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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Dec 06. 2020

6.  온전한 나로 보낸 하루

일상

12월 6일자 오늘의 운세를 보니 "오늘만큼은 누구의 가족이라는 위치나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보자"는 운세가 적혀 있다. 오늘의 운세는 인스타그램에서 별자리로 보는 것과 출생연도로 보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생각보다 잘 맞아서 종종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우연찮게도, 오늘은 내가 진짜로 오롯이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써 보기로 했다. 얼마나 근사한 하루가 될지 은근히 기대하면서.

크로와플과 커피
내가 아는 가장 전형적안 연애의 맛 <애플생크림와플>

일단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재활용 쓰레기를 비우고 온 후 신나게 나가서 커피와 와플을 사 들고, 레토르트 카레와 과카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보카도를 샀다. 집에 돌아오다가 길바닥에서 침을 뱉고 가는 할머니 때문에 시분이 확 상했지만, 따끈따끈한 크로와플(맨 앞 사진) 덕에 기분이 다소 풀렸다.

그리고는 잠시 빈둥거리다가 늘 하던 대로 책 편집 작업을 시작했지만, 역시 "작가로서의" 작업이지 온전한 나로서는 할 일이 아니다 싶어 이번에는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식은 밥이 생각나 데운 레토르트 카레를 부어 식은 밥을 해결하고 다시 헬렌 한프 책으로 돌아가 번역판과 원서를 비교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문다. 오늘따라 햇빛이 창가로 너무나 잘 드는 하루였지만,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어쩐지 추워서"  일단 커피를 사 들고 온 후로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평소보다 오래 목욕을 하고, 저녁에 만들 과카몰리 재료를 꺼내 놓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근사한 하루란 말인가??? "온전한 나 자신"을 위해 보낸 의미있는 하루, 아니 의미있어야 마땅한 하루가 이렇게 허무하게 흘러갔단 말인가? 아니면 원래 온전한 나 자신으로 보내는 일상이라는 게 이렇게도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오롯이 충실하게 "단촐한 몇 가지 소일거리"로 소비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일까?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을까. 물론 좀 더 밀도있고 보람찬 하루를 보내느냐 혹은 나처럼 느슨하다 못해 게을러터진 하루를 보내느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긴 했다.

하기 싫은 혹은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 껴들었지먄 그래서 도리어 행복했다.

보람도 있었다.

헬렌 한프의 원서를 제법 많이 진도를 뺐다.

의미도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가로서의 지위라던지, 누군가의 딸 엄마 이모가 아닌 그냥 나라는 존재가 영위하는 일상에 대해 평소 때라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음악이 빠지면 안 된다.

누자베스의 tsurugi no mai 와 김심야라는 새로운 힙합 뮤지션의 곡들과 오래된 in ya mellow tone 앨범으로 하루를 채웠다.

나의 느슨한 일상.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많지 않은 시간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욱 행복했던 하루.

어느 누구와도 똑같지 않았을 나의 하루.

그 하루는 요렇게 허무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고요하고도 여유로운 즐거움을 품고 흘러갔다.

그게 오롯이 "나"라는 존재로 보낸 오늘 하루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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