시절이 있기는 했으나, 모 유명 연출가와의 친분 덕에 일찍부터 크고 작은 연극무대의 조연배우로 활약했다. 그러나 주연을 맡았던 적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그녀가 연극계의 큰손들에게 성상납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주연을 맡을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고들 한다. <신의 아그네스>에서 아그네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여성 캐릭터, 즉 원장 수녀와 정신과 의사 역을 모두 신들린 듯이 해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연극 이론에도 능통해 후배들에게 연출을 지도한 경력도 있다. 서른 네다섯 정도 이르러 늦게 결혼함과 동시에 연극무대를 떠났다. 

여기까지가 배우 유서랑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그리고 그녀를 존경해 마지않았던, 한때 풋내기 연극학도였던 내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것들 것 나열하자면 이렇다. 그녀는 무척 자존심이 강했고, 연극을 자신의 평생의 업으로 삼았으며, 그 업을 자신의 다른 목표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지냈던 그 많은 여배우들이 영화배우 혹은 광고모델로 전향하거나 지쳐서 연극무대를 떠나거나 혹은 떠났다가도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짬짬이 연극계를 기웃거리곤 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녀는 언제나 진지했지만, 자신의 업에 대해서는 한없이 겸허했다. 브레히트 파 성향이 강했던 그녀는 스타니슬라브스키 파 배우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로답지 못하다며 그들을 경멸했다. 

-냉정할 줄 알아야 해. 

그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자기가 맡은 역할에 스스로 도취되는 똥멍청이들에게 감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무대 위에서 그녀의 카리스마는 빛을 발했다. 그녀는 매 공연 때마다 새로운 연출을 연구했다. 배우이기 이전에 탁월한 연출가였다. 때로는 연기를 위해 대사를 고치는 무모함까지 불사했다. 커튼이 내려진 후 쏟아지는 박수소리에는 철저하게 귀를 닫았다. 그 커튼이 내려지는 순간이 곧 그녀 자신의 임무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 이어지는 꽃다발과 찬사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세월에 떠밀려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동사무소 여직원을 처참하게 살해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범행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확신 또한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사무소 여직원의 모욕적인 언행에 그녀가 느꼈을 모멸감을 생각하니, 어쩌면 그녀의 범행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평소의 그녀의 성질대로라면, 차라리 머리끄댕이를 잡고 바닥에 패대기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가만히 상대를 엿보다가 기회를 노려 해치는, 그런 류의 사람은 결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든 걸까. 아니면 그녀의 짓밟힌 자존심에 대한 분노가 그토록이나 강하고 깊었던 걸까.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 탁월한 연출가 겸 연극배우 유마담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상황은 매우 당혹스럽게 흘러갔다. 마침내 걸려온 김 경위의 전화가 그러한 상황을 여실히 전해 주었다. 

-피의자 진술을 듣고 유가족들 통해서 그날 있었던 일을 좀 알아봤는데요. 이게 일이 요상하게 꼬였네요?

-무슨 소리야?

-사람이 바뀌었어요. 피의자한테 모욕적인 말을 한 그 직원이, 죽은 그 직원이 아니래요. 피의자가 엄한 사람을 죽인 거더라고요. 

맙소사. 



3

한물 간 왕년의 연극배우가,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로 전락했다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이사가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격분해 그 직원을 살해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착오로 다른 직원을 살해한 거였다. 실로 흥미진진한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국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온갖 인터넷 매체와 방송이 유마담을 난도질했다. 유마담은 그녀가 가장 전성기였을 때보다 백만 배는 더 세간을 뜨겁게 달구며 유명세를 탔다. 

마침내 그 유명세가 한풀 꺾일 무렵, 마침부터 김 경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흥분해 있었다.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이니 어련했겠는가. 뭔가 긴급한 사안이었음이 분명했다. 

-작가님, 작가님 말씀이 맞았어요!

-뭐가?

-진범 잡았어요! 유마담이 범인이 아니었어요!



4

CCTV의 사각지대라고 여겨졌던 그 장소에 설치된 카메라는 나무에 가려 쓰러진 여직원 뒤에 선 용의자의 모습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장소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던 다른 CCTV는 그날 밤의 상황을 멀리서나마 똑똑히 잡아 보였다. 경찰은 그CCTV를 최대한 확대한 결과 범인의 체격이 유마담의 체격과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지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고, 마침내 범인이 남자라는 사실까지도 알아냈다. 그 시점에서 마침내 범인이 자수를 해 온 것이다. 

유마담이 누명을 벗은 시점에서, 나는 응당 인터넷이며 TV가 한바탕 이 사건을 가지고 시끄럽게 떠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때마침 축구 경기, 그것도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 월드컵 예선전이 맞물렸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였겠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언론 스스로가 그 이슈에 싫증을 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무죄방면된 유마담 본인은 그 사실에 대해 별로 애석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그녀에게 내 집에서 같이 살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갈 곳이 없는 건 아니야. 사실은 진작에 갔어야 했을 곳이지만, 가기 싫어서 내가 안 갔을 뿐이지. 이제라도 그리로 가야겠어. 내가 태어난 곳이지.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 분은 선생님이 범인이 아닌 걸 아세요?”

얘기의 핵심을 비껴갔음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너처럼 말이야. 너나 그 사람뿐 아니라, 몇몇은 내가 범인이라고 하니까 고개를 내젓더라고. 그걸 보고 깨달았지. 내가 잘못 살았던 건 아니었다는 걸.”

진범은 30대의 남자였고, 피해를 입은 여성의 전 남자친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익히 아는 그 흔해빠진, 그러나 흔해빠졌다는 말로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섬뜩한 이유로 이루어진 살인사건이었다. 

“왜 하지도 않은 살인죄의 누명을 썼느냐고 여쭤 보면, 대답 안해주실 거죠?”

사실은 대답을 들을 때까지 악착같이 캐물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왜 그랬는지가 미치게 궁금했고,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의외로 유마담은 그리 뜸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지만, 내가 기대했던 만큼 명료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생겼는지, 아니 오기라고 할까.”

“오기요?”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었어. 그년 말이야. 살면서 그런 경험을 몇 번 했지. 살인충동을 느끼는 그런 경험 말이지.”

“하지만 하지도 않은 살인을 했다고 하신 이유치고는 좀 뭐랄까, 설득력이 없네요.”

유마담은 커피가 담긴 찻잔을 들고 가만히 기울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머리가 반백이 된, 이제는 다른 일을 할래야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약해지고 나이가 들어버린 왕년의 연극배우는 묘하게도 그녀의 특유의 품위만큼은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는지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착한 바보가 될 바에는 악당이 되는 편이 나아. 나는 예술가야. 그리고 이 나라는 예술가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그러니까 그 애송이 년이 -살아 있다니 재수 억세게 좋은- 나한테 취직을 해라느니 이 동네를 떠나라느니 하는 그 따위 말을 운운할 권리가 없는 거야. 어디 그 뿐인 줄 알아? 설령 내가 그년을 진짜로 죽여서 감옥에 갔다 한들 거기서 날 먹여주고 재워줄 텐데 내가 걱정할 게 뭐 있어? 이 나라는 어린애를 강간해서 불구로 만들어도 십이년밖에 안 가둬놓는다잖아. 설마 나를 그 이상 가둬놓기야 했겠어? 가둬놓고 사육해준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냐고?”

“진심은 아니시죠?”

“너무 열받아서, 어쨌든 그런 이유로 죽여나 볼까 생각은 했었다니까.”

“하지만 안 죽이셨잖아요.”

“힘이 있었다면 죽였을 거야. 사실 내가 죽인 것 같기도 했어. 적어도, 그 년이 그 죽은 불쌍한 애하고는 다른 애였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앞으로는 그러실 일이 없겠죠라고 되물으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유마담이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지금의 내 현실을 만든 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지 그 년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 따위 대접을 받아야 할 만큼 형편없이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에서 유마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왔다. 그녀는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원두커피를 아주 진하게 탄 후, 설탕과 크림을 가득 부었다. 커피를 들고 다시 거실로 왔을 때, 그녀가 울고 있지 않기를 바랐고 다행히 내 바람대로 그녀의 평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드세요. 아인슈페너예요. 마침 계피가루가 있어서 올려 봤어요. 옛날에 이거 참 좋아하셨잖아요?”

“고맙다. 정말 오랜만에 마셔 보네.”

“뭘요. 저한테는 선생님이 영원한 입센의 <헤다 가블레르>인데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는 그 연극배우 출신의 기초생활수급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인슈페너를 바닥에 부어 버렸다. 순간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외칠 뻔했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먼 옛날 내가 열광했던 그녀의 연기 중 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흔 살 이후로는 아메리카노밖에 안 마시거든. 그것도 따뜻한 걸로.”

“제가 그걸 몰랐네요.”

“마지막까지 내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한번쯤은, 이런 꼬장을 피워 보고 싶었거든. 역시 아직은 세상이 살 만한 곳이야.”

“그래도 나가실 때는 같이 치워 주실 거죠? 옛날에 선배님들이랑 끝까지 남아서 무대 정리 해주셨을 때처럼요.”

유마담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해 왔다. 

“검거된 그 놈 말이야. 내 아들놈 친구였어.”

“네에?”

“물론 내 아들 녀석은 지금은 제 아빠 따라 중국으로 가 버렸지만, 그 녀석을 내가 키우던 시절에 그 녀석하고 친하게 지냈던 놈이었어. ”

“그래서 그걸 알고 일부러 누명 쓰신 거예요?”

“그럴 리가. 물론 알았으면 일부러라도 누명을 써 줄 각오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몰랐어. 내가 어떻게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겠니.”

“그러면 어떻게 그걸?”

“그 녀석이 날 알아보고는, 안되겠다 싶어 자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경찰서로 왔다더라. 때마침 경찰에서 그 녀석 행적을 확보해서 그 녀석을 찾으러 나가던 길에 그 녀석하고 마주친 거고.”

유마담은 손끝으로 눈을 몇 번 비볐다. 나는 얼른 걸레를 가져와 유마담의 양말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엎질러진 비엔나 커피를 닦았다.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고, 젖어버린 그녀의 양말을 벗겼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새 양말 갖다 드릴게요.”

“미안하다고 하면서 울길래 그냥 미련없이 보내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그년이 제 친구들하고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다더라. 돈 없는 찐드기 떨어내느라 힘들었다며 히히덕거리는 걸 듣고, 그만 못 참고 일을 저지른 거라고.”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 있기는 했지만, 유마담의 얼굴 아래 감춰진 그 성미는 쉽게 눈물을 허용하는 연약한 여성의 성미는 아니었다. 

“참 어렵지 않니?”

“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 말이다. ”

“……”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지. 타인의 인간다움을 지켜 준다는 게, 그게 어려운 거였는데 말이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뭐가?”

“그냥요. 그냥, 뭔가 제가 큰 잘못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너보고 죄책감 느끼라고 한 말은 아니야.”

“제가 좀더 일찍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야 했어요.”

“네가 더 일찍 날 찾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더 비참한 상황에 내몰려 있었을 때 내 꼴을 내가 너한테 보이고 싶었겠니?”

“커피 다시 타 드릴게요.”

“그 아인슈페너 말인데. 향은 참 좋더라. 그걸로 다시 타 줄래?”

“마흔 이후로 아메리카노만 드신다면서요?”

“그 대사는 고쳐야겠다. ‘마흔 이후로 계피가루는 안 먹는다’로.”

그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뼛속까지 연극배우였다. 

“선생님은 정말, 진짜 천상 연극쟁이세요. 선생님이 아직 살아 계신 걸 보면, 저도 일찍 생을 마감할 생각은 접어야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얼마 전에 자살 기도했었어요. 모르셨죠?”

“뭐? 아니, 나 같은 기초생활수급자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젊디젊은 네가 왜?”

“그야 저도 기초생활수급자니까요.”

“뭐?”

“저도 기초생활수급자라고요. 정신병력 기록 때문에 취업을 못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어요. 결혼한 남동생이 생활비를 조금 부쳐줘서 근근히 살아가고는 있지만요.”

유마담이 낮게 숨을 토해냈다.

“아니 너 같은 애가, 너 같이 재능있는 극작가가 어쩌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비싼 커피를 그냥 쏟았네.”

“비싼 커피 한 번 못 쏟아볼 인생이면 그냥 죽는 게 낫죠.”

내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허무함에 점령당한 것처럼 보이는 유마담, 왕년의 연극배우 유서랑은 입을 바보처럼 헤벌린 채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벌어진 그녀의 입모양이 천천히 변하면서 양 귀퉁이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의 미소가 천천히 입가를 따라 피어오르면서 마침내 온 얼굴로 번져갔다. 

나는 커피로 범벅이 된 걸레를 화장실에 던져넣고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새로 내렸다. 타인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면서. 왕년의 연극배우 출신의 기초생활수급자와 전직 극작가 출신의 기초생활수급자(정신병력이 있는)가 그날의 그 허무한 한낮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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